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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옥류각

임병기(선과) 2011. 2. 23.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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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아주 오랜 입대후 첫면회 처럼 그런 길고긴 기다림이었다. 유난히도 질긴 혹한의 동장군의 위력과  예상치 못한 허리 통증은 내 유년 기억 저편의 초라한 몰골의 인물들이 끝없이 오버랩 되어 파노라마가 되곤 했다. 떠나고 싶다는 욕구보다 치유될까 라는 짓눌림은 결국 나이트매어가 되어 숱한 밤을 하얗게 밝혔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 와중에도 방방곡곡 옛님의 동선은 세우고 지우고를 반복했으며 최종으로 가까운 대전을 설정하고 우리카페 묵은정님에게 자문을 구해 무려(순전히 내기준이다) 3개월 만에 길위에 섰다. 지천명을 넘어 이순이 멀지 않은 초로(?)의 몸임에도 아직 봄날의 설레임이 저편에 남아 있는듯 가벼운 뜰림이 있어 더더욱 흥이나는 길이었다.

 

 

옥류각.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을 뵈러 가는 길에서 만난 과외의 횡재였다. 나중에 묵은정님의 전화선을 타고오는 목소리에서도 느꼇지만 스쳐 지났으면 후회막급이엇을 것이다. 초입에서 무심코 사진에 담은 超然物外 초연물외의 의미가 超然物外 獨行無憂(물외에 초연하여 근심없이 살아가는) 뜻인지 판단할 능력이 내게 없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옥류각의 주인장인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친필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 삐뚠 시각을 즐기는 이놈에게는 향교나 서원 입구의 하마비, 절집 일주문, 도교의 동천이 자꾸만 눈앞을 아롱아롱 그리며 시선을 사고를 혼미하게 만든다. 더더구나 비래사 일주문이 있음직한 자리가 아닌가?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던 2층 누각 형식의 건물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계곡의 바위 위에 지은 건물로 골짜기에 4계절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 온다는 뜻에서 ‘옥류’라고 이름지었다. 이곳에서 송준길 선생은 우암 송시열, 송애 김경여, 창주 김익희 등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계곡 사이의 바위를 의지하여 서로 다른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짠 특이한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면이 계곡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옆면으로 출입하도록 하였으며, 입구쪽부터 2칸은 마루, 1칸은 온돌방이다."

 

장문의 글을 누가 읽어 보겠냐만은 옥류각 상량문도 다음 답사객에게는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며 구해왔다. 

 

玉溜閣上樑文 [飛來庵水閣上樑文] 

盖聞招提勝境。擧在雲水之間。兜率諸天。莫非藤蘿之外。雖釋流遁俗之所。(개문초제승경。거재운수지간。두솔제천。막비등라지외。수석류둔속지소。) 대저 듣건대 사찰은 모두 구름과 물의 사이에 있고, 도솔의 모든 하늘은 등 넌출과 댕댕이 덩굴 너머가 아님이 없도다. 비록 승려들이 세속을 피하는 곳이지만,

亦游人探勝之塲。况復讓水廉泉。卽近仁里之物色。神丘福地。曾經嘉客之逍遙。(역유인탐승지장。황부양수염천。즉근인리지물색。신구복지。증경가객지소요。)또한 노니는 사람들이 경관을 더듬는 자리이기도 하다. 더구나 양수와 염천은 바로 좋은 마을의 물색이고, 신구와 복지는 일찍이 귀한 손님이 거닐던 곳이라네.

