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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동춘선생 고택

임병기(선과) 2011. 2. 25.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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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

 

동춘고택은 대덕구 송촌동의 동춘당공원내에 별당인 동춘당, 송용억 가옥과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택은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관직을 물러난 후 거처하던 곳으로 동춘당 뒤쪽에 있다. 막 도착하였으나 현재 거주하시는 분이 문을 닫고 외출 준비중이어서 둘러볼 기회가 사라진 줄 알았으나 시골집 사립문 처럼 노끈으로 가볍게 묶인 문을 열 수 있었다. 외출중이지만 방문객의 마음을 고려한 심성으로 그렇게 배려하였을 것이다. 송촌(宋村)동이란 지명으로 미루어도 일대가 은진 송씨 집성촌임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연유로 거리명, 아파트 이름도 선비마을이었다. 

 

   

사랑마당

 

고택은 동춘당을 앞에 두고 뒤로는 나지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남향으로 넓게 트여 있다. 무엇보다도 넓은 사랑마당이 눈에 들어 온다. 본래부터 넓게 조성했는지는 모르지만 영남지방 고택에 익숙한 내눈에는 허전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고택은  사랑채, 안채 그리고 2채의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도 후송이 거주하여 문이 닫혀 있다. 중문 안쪽은 문이 닫혀 들어 갈 수 없어 사랑채,안채에 대한 설명은 대덕문화원에서 가져왔다.

 

사랑채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가운데 대청이 놓이고 좌우에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배치되고 좌측 1칸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나 있다.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로 들어가려면 이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내외가 분명하여 사랑채와 안채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반드시 남자의 공간과 여자의 공간을 구별해두고 그 영역에서만 활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도 이러한 법도가 지켜져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외담을 치고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공간의 내외질서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내외담이 없었고 사랑채 뒤에 반침이 있어 내외담 역할을 하였는데 습해서 썩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나니 안채와 직통으로 통하여 할 수 없이 격담을 하였다고 한다. 정면 여섯 칸의 사랑채로는 동춘선생의 명성으로 보아 너무 작다. 더구나 행랑채가 없다면 말이다. 사랑채에서 대청, 중문칸, 아궁이 함실을 제외하고 나면 결국 세 칸의 방밖에 남지 않는다. 사랑채에서 할 일을 별당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이만한 사랑채면 보통의 사대부 가옥에도 못 미친다. 사랑채로서 최소한의 공간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랑채에 백세청풍 글. 百世淸風(백세청풍)은 百代(백대)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百世(백세)는 ‘오랜 세월’ 또는 ‘영원’을 뜻하고, 淸風(청풍)은 매섭도록 맑고 높은 군자의 절개나 덕을 비유 한다. 따라서 ‘백세청풍’은 영원히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를 의미한다. 역사 시간에도 배운 동춘당 송준길은 누구인가? 역시 대덕문화원 자료를 살펴보자.

 

송준길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同春堂(동춘당), 본관은 은진이다. 영천군수 송이창의 아들이다. 서울 정릉의 외가인 김은휘의 집(서울 정동 구 대법원 청사자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일찍이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었으므로 송준길의 출생까지를 합쳐 사람들이 이곳을 三賢臺(삼현대)라 불렀다. 문묘에 배향 된 삼현이 태어난 곳이라는 뜻이다. 그는 어려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청년기에 송시열·이유태 등과 함께 김장생(동춘의 표종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4년(인조2)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고, 163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마에 제수되었다.

 

이후 내시교관·동몽교관·시직·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 기간 중에 1633년 동몽교관으로 잠시 출사하였으나, 장인 우복 정경세의 죽음이 있자 이를 빌미로 사임하였고, 곧이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출사할 명분이 없다 하여 향리에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봉림대군)이 즉위하였다. 효종은 청이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만행을 자행하는데 대해 대군 시절부터 강한 복수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사랑채 툇마루

 

특히 청에 인질로 끌려가서 8년 동안이나 볼모 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또 자신이 그곳의 지리·정세 등에 밝았으므로, 즉위와 함께 자신의 북벌의지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효종은 먼저 조정에서 친정세력을 배제하고 재야의 참신하고 절의있는 인제들을 등용하고자 하여 산림을 대거 중용하였으니, 김상헌·김집을 필두로 한 이른 바 산당의 출현은 바로 북벌의지의 산물이었다. 효종이 즉위한지 한달이 되는 6월 8일, 송준길(전,지평)은 김집(전,승지)·송시열(전,지평)·李유태(전,사부)·권시(전,자의) 등 호서의 대표적 유자관인들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서로 뒤를 이어 조정에 들어왔다.

