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파주시

파주...자운서원

임병기(선과) 2011. 2. 6.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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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에 자리한 자운서원.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서원은 효종 1년(1650)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사액서원으로 ‘자운’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인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빈터에 묘정비만 남아 있다가 1970년 국가의 지원과 유림의 기금으로 복원하였다. 전당후묘의 배치로 외삼문 강당 동서재 내삼문 대성전이 층계를 이루어었다.

 

외삼문

 

강당

 

 

 

자운서원 묘정비.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하단은 4개의 두꺼운 판석으로 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는데 높이 77cm의 비좌에는 윗면에 복련문(覆蓮文)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文)과 괴운문(怪雲文)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썼다. 비의 상단에는 김수항(金壽恒)이 쓴 『紫雲書院 廟庭碑』라는 전액(篆額-머리글)이 쓰여져 있으며 비문 끝의 "崇禎五十六年癸亥"(숭정56년계해)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1683년(숙종 9)임을 알 수 있다.

 

 

동재

서재

내삼문

 

대성전 현판인 줄 알았는데 문성사 이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 문을 달았다. 다른 서원과 달리 제향공간이 답사객에게 개방되어 참배를 할 수 있었다.사당 안쪽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문성사

율곡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에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 본관은 덕수,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이라고 하였다.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파주의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화석정시"와 1545년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하였는데,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1551년 16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여 강릉 외가에서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좌우명으로 삼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듬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경상북도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론에 관해 토론하였다.

당시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어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며, 그해의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한 인물)이라고 일컬어졌다.

과거시험에서 율곡이 지은 "천도책"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마음을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귀천을 가리지 말고 어진 이를 기용하여 조정을 맡길 것,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1568년(선조 1) 2월 사헌부지평을 거쳐 성균관 직강으로서 천추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해에 우계 성혼과 '지선흥중'과 '안자격치성정지설'을 논하였으며, 11월에는 이조좌랑에 재임중 외조모 이씨의 병환이 위독하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갔다.

이때 사간원에서는 외조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릴 수는 없다고 하여 파면함이 옳다고 탄핵하였지만, 선조는 "비록 외조모라도 정이 간절하면 어찌 안 가볼수 있겠는가. 효행한 일을 가지고 파직시킨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기각하였다. 선조는 1569년 6월 그를 홍문관교리에 임명하면서 이조에 명하기를 "외조모를 뵈러 가는 것이 비록 법전에는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이 사람만은 벼슬을 그대로 두고 왕래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그를 총애하였다.

같은 해 대표적인 시무책으로 알려진 "동호문답"을 저술하여 당시의 사회. 경제적 폐단을 개혁코자 하였다. 1570년10월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처가인 해주 석담으로 물러나와 문하생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설하는 일을 낙으로 삼다가 이듬해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그후 이조정랑. 의정부검상 등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해주에 있으면서 고산의 석담구곡을 찾아 풍류를 즐기면서 네번째 굽이의 이름을 송애라고 하고 기문을 짓는 한편, 거기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정진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571년 6월 청주목사로 나가서 청주의 '서원향약'을 만들어 풍속 교화에 힘쓰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이때 우계와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등을 논하였다.

1573년 7월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귀경하여 세 번의 상소를 통하여 허가를 받아 8월 다시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서 '감군은'이란 시를 지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물러가려고 청해서 물러감을 얻었으니 무척이나 만족할 것이요. 그러나 저마다 모두 물러날 뜻을 가지면 누가 나라를 보살필 것이요."라고 하자, 율곡은 웃으면서 "만일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벼슬아치에 이르기까기 모두다 물러날 뜻을 가지기만 한다면 나라의 정세는 저절로 큰길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나라를 유지 못할까 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라고 응답하였다.

9월 다시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된 후 곧이어 승정원동부승지로서 경연참찬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직하고, 이듬해 1월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를 올려, 정책을 세워도 백성을 구하는 실효가 없다는 등 7가지 시폐를 지적하고 재앙을 막아낼 계책과 진덕하는 공을 말하였다. 1574년 3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후 10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로 내려갔다.

그해 가을 옛 성현의 말 가운데 학문과 정치에 귀감이 될 구절들을 모아 '성학집요'를 편찬하였다. 1577년 해주 석담을 내려가 생활하면서 '격몽요결'을 저술하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하는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사회에서 '소학'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서책중의 하나였다. 애매하고 몽매한 것은 쳐서 없앤다는 제목처럼 격몽요결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충. 효.학. 행을 강조하며, 일상생활에서 도리를 터득하여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었다. 1583년에는 시국에 대한 '육조계'를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시정코자 하였다.