如欲遺躅之長存。可無別構之新刱。惟我飛來一洞。卽是[缺]述名區。雞山北迤。(여욕유촉지장존。가무별구지신창。유아비래일동。즉시[결]술명구。계산북이。)만약 남긴 자취를 길이 보존하려면, 별다른 누각을 새로 세우지 않을 수 없도다. 오직 우리 비래라는 한 마을은 바로 우술의 유명한 구역이네. 계산이 북쪽에 둘렀으니

疊千堆之翠錦。鷹嶺西峙。聳一朶之靑蓮。丹崖翠壁之崢嶸。蔽虧日月。(첩천퇴지취금。응령서치。용일타지청련。단애취벽지쟁영。폐휴일월。)천봉의 푸른 비단 겹쳐 있고, 응령은 서쪽에 드높으니 한 송이의 연꽃이 솟아오르는 듯, 붉은 벼랑 푸른 낭떠러지 쭈뼛쭈뼛하여 해와 달도 가리고,

碧流瓊潭之環轉。呑吐雲煙。飛錫何待於高僧。丈室遂開於居士。相度經始。(벽류경담지환전。탄토운연。비석하대어고승。장실수개어거사。상도경시。)맑은 시내 구슬 같은 못물이 감돌며 구름과 연기를 삼키고 토하누나. 순례 스님을 어찌 높은 스님만을 기다리겠는가? 장실이 드디어 거사에게 열렸도다. 살피고 헤아려 경영함은

盖出長老先生。護視勤渠。更有學祖和尙。雲窻負笈。不但講誦之所於。月臺披襟。(개출장로선생。호시근거。갱유학조화상。운창부급。부단강송지소어。월대피금)대저 선생께서 하시었고, 보호함에 부지런함은 다시 학조화상이 있었다. 서재에 책상자를
지고 찾아오니 이곳에서 글만 읽었을 뿐만 아니라, 달 밝은 누대에서 흉금을 털어놓으니

抑亦游賞之爲最。從知特地之奇勝。亶由大賢之發揮。廬阜寒溪。溯百代之流派。(억역유상지위최。종지특지지기승。단유대현지발휘。여부한계。소백대지류파。)또 노닐고 구경함도 가장 좋았구나. 따라서 특별한 땅의 기절함을 알만하니, 참으로 현인의 발굴에 말미암았네. 여부의 한계에선 백대의 흐르는 가락을 거슬러 찾아보고

武夷仙洞。傳九曲之詩篇。沂水春衣。直追千仞之氣像。齋廚晩飯。時觀三代之威儀。(무이선동。전구곡지시편。기수춘의。직추천인지기상。재주만반。시관삼대지위의。)무이의 선동에선 구곡의 시편이 전해온다. 기수의 봄옷에선 직접 천 길의 기상을 추모하고, 재 올리는 부엌에선 때로 삼대의 위의를 보겠구나.

第緣水閣之欠營。每恨溪山之少色。天成地造。方謀八窻之開。棟折樑摧。(제연수각지흠영。매한계산지소색。천성지조。방모팔창지개。동절량최。)다만 물가 누대를 경영한 이 없으므로 매양 계산이 빛나지 않음에 한탄하였네. 하늘이 이루고 땅이 만들어 여덟 창문이 열리나 했더니, 기둥이 꺾이고 대들보가 무너져

奄失千間之庇。高樓十二。弟子之悲無窮。大界三千。衆生之願轉切。淸泉白石。(엄실천간지비。고루십이。제자지비무궁。대계삼천。중생지원전절。청천백석。)문득 천간의 덮어줌을 잃었도다. 높은 누대에 열두 제자의 슬픔이 끝이 없고, 큰 경계 삼천 중생의 소원은 더욱 간절하였도다. 맑은 샘물과 흰 돌에

想雅情之在玆。霽月春風。懷德音而如昨。顧遺意所未遑者。在今日其敢忽諸。(상아정지재자。제월춘풍。회덕음이여작。고유의소미황자。재금일기감홀제。)아담한 정취 여기 있음을 상상하고, 개인 달과 봄바람에 덕음을 품어 어제와 같구려. 남긴 뜻 미처 돌보지 못한 바지만, 오늘에 와서 어찌 감히 소홀할 손가?

