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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조선조 청백리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황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만년을 보낸 곳이다. 유적지 에는 방촌 선생의 일대기를 전시하는 방촌 기념관, 방촌영당, 반구정, 앙지대, 월헌사 등의 건물이 있다. 동행한 동료는 반구정 보다 임진강 장어 맛을 권했지만 반구정에서 선생의 흉내를 내어보는 것도 일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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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정(伴鷗亭)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명상(名相)인 방촌 황희(黃喜 1363∼1452)선생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洛河亭)이라 하였다.
선생의 사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애석하게도 한국전쟁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이 일대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에 시멘트로 개축을 하고 1975년에는 단청을 하고 축대를 손보았다. 그 후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등을 목조건물로 개축하였다.
이곳은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강안(江岸) 기암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허목(許穆)의 『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기러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20리 이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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伴鷗亭記(반구정기)...미수 허목
이는 이전 盛大(성대)의 재상 황익성공의 亭子(정자)이다.相公(상공)이 간지 三(삼)백년이 가까운데 정자가 무너져 밭으로 폐허로 변한지도 백년이나 되었다. 지금 黃生(황생은 상공의 후손으로 강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이전대로 '伴鷗亭(반구정)'이라 하여 이전의 '반구정'을 잊지 않고 있으니 역시 어진 사람이다.
상공의 혁혁한 업적은 온 백성들이 저마다 칭송하는 바이다.상공은 나아가 조정에 임하여서는 先王(선왕)을 도와 정치의 체제를 세우고 여러 官僚(관료)를 바로 잡았으니 어질고 재능있는 이를 관직에 맡겨 온 사방이 걱정이 없고 백성들이 생업에 안락하게 되었으며 물러나 江湖(강호)에 은퇴하여서는 갈매기나 해오라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榮貴(영귀)를 뜬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훌륭한 사업이 반드시 이같아야 한다.
野史(야사)에도 名人(명인)의 지난 사적을 전하고 있지만 상공은 한평생 말과 웃음이 적었고 사람들이 그 기뻐함과 노여워하는 표정을 볼 수 없었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대체만을 힘쓰고 자질구레한 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진 재상이라 하여 그 이름이 수백 대까지 인멸되지 않은 것이다.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什五(십오)리 지점에 있는 臨津江(임진강) 하류에 위치 하였다.
매일 潮水(조수)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날아드는데 주위가 너무도 편편하여 廣野(광야)도 白沙場(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고 九(구)월쯤 되면 철새들이 첫 선을 보이기 시작하며 서쪽으로는 바다의 입구까지가 二十(이십)리 가량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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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 선생이 갈매기 벗삼아 소요하던 그 시절에는 은빛 모래 밭과 어부들의 노래소리 짙게 임진강변을 흘러 내렸을 것인데, 철조망과 멀리 바라보이는 북녘 땅이 애닯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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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지대. 이자리가 본래 반구정 자리라고 한다. 1915년 반구정을 현위치로 옮기면서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이름하였다. 앙지대 상량문에는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라는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人)이라는 뜻을 취했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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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 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복안궁록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간 후, 1383년 사마시에 오르고 138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398년 (창왕 1)별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현 적성면)훈도. 고려조때 성균관학관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등용되어 세자우정자를 겸임한 후 직예문춘추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397년 11월 문하부우습유로 재임중 부모의 상기를 마치지 않은 선공감 정란의 직무가 기복시켜 관직에 임명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직첩에 서경하지 않아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후 언사로 인해 문책되어 경원교수로 편출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다시 문하부우습유에 임명되었고, 1399년(정종 1) 10월 문하부우보궐에서 면관되었다가 그해 2월 복직되는 등 강직한 직언으로 인해 수 차례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후 경기도도사를 거쳐 내직에 등용되어 형조. 예조. 병조. 이조의 정랑 등을 역임하고, 1401년 (태종 1) 지신사(승정원도승지)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하여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된 후 병조의랑으로 옮겼다가 1402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특별히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고, 1404년10월 우사간대부. 좌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언(좌부승지)에 올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정계에 유력자로 부상된 것은 1405년 12월 왕명의 출납을 총괄하는 승정원지신사가 되면서부터 이다. 그 당시 태종의 총애을 받던 박석명이 5년간 재직하던 지신사를 사임하면서 그 후임자로 좌부대언인 그를 추천하여 임명하였는데, 좌부대언에서 지신사로 승진된 것은 당시의 인사 관행상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1406년 박석명이 죽은 후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각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책봉된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정계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그가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된 것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에 그는 공신이 아니었으면서도 공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태종은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만나 볼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다.
