대전광역시/대전광역시

대전...동춘당

임병기(선과) 2011. 2. 2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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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은 동춘당의 아버지인 송이창(1561~1627)이 세웠으며, 당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1643년(인조21)송준길 선생이 38세 때 중건한 별당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5량집이다.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주위는 간결하게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동춘당은 뒤쪽에 저만치 물러나 앉아 있다. 마치 사랑방에 정좌하고 있는 사대부의 모습이다. 특별히 주위를 꾸미지 않았고 다만 고송을 비롯한 몇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다. 기호학풍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춘당은 응봉산 자락을 등지고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인간이 사는 집은 무엇보다도 환경에 민감하다. 환경요인을 크게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으로 나누어 볼 때 동춘당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환경요인이 극명하게 작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뜨겁고 습한 여름 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바닥을 들어올려 마루로 만들고 추운 겨울에 대응하기 위해 한쪽은 온돌로 꾸몄다. 이 두 공간은 당시 쟁쟁한 인물들이 드나들던 곳이고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공간이기도 했다.

 

쌍영창과 머름(현판 좌측 아래)

 

동춘당은 1단의 거친돌 바른층 쌓기 한 기단 위에 방형 주초석을 놓고 8치각 방주를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양봉(梁棒)이 내외로 돌출되어 대들보를 보강하고 그 위에 굴도리로 된 주심도리와 대들보가 결구되어 있다.

 

이 집의 정면에서 보는 온돌방의 영창(映窓)은 쌍창이다. 창 가운데 문설주를 하나 세워 창이 2개가된다. 그래서 '영쌍창'이라 부른다. 창 아래는 머름에 맞추고 옆의 설주와 위의 인방은 흙벽과 맞대어 놓았다. 이를 통털어 문얼굴이라 한다. 문얼굴은 그 집의 격조를 나타내고, 나아가 집주인의 인품까지도 엿보게 한다. 문얼굴의 나무는 흙색으로, 흙은 나무 색으로 동화되어있다. 흩어져 있는 자연을 사람이 모양을 내서 세운 것이다.

 

문얼굴 아래는 머름이 설치되어 있다. 머름이 있으면 출입을 하지 않으므로 문이 아니라 창이 되는 것이다. 머름의 높이는 앉아서 팔을 올려놓았을 때 가장 편한 높이로 만든다. 그 높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한자 다섯치(1.5尺)에서 한자 여덟치(1.8尺)다. 그리고 밖에서 방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내부공간에서의 행위를 될 수 있으면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가장 자연스런 기능과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좌측 온돌방 아래 초석과 같은 높이로 뚫어진 굴뚝은 유학의 은둔적 사고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남이 보는 앞에서는 편히 놀고, 먹고, 자는 행위를 악덕 시 했기에 따뜻하게 불을 지펴 편히 쉬는 것도 극히 자제해야 했다. 굴뚝이 높으면 불이 잘 지핀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굴뚝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서 '따뜻한 온돌방'이라는 본능적 행위를 억제하는 유학적 덕목을 유지하려 했다. 특히 예학의 종가라 할 정도로 학덕이 높았던 동춘당은 아예 굴뚝을 달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 본뜻이 달라질세라 지금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들어열개창호

 

동춘당은 평면으로 보아 전체 여섯칸집으로 우측4칸은 대청이고 좌측 2칸은 온돌방인데 방 북측 상부에 반침을 내어 붙였다. 대청의 창호는 방쪽을 제외하고 3면 모두 띠살문으로 하였으며 그중 앞쪽과 우측은 들어열개로 했다. 이 들어열개 창호는 우리나라 건축에만 있는 독특한 것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창호 형식이다.

 

들어열개의 창호의 특징은 한국 건축 공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강한 자연동화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들어 열음으로써 외부의 자연공간과 내부공간이 하나로 되어 내부공간에 앉아 있지만 결코 내부공간이 아닌 자연속에 앉아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동춘당의 4분합 들어열개를 모두 접어 들 쇠에 걸면 인공공간은 곧 보다 큰 하나의 공간으로 확대되어 외부의 자연공간과 일체가 되고 곧 자연인으로 동화가 되는 것이다.

 

건물 앞에 걸려있는 "同春堂" 현판은 송준길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우암 송시열이 직접 써서 걸어둔 것인데 동춘당이란 봄(春)과 같으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봄은 양(陽)이요 양은 언제나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편액은 우리나라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구성요소이다. 편액이 없는 한국건축은 생각할 수 없다. 편액이 없으면 건축의 의미가 반감될 뿐만 아니라 이 편액으로 인하여 건축에 생명이 있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편액이 있으므로 건축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이다. 우암은 동춘당뿐만 아니라 주변에 많은 편액과 주련, 시문들을 써 주어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측면 궁판은 2단이다.

 

이 건물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궁판이 의외로 크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이만한 궁판이면 상하 2단으로 처리하는데 1단만으로 처리한 것이다. 특히 동춘당의 건축사적 가치는 구들과 마루가 접합되어 건축되었으면서도 남방적인 지역성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고상식(高床式)으로 꾸민점에 있다고 하겠다.

 

쪽마루

 

대부분의 이와 같은 별당 건축은 주택 내에서 사랑채의 연장으로 가장의 다목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접객, 독서 한유(閑遊), 관상 등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 위치는 항상 이에 알맞은 경승지를 택하고 인공 연당과 축산으로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주택 내에서의 생활 기능도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에서 공동 대화의 장소로, 또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모든 역할을 행한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독서와 강학, 집회소의 기능도 겸비하고 있다. 송준길이 말년에 우인, 제자들과 모여 [회덕향약(懷德鄕約)]을 만든 곳도 바로 이곳이다.

 

 

 

동춘당의 온돌방에 정좌하여 정면을 바라보면 일각대문이 보이고 풍광이 전개된다. 바로 송촌(宋村)의 풍광이다. 그 풍광의 반은 담으로 절제된 안공간(私的空間)이고, 그 반은 바깥공간(公的空間)이다. 즉 담 밖의 공간과 담 안의 공간이 동시에 전개된다.

 

이 별당건축은 당시 건축술의 정수를 기울여 조영했기 때문에 우리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유구이다. 이러한 별당건축으로서 강릉 활래정, 해운정, 월성의 무첨당, 안동의 임청각 군자정, 달성의 태고정, 그리고 동춘당과 이웃하고 있는 송애당, 쌍청당, 제월당 등이 있다. 모든 건축문화재가 국보이고, 보물이지만 특히 동춘당에 보물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웃에 산재해 있는 유사한 별당건축 중에서도 가장 대표될 만 하기 때문이다. 동춘당의 규범적인 건축형식은 주변에 산재한 다른 별당보다도 정갈하고 균제감을 보여주고 있다. 애써 치장하지 않고 단아한 모습은 동춘당 선생의 인품을 대변하는 듯 하다.

 

***보수예정으로 출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덕문화원 자료를 편집하였습니다.

 

201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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