董役裒財。各出有司之任。治材伐石。亦屬都料之工。瞻星斗相陰陽。(동역부재。각출유사지임。치재벌석。역속도료지공。첨성두상음양。)공사를 독려하고 재물을 모으니 각각 맡은 이의 책임이 있고 목재를 다스리고 돌도 다듬으니 또한 도목수의 솜씨에 부치네. 별자리 바라보고 음양도 살피니

定左右面背之勢。驀溪澗登崖岸。度高下廣狹之宜。空門趨事之如雲。龍象効力。(정좌우면배지세。맥계간등애안。도고하광협지의。공문추사지여운。룡상효력。)좌우전후의 형세를 정하고, 시냇물도 밟으며 언덕에도 올라 높이와 넓이도 헤아려 보았네. 불가에서 일에 모여듦이 구름 같으니 용상도 힘을 바치고

傑構告完於不日。燕雀賀成。區畫雖在於肇新。意旨實出於遵舊。堗其內軒其外。(걸구고완어불일。연작하성。구획수재어조신。의지실출어준구。돌기내헌기외。)걸출한 집이 며칠 안에 완성을 고하니 제비와 참새도 하례하누나. 계획은 새로 만듦에
있었으나 뜻만은 참으로 옛것에 따르자는 것이었다. 안은 방으로 밖은 마루로 하니

取四時之俱便。山之高水之淸。要一覽而皆盡。紺園瀟洒。隔紅塵奚啻千重。(취사시지구편。산지고수지청。요일람이개진。감원소쇄。격홍진해시천중。)사계절에 모두 편리함을 취하고, 산은 높고 물은 맑으니 한눈에 모두 보이도록 도모하였네. 절이 깨끗하니 풍진이 막힘이 어찌 천리만 되겠으며

翠甍騫飛。去靑天不盈一尺。淸流映帶。光凝山客之樽。飛瀑喧豗。響雜林僧之磬。(취맹건비。거청천불영일척。청류영대。광응산객지준。비폭훤회。향잡림승지경。)푸른 기와 나는 듯 하늘과도 가깝네. 맑은 시내 비추니 그 빛 산객의 술잔에 어리고 나르는 폭포소리 요란하니 그 메아리 절간의 풍경과 섞이누나.

居然眼前之突兀。宛爾壺裏之風光。滿壑松濤。杏壇琴瑟之餘韻。緣溪石路。(거연안전지돌올。완이호리지풍광。만학송도。행단금슬지여운。연계석로。)홀연 눈앞에 우뚝 솟아오르니, 완연히 선경의 풍광이로다. 골짜기에 가득한 솔바람소리는 행단의 거문고 여운인가? 시내 따라 오르는 돌길은

蘆峰杖屨之遺蹤。山川不殊。仁智之樂誰繼。風月無盡。吟弄之趣堪追。香山石樓。(노봉장구지유종。산천불수。인지지요수계。풍월무진。음롱지취감추。향산석루。)노봉의 지팡이 흔적인가? 산천은 다르지 않으나 인지의 즐김을 누가 이으며, 풍월은 끝이 없으니 읊조리는 취미를 따를 만하여라. 향산의 석루는

惟知放浪之是尙。淨界蓮社。豈有文物之可稱。玆實前代之罕聞。奚止一方之盛事。(유지방랑지시상。정계련사。기유문물지가칭。자실전대지한문。해지일방지성사。)오직 낭만을 숭상하였고, 불교의 주변에는 무슨 문물을 일컬을만함이 있는가? 이번 일은 전대에도 드물게 있는 것이니, 어찌 한 지방만의 훌륭한 일일 뿐이리오.

徘徊昕夕。孰無景行之思。俯仰古今。還有曠世之感。屬當脩梁之擧。敢闕善頌之陳。(배회흔석。숙무경행지사。부앙고금。환유광세지감。속당수량지거。감궐선송지진。)아침저녁으로 배회하며 누가 우러르는 생각이 없을 것이며, 예와 이제를 살펴봄에 도리어 희귀한 느낌이 있게 되도다. 마침 대들보 올림을 만나서 감히 칭송하는 글을 빼놓을 수 있겠는가?