태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는 태종이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오." 라고 말한 것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409년 8월 참지의정부사로 승진되기까지 근 4년간 도승지로 재임하는 동안 국정에 커다란 실권을 행사하면서 태종대의 왕권강화와 제도 개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1409년 12월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2월 지의정부사와 7월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고, 1411년 9월에는 병조판서로서 명에 다녀왔으며, 1413년 4월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하였다가 6월에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15년 5월 이조판서로 재임중 송사처리에 연관된 문책으로 6월에 파직되었다가 그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직되었다. 그후 1415년 11월에 의정부참찬, 12월에 호조판서를 거쳐 1416년 이조판서로 재임하면서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곧 이어 공조판서로 복직된 후 1417년 2월 평안도 도순무사로서 평양부윤을 겸임하였고, 그해 9월 태종의 자문에 응하여 왕실의 적서자봉작법을 개정하였으며, 1418년 1월 판한성부사에 올랐다.
그해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서인으로 격하되어 5월에 교하로 유배되었고, 곧 이어 남원에 유배되었다. 그 당시 태종은 그에게 세자로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양녕대군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세자의 나이가 어리고 과실의 대부분은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를 태종은 그가 중립을 취하여 사태를 관망하는 것으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에도 대간에서는 양녕대군 및 그에 관련된 인물들을 계속하여 탄핵하였으나 상왕(태종)의 오해가 풀리면서 1422년(세종 4)2월 남원에서 소환되어 직첩을 환급 받고 3월에는 과전을 환급받은후 10월 경시서제조 의정부참찬으로 복직되었다.
그후 1423년 5월 예조판서에 이어 7월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이임하자 관동지방의 주민들이 모두 아쉬워하였고, 특히 1425년 강원도 삼척에서는 중국의 주대에 선정을 베풀었던 문왕의 서자인 소공에 비유하여 그의 행차가 머물렀던 곳에 대를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였으며, 지금도 '정승고개'라고 부르며 유덕을 기린다고 한다.
1423년 12월 판우군도총제부사로서 강원도관찰사를 겸임하였고, 1424년 6월 의정부찬성, 이듬해 3월 사헌부대사헌을 겸대하였다. 1425년 3월에는 남원부사가 보낸 물품을 수뢰한 고위관직자를 조사할 때 조정의 다른 재상들과는 달리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여 당시의 여론이 황희만이 정직하다고 평가하였다. 1426년 2월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그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1월 좌의정 겸 판이조사를 재임중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된 뒤 평안도 도체찰사로 파견되어 낙산성기를 답사한 뒤 약산을 요충지로 판단하고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하여 평안도 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되었다.
좌의정 황희가 교하현령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그 대가로 현령의 아들을 행수로 임명하였다는 것과, 감목을 잘못하여 국마 1,000여 필을 죽게 한 혐의로 사헌부에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담당관에게 사사로이 부탁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파주의 반구정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당시 세종이 그를 파직시킨 것은 일시적으로 대간의 탄핵을 무마하려는 것으로 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세종은 그를 파직시킨 지 1년도 안되는 1431년 9월 영의정부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당대의 왕권 강화와 국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렴한 명신으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다. 소학,가례,성리학 등을 즐겨 공부하였지만 뚜렷한 학보를 가지고 있지못하였던 그는 학문적 업적보다는 국정을 수행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이 강했다.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6년간을 좌.우의정으로 재직하였으며, 19년간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등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동안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먼저 내정 면에서 세자의 강학 요청과 양녕대군 문제, 민무구 등 외척의 문제, 경제육전의 개정, 상정 조례의 논의, 법관의 남형 금지, 소나무의 남벌 금지, 태만한 수령의 처벌 규정 등의 시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국방문제와 대외관계면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에 대한 방비책과 구휼을 통한회유책을 동시에 강구하였다. 특히 공조판서 재임 시에는 각 도에 비치한 군사와 군수물을 낱낱이 점검하여 유사시에 대비케 하였다.