 

효종은 다음 날 처음으로 정사를 보았는데 이때 이들의 대표격인 김집을 발탁하여 예조참판에 제수하였다. 이조가 예부의 관헌은 반드시 문신 중에서 등용해야 한다고 하여 반대를 하였으나, 왕은 "옛것을 상고하고 글을 읽은 사람을 부른 것은 장차 등용하기 위해서이니, 상규에 얽매일 것이 아니다"라 하여 그의 산림중용의 방침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김집은 여론을 의식하여 이를 극구 사양하였으므로 효종은 우선 그를 예조참판에 제수하였다가, 대사헌을 거쳐 그 해 11월 이조판서에 기용하게 된다. 산당의 영수인 김집에 대한 이러한 예우는 곧 그 당여인 송준길·송시열의 지위변화에도 밀접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송준길은 진선·장령 등을 거쳐 집의(종3품)에 올랐는데, 이때 그는 공신계로서 비난이 높았던 김자점을 탄핵하여 이들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밀고하여 청의 조사 사절이 줄을 이어 내려오는 등 사태는 급변하게 되자, 송준길은 산당계의 다른 인사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송준길은 집의·이조참의·찬선 등으로 여러 번 부름을 받았으나 계속 사퇴하였고, 1658년(효종9) 7월 조정에 다시 들어가 찬선·대사헌·이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그해 12월에는 성균관의 제주(정3품)를 겸하게 되었다. 1659년 3월에 병조판서에 제수 된 후 대사헌, 우참찬 등을 맡아 이조판서를 맡고 있던 송시열과 함께 국정을 이끌면서 북벌계획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당연히 국시로 삼아야 하되 바로 북벌시행은 불가하며, 민생의 안정을 이룬 후에 대지를 펼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민생을 살리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일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국가의 북벌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이 발발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제를 주장하여 뜻을 관철시켰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등 여러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계의 계속된 상소로 사퇴하였다. 이때 1665년(현종6) 원자의 보양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670년 세자의 관례가 있어 조정에 나갔으나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낙향하였다. 이후 2년 동안 회덕 향리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672년(현종13) 67세로 타계하였다.

 

1673년 송준길은 현종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인선왕후(효종비) 의 죽음을 계기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대두되었고(2차 예송),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설이 서인의 대공설을 누르고 승리하게 됨에 따라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1675(숙종1) 송준길은 허적·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작 당하였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함으로써 관작이 다시 복구되었다. 1681년 회덕의 숭현서원에 배향되었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연산의 돈암서원, 공주의 충현서원 등과 이외에도 많은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고, 1756년(영조32)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동춘당집』,『어록해』등이 전하고 있다.

 

안채

 

동춘 선생의 지위로 보아 사랑채 앞쪽, 대문 옆으로 행랑채가 있을 법한데도 없다. 이 댁의 노복들은 어디에 거주했고 주인 행차에 따라온 노복들은 어디에 여장을 풀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사랑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옹색하지 않은 크기의 안마당이 있다. 안채를 'ㄷ '자 모양으로 둘러 앉히고 그 가운데 마당을 둠으로서 소위 '중정식 주택'이 되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뜰 집'이다. 이 마당은 우리와 같은 유교권에서 여성의 내향적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안마당은 외부이면서 내부이고, 내부인 듯 하면서도 외부가 되는 것이다. 즉 안채의 기능이 안마당으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외부가 하나의 기능으로 통합이 된다. 가령 안마당에 천막을 치게되면 완벽한 내부공간이 되기도 한다.

 

영남지방의 안마당에 비해 이 지방의 안마당은 널찍하고 여유가 있다. 지리적 환경이 그 원인인 듯 하고, 한편으로 기호학파 학맥의 전통에도 원인이 있는 듯 하다. 이 안채는'ㄷ'자형 평면이며 3칸으로 된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 안방이 있고 안방 뒤로는 골방이, 앞으로는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대청을 겸하여 동측으로는 안쪽에 건넌방, 부엌, 행랑방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은 안주인이 기거하며 집안의 큰 일을 돌보는 곳이다. 남자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어 강한 폐쇄성을 갖고 있으며 여인네들의 도덕적 규범을 터득하는 곳이기도 하다.