聊賦一言。以贊六偉。(요부일언。이찬륙위。)그러므로 한 편의 말을 만들어 육위를 돕는 바이다.

抛樑東。斗削靑山繞梵宮。啼鳥一聲殘夢罷。起看朝日射窻紅。(포량동。두삭청산요범궁。제조일성잔몽파。기간조일사창홍。
대들보를 동쪽으로 올리니 깎은 듯이 푸른 뫼 사찰을 둘러있네. 새우는 소리에 늦은 꿈 깨어보니 아침햇살이 창가에 붉게 비추누나.

抛樑西。萬丈懸厓不可梯。好向曲欄延暮景。不知山外夕陽低。(포량서。만장현애불가제。호향곡란연모경。부지산외석양저。)
대들보를 서쪽으로 올리니 만 길 벼랑을 오를 수가 없어라. 난간에 기대어 저녁경관 맞으니, 산 너머 석양이 지는 줄도 모른다오.

抛樑南。夾路蒼松鎖翠巖。野色山光明滅處。箇中粧點是煙嵐。(포량남。협로창송쇄취암。야색산광명멸처。개중장점시연람。
대들보를 남쪽으로 올리니 길가의 푸른 소나무 바위를 덮었구나. )들 빛과 산기운 가물거리는 곳 그 속에 터를 잡아 아지랑이 자욱하네.

抛樑北。回望羣峰如咫尺。深處會容高尙者。武陵莫遣漁父覓。 (포량북。회망군봉여지척。심처회용고상자。무릉막견어부멱。
대들보를 북쪽으로 올리니 뭇 봉우리 바라보면 지척처럼 가깝구나. 깊은 곳에 고고한 선비  살리니 무릉도원에 어부를 보내 찾지 마오.

抛樑上。雲影天光迷岫幌。明月滿空凉露濕。一般襟抱何淸爽。(포량상。운영천광미수황。명월만공량로습。일반금포하청상。)
대들보를 위로 올리니 구름의 그림자 하늘의 빛 글방에 비추네. 밝은 달빛 공중에 가득하고 찬이슬 내리니 한 가닥 이 회포 맑기도 하여라.

抛樑下。괵괵瓊流一派瀉。 巖腹尙留題四字。至今澗谷添光價。 (포량하。괵괵경류일파사。암복상류제사자。지금간곡첨광가。
대들보를 아래로 올리니 졸졸 흐르는 시냇물 한줄기 쏟아지네. 바위 앞에 아직도 네 글자 남아있으니, 지금까지 이 골짜기의 빛을 더하누나.

伏願上樑之後。山靈擁護。谷神撝訶。綺綴璇題。不受風雨之壞。瑤簷砌。(복원상량지후。산령옹호。곡신위가。기철선제。불수풍우지괴。요첨벽체。)엎드려 원하건대 대들보를 올린 다음 산령이 옹호하고 골짜기 귀신이 도와주어 고운 단청과 밝은 액자에 비바람의 침해를 받지 않고, 처마와 딤 돌에는

永絶雀鼠之穿。惠日慈雲。頻輪騷客之閒詠。高山流水。更挹先正之遺風。(영절작서지천。혜일자운。빈륜소객지한영。고산류수。갱읍선정지유풍。)길이 참새와 쥐들의 서식이 끊어지리. 따뜻한 햇볕 자비의 구름에는 자주 시인의 읊음이 이어지고, 높은 산과 흐르는 물에는 다시 선현의 남긴 풍도를 배우리라.