그 밖에도 야인 토벌과 4군 6진의 개척, 북방인의 대우문제, 서북토관제의정비, 병마군기의 점검, 봉화의 시행, 강무시의 군복 제정 등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였다. 경제면에서도 농사개량에 유의하여 곡식종자를 배급케 하고,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하여 백성의 복식생활을 풍족케 하는 등의 민본정책을 폈다. 그의 이러한 민본적 경제정책은 법률의 개정에도 반영되었다.
종래 원집과 속집으로 나뉘어져 내용이 중복되거나 누락되어 그 내용이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을 펴냈으며, 과전수세법, 공물문제, 기민의 구제책, 천첩소생의 천역 면제 등 광범위한 대민정책을 펴서 민중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하였다. 문화면에서도 우리의 가정생활로부터 국가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여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즉 집현전을 중심으로 문물을 진흥시키고, 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고려의 예법을 명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하여 개정. 보완하였다. 그 밖에도 복제규식으로부터 아악전례제도, 사직제도, 산천제사, 산릉보수칙, 기자묘의 신위제호, 종친대신의 상사의주 제정, 역대 국조제사제도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마련하였다. 불교정책에 있어서는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하여 태종의 회암사 행차를 반대하였고, 세종 말기에 세종이 궁중에 내불당을 설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며, 승도 600명을 동원하여 풍저창과 광흥창을 건립케 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적 출판에도 힘써 노걸대. 박통사. 효경 등을 간행케 하고 문학적인 면에서도 시와 가사 등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청빈과 과 자상한 인품, 그리고 인재양성 등에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했는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하루는 태종이 황희의 집에 들렸는데 마당에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멍석은 낡아서 많이 헤져 있었고, 그것을 본 태종이 "이 자리는 뽑아서 가려운 데를 긁는 게 좋겠다."고 할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태종대와 세종대에 걸쳐 국가 발전과 민생의 안정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고, 청빈한 생활과 어진 성품으로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1452년(문종 2)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1) 아들 황수신이 좌익공신에 책록 되면서 남원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파주의 반구정과 문경의 숙정사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의 옥동서원, 장수의 창계서원, 남원의 풍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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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재. 황희 선생의 제향을 준비하는 재사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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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선생 영당.방촌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호를 따라 방촌영당이라 한다.90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에 배향하고 인조 10년 7세손 현감 수가 백옥동 유상을 모사하여 본가에 봉안하였다가 이후 본가 터에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그후 한국전쟁에 불 탄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매년 선생의 탄신일인 음력 2월10일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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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헌사. 방촌 선생의 고손인 소양공 월헌 황맹헌 선생의 신주를 모신 부조묘이다. 부조묘는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일컽는다. 방촌과 월헌 선생에 관해서는 옛님의 숨결방 1529번 삼척 소공대비 답사기에 잠깐 언급한 적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 자는 노경(魯卿), 호는 월헌(月軒). 황희(喜)의 현손이며, 김해부사 관(瓘)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고,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고 사인에 올랐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어 이과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장원군(長原君)에 봉하여졌으며, 이어 대사헌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1509년 신창령(新昌令) 흔(訢)의 역모와 관련된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나 죄가 없어 풀려나왔고, 이후 형조 공조 예조 참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다가 1519년 조광조 등에 의해 정국공신의 호가 모람(冒濫)된다고 지목되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고 선산부사로 좌천되었다.
마침 조광조 일파가 몰락하고 그 일파인 김식이이 선산으로 귀양왔다가 도망하게 된 책임으로 공훈이 1등급 감하여졌고 1524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특제되었으며 곧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옮겼다. 이듬해 자헌대부로 한성부판윤에 올랐다가, 앞서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사송(詞訟)에 사사로운 인정을 베푼 혐의로 경기 감사로 전직된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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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에서 물러나 임진강변 어부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면서 말년을 보낸 반구정. 방촌 선생이 읊조린 시 한 수는 분명 전해 올텐데 알길이 없으니. 세종 5년 감사 재직시 남긴 선생의 동상 좌대에 새겨져 있는 글을 가져온다.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처마가 넓으니 바람이 통하기 쉽네
큰 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
먼 산봉우리는 푸르게 하늘을 쓰는 것 같네
2010.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