 

안채 후원

 

안채의 크기는 사랑채보다 훨씬 크다. 사랑채가 최소한의 기능만을 공간화 했다면 안채 역시 최소한의 기능을 공간화 하였다고 하겠다. 사대부가에서 안채의 크기는 대개 이만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채는 사랑채보다 크다. 달리 말해 사랑채가 크다는 것은 일종의 집사치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대부가의 안채는 실용성과 기능성을 바탕에 깔아둔 것 같다.

 

안마당이 넓음으로 안채를 특별히 사랑채보다 높이지 않아도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어 좋다. 안대청에는 사분합을 달아 추운 기후에 대비토록 하였고 각 방의 기능을 연결하기 위해 마당 쪽으로는 좁은 퇴를 달아 연결시켜 놓았다. 한편 이 안대청 사분합은 들어열개로 되어 이를 들어올리면 안마당과 안대청이 하나의 공간으로 전용(專用)될 수가 있는 것이다.

 

좌측 별묘, 우측 가묘

 

고택에는 2개의 사당이 있어 이채롭다. 내기억으로는 해남 녹우당에서만 보았던 경험 밖에 없다.좌측은 동춘당의 불천위를 모신 부조묘로 보이며  옆은 가묘(家廟)로 4대조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묘는 정침 동쪽 높은 곳에 조성한다.

 

불천위(不遷位) 제도는 제사문화와 직결된다. 보통 4대조까지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만, 불천위는 말 그대로 사자(死者)의 신위(神位, '位牌' '神主'라고도 함)를 4대 봉사(奉祀)가 끝난 뒤에도 없애지 않고 계속 봉사하는 신위를 뜻한다. 즉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과 학문이 높은 인물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말한다.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이다.

명확히 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불천위는 일반
적으로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결정하는 향불천위(鄕不遷位=유림불천위), 문중에서 뜻을 모아 정한 사불천위(私不遷位=문중불천위)로 구분한다. 불천위로 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왕이나 왕족이 아닌 일반 인물이 불천위에 오르는 경우다. 국불천위가 되는 것은 왕이라도 쉽지 않았던 만큼, 양반 사대부에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 인물이 죽은 후 그 학행이나 공적이 기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
되면, 조정에서는 임금의 명으로 시호(諡號)를 내리고 후손에게 그를 영구히 모시도록 했다. 제사 때는 나라에서 제관과 제물을 보내고, 그 후손에게 은일(隱逸)로 벼슬을 제수하기도 했다. 시호를 받은 사람은 그의 신주가 영구히 사당에 모셔지며 불천위가 되고, 그는 중시조(中始祖)가 되어 그 후손이 종가를 이루게 된다. 시호를 받았다고 모두 불천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불천위는 국가 주도로, 또는 유림의 건의에 따라 국가에서 인정하는 국불천위가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향촌의 유림이 자체적 공론을 거쳐 불천위로 정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문중에서도 조상 가운데 훌륭한 인물을 불천위로 모시기도 했다.

일반인 중 국불천위로는 우선 문묘(文廟)에 배향돼 있는 인물을 꼽을 수 있다. 모두 18명으로, 신라의 설총·최치원, 고려시대 안향·정몽주, 조선시대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김인후·이이·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시열·송준길·박세채이다. 문묘에 배향된 불천위의 상당수가 사화
(士禍)와 관련이 있다. 사화 같은 역사적 위기 속에서 그 인물의 됨됨이가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가묘. 단청도 없이 소박하고 검소하다

 

 

 

문묘 배향에 은진 송씨가 집안에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 있고, 광산 김씨 문중에도 사계 김장생과 아들 신독재 김집이배향되어 있다. 동춘당과 우암은 모두 사계와 신독재와 학문적으로 사제간의 연을 맺고 있다. 동시대에 한 지역과 한 학파(學派)에서 그렇게 어렵다는 문묘에 4분이나 배향된 저력은 무엇일까? 그런 저런 연유도 공부하고 답사에 임해야 하거늘 애시당초 그런 능력 부재임을 깨달았어도 주마간산식의 답사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201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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