還將世界外恒沙。遂作名敎中樂地。暇日琴酒之興。少長共歡。仙區泉石之盟。(환장세계외항사。수작명교중요지。가일금주지흥。소장공환。선구천석지맹。)도리어 세상 밖의 항사를 가지고 드디어 명교 중의 좋은 자리로 만들려네. 한가로운 날 거문고와 술의 흥취에 젊은이와 어른이 함께 기뻐하고, 선경에서 천석의 맹세를

儒釋同致。泛慈航而開覺路。付之渠家。傳遺鉢而接眞源。勖哉吾黨。(유석동치。범자항이개각로。부지거가。전유발이접진원。욱재오당。)유와 불이 같이 이루도다. 자비의 배를 띄워 깨달음의 길을 열어줌은 저 불가에 맡기고, 유풍을 전수해서 근원에 접함은 유학에서 힘써야 하리라.

崇禎紀元後六十六年 癸酉三月日 恩津人 宋相琦製。[註;崇禎紀元後66年癸酉/1693]

 

 

 문화재청의 설명은 별개로 하더라도 계곡위에 누하주를 둔 구조는 흔치 않다. 더구나 별서 정원의 백미인 담양 소쇄원도 계곡이 하나가 되어 물여일여라 회자되지만 이처럼 계곡에 기둥을 배치하지는 않았다.  ‘옥류각’현판은 곡운 김수증 선생의 글씨이다. 파주 자운서원 답사기에도 이미 언급했듯이 곡운 선생은 당대의 명필로 우암 송시열이 지은 파주 자운서원 묘정비를 쓴 인물이니 이리저리 은진송씨 집안과 인연이 깊은 듯 보인다. 동춘 선생에 관하여는 이후 고택 답사기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어서 여기서는 피하겠으나 우리가 답사시에 자주 만나는 곡운 선생에 관해서는  잠시 살펴보고 가자.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은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청나라에 끌려갔던 삼학사의 한 사람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로 조선 인조 2년(1624)에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이다. 김수증이 정계에서 활동하던 시대는 4색당파가 사사건건 대립하며 끊임없는 당쟁을 벌이던 때라 수많은 문신들이 혹은 유배되고 혹은 처형되고 혹은 스스로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던 시기였다.


김수증도 그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욕과 부침을 되풀이하다 만년에 벼슬을 아주 버리고 지금의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짓고 학문에 몰두한 학자다. 김수증은 1650년 26세 때 생원이 되고 2년 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이어 형조 공조의 정랑직을 거쳤다. 그가 강원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44세 되던 해(1668) 평강 현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춘천을 거쳐 평강으로 가는 도중 화악산 북쪽의 서오지리를 지나다가 당시 춘천부에 속해있던 지금의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2년 후 평강 현감을 그만 둔 그는 이른 봄 서울을 떠나 사창리 영당동을 찾아 화악산 줄기의 수려한 산세와 그윽한 계곡을 보고 곧 터를 잡아 7간모사(七間茅舍)를 지었다. 5년 후인 1675년 겨울 서울의 가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초당 3간을 지어 곡운정사(谷雲精舍)라는 현판을 달았다. 그가 정치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고 젊어서부터 산수를 즐겨 곳곳의 명산 계곡을 두루 찾은 것을 생각하면 곡운계곡에 정사를 짓고 은거한 것은 그의 은사적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곡운기(谷雲記)에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동서 수백보 남북 백여보가 될만하고 내(川)가 서쪽에서 동으로 흘러 활모양을 이루었으며 그 안쪽이 널찍하고 조용해 집 짓고 밭갈만 하다. 동쪽의 넓고 평평한 땅은 기름지고 내에서는 물놀이를 할 수 있으며 세상을 피해 이리저리 놀러다니고 밭갈이를 할 수 있으니 이곳이 바로 육곡의 위 쪽 내가 합류하는 곳이다. 또 이곳 동서에는 매월당(김시습)의 유적이 불과 몇리 안에 있고 근방의 언덕과 산들은 하룻길에 닿지 않는곳이 없다. 매월공의 시어를 따서 작은 골짜기를 ‘채미(採薇)’라 하고 이곳을 거처할 터로 삼았다. 거처와 지세를 얻어 산이 막히고 길이 험하여 들어오는 외인이 드무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뜻이 아름답고 임천(林泉)의 노고를 꺼리지 않는 사람이라야 들어올 수 있다’라는 말이 맞지 않는가.”


