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이 굽이굽이 흐르는 강가, 맞은편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뒤로는 높지 않으나 제법 산세를 갖춘 산들이 자리하고 있다. 율곡은 어려서도 이곳에 자주 올랐으며, 훗날 관직에서 물러나서도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조선 세종 25년(1443)에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처음 지었으며, 성종 9년(1478)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후 80여 년 동안 터만 남아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율곡의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다시 짓고 1973년 정부의 유적정화사업 때 건물에 색을 다시 칠하고 주위를 정리하였다.
임진왜란시에 불 타 없어졌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는 대목은 여러 호종했던 신하들의 회상록에서 보통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에 몽진하는 어가(御駕)가 임진강에 이르렀을 때 배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고 왜군은 뒤를 쫓고 있는 다급한 상황에서 절벽 위에 정자(화석정)에 불을 질러 강 바닥을 낮같이 밝힌 후 겨우 배를 찾아 임금이 도강하였다”는 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그들의 침략 목적으로 서울에- 평양- 의주에 이르는 길을 내면서 문산-자유의다리-개성-해주-사리원을 거치도록 연결하였지만 조선 시대에는 평양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벽제-파주(화석정 앞에서 임진강을 건너)-장단-평산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
화석정(花石亭)이란 정자 이름은 당나라의 이덕유(李德裕)의 「평천장(平泉莊)』이란 별장의 기문(記文) 중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기문에는 “평천장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며, 꽃 하나 돌 한 개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아름다운 자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한다. 이 처럼 선조(先祖)가 애완(愛玩)하던 곳을 오래도록 보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화석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화석정에는 율곡이 여덟살에 화석정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풍광에 젖어 지었다고 하는 팔세부시 시비가 있다
花 石 亭...李珥(栗谷集)
2010.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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