이무렵(1674~1675) 효종비인 인선왕후의 상을 당해 장례절차의 하나인 복제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했다. 이 정쟁에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실각해 남인이 집권하자 김수증의 아우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성천부사로 있던 김수증은 벼슬을 내놓고 곡운으로 은거했다. 곡운정사란 초당을 짓고 가족들을 모두 이주시킨 것이 바로 이때였다. 강릉 유림에 편지를 써 매월당의 초상을 구해다 정사에 걸고 학문연구와 산천 경개를 유람하는 일에 빠져들었다. 형제들과 함께 삼부연에 놀러도 가고 금강산을 유람한 후 ‘풍악일기’란 기행문도 썼다. 금강산 유람때 사귄 홍눌이란 승려를 데려다 화음동 부근에 ‘반수암’이란 암자를 짓고 기거하도록 해 교유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조카 김창흡이 따라와 화음동 입구에 곡구정사(谷口精舍)를 짓고 살면서 숙질간 학문을 논하고 글을 짓기도 했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수증은 회양부사로 다시 벼슬길에 나섰다. 그 사이 부인 창녕조씨가 세상을 떠나고 곡운 자신도 병이 들어 서울로 나가 몇년동안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다가 가끔 곡운에 들르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는 화가 조세걸을 시켜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를 그리게 하고 아들 조카 외손자까지 동원해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해 글을 쓰게 했다. 곡운에 대한 그의 애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683년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이 곡운 서실을 찾은 기록도 있다. 1689년(숙종 16) 장희빈의 소생 왕자 균의 문제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송시열이 사사되었다. 남인이 집권하면서 곡운의 동생 수흥도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그는 회양부사를 그만두었다.


이때부터 곡운의 본격적인 화음정사 경영이 시작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기하고 남인이 몰락하자 곡운은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좌윤,공조참판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곡운에 파묻혀 화음동정사를 경영하는데 몰두하면서 춘천 화천지역의 후학을 가르쳤다. 곡운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하고 경영한 화음동정사의 유적이 지금도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 계곡 일대에 남아있다.


화음동정사는 곡운이 다만 은거한 터전이 아니라 자연 속에 조성한 유교적 건축 및 조형공간이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차 은거지 곡운구곡과 능수정사 그리고 2차 은거지인 화음동정사의 조성과정이나 조성형태는 고대 중국의 은둔자들이 남긴 문헌 학문적 또는 문학적 사상과 기록을 전거로 하고 있다. 특히 곡운구곡의 명칭들과 정사 계곡 바위 우물 문 대(臺) 당(堂) 정(亭) 다리 등의 위치 형태 이름들은 주자학과 성리학의 사상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곡운구곡과 화음동정사는 자연과 학문을 사랑한 김수증의 삶과 학문 사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복거형태로 볼 수 있다.


김수증은 그가 은거하던 곡운 영당과 춘천 서면 춘수영당에 배향됐다. 1991년 4월 29일 화천 사내면 유도회와 지역 인사들이 재원을 마련해 화천군 사내면 삼일1리 영당 자리에 ‘곡운 김수증 추모비’를 건립했고 화음동정사 터는 화천군에서 관리 보호하고 있다.

 

 

옥류각의 구조로 미루어 현재 비래암을 통하여 2층 마루로 진입하여야 한다. 지금이야 시절이 좋고좋아 만인평등 시절이니 무슨 문제가 되겠야만은 그시절 비래암 스님들이 느꼈을 공포는 어땠을까? 옥류각을 경영하기 위해 절집이 보호(?)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긴해도 비래암은 불경 공부 보다는 조포사(造泡寺)에 충실한 암자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비래암 목조 비로자나불 조성시기로 보면 송씨 집안에서도 비래암 스님과 불교도 크게 배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위의 표현은 개인적인 소회이며 문중에 대한 몰상식은 아님을 밝힌다.)

 201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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