그 내용은 불필요한 관직을 없앨 것, 지방의 여러 고을을 병합하여 행정을 간소화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에 대한 법규를 개정할 것, 공사노비들에게도 속량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재할 것 등으로 사회개혁을 통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추구하였다.

또한 이때 선조에게 "지금 나라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사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북방의전쟁터로 보낼 때에 군마가 부족하여 말을 바치는 노약자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말을 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탄핵 내용은 그같은 일을 임금의 재가없이 함부로 했다는 것과, 그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할 적에 누적된 피로로 승정원에 이르지 못하고 병조로 들어가 누워있었는데 그것은 율곡이 권력을 잡아 교만해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박순과 성혼이 상소하여 변호했으나 양사에서 합동으로 다시 탄핵하자 태학생 및 호남과 호서의 유생 800여 명이 그 부당함을 극력 상소하여 오히려 동인의 박근원 등이 유배되었다. 그의 정치이념의 기초는 왕도정치, 인정에서 출발하는 애민정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인정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은 나라에 의거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거한다. 백관을 창설하고 여러 직책으로 가른 것은 오직 민생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민본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건적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1569년 저술한 동호문답의 '논안민지술'에서 다섯 가지의 큰 폐해를 지적하였고 1574년에 상소한 만언봉사에서도 상하가 서로 믿는 성실이 없는 것과 .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는 성실이 없는 것 등 7가지의 병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폐단이 만연된 당시의 사회를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당시의 보수적 집권층과는 달리 시대의 상황에 따른 법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제도라도 오래 지나면 폐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조정의 성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정치는 시의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한 제도를 새로 마련하여 백성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경장기로 보았다.

민생의 어려움이 극에 달해 있는 당시에 상황을 직시하였으며 변법과 개혁을 통해 국가의 쇄락을 막을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조세법. 공물법. 노비법. 적서차별법 등의 각종 법규를 실정에 맞게 고칠 것을 내세웠다. 이이의 사회. 정치적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국방론이다. 집권통치자들이 태평성세만을 노래하면서 국방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는 당시의 형편을 통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국방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키는 것을 내세웠다. 또한 유사시에 대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나라의 세력이 매우 약하여 10년 이내에 국가에 화가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따라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군사에게는 호별세를 면해주고 무술을 단련시키며 6개월 만에 교대로 서울을 지키도록 하다가 변란이 일어날 때는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는 등 위급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10만양병설에 대하여 유성룡 등은 태평한 시대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10만양병설이 제기된후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율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하기도한 그의 시무논적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종사되었다.

 

사계 김장생

 

김장생(金長生) : 1548∼1631, 호는 사계(沙溪). 조선중기의 정치가, 예학사상가.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처벌의 위기를 맞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고 그 후 관직을 포기, 연산으로 낙향하여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음. 인조반정 이후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나, 번번히 사양하였음. 저서로는《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음.

사계 김장생(1548∼1631)은 율곡 이이 선생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아 조선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종장(宗匠)이며, 임진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정립한 주인공이다. 적통이란 자기 선생과 학파의 사상과 학문의 본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전수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종장이란 그 학문의 가장 대표적인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김장생의 삶과 사상은 17세기 이후 한국 도학자(道學者)들의 예론(禮論)과 의리(義理) 실천의 전형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장생은 아버지 황강 김계휘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유학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다. 그 후 13세 때는 구봉(龜峯) 송익필에게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을 배웠으며, 20세 때부터는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김장생은 율곡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그의 나이 31세(1578년; 선조 11)에 관직에 나갔으나 관직에 뜻을 두기보다는 학문과 저술활동 및 후진을 기르는 일에 전념했다. 김장생이 3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김계휘가 세상을 떠나자, 김장생은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했는데, 다음해 김장생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했다.

{상례비요}는 원래 신의경(申義慶)이 지은 예서(禮書)를 김장생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원문을 위주로 하여, 일반인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보충·삭제·교정하여 펴낸 상례의 초보적 지침서였다. {상례비요}가 간행되자 사람들은 대단히 기뻐하고 크게 이용하여 먼 지방이나 시골집에서도 이를 따라 상례를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김장생은 임진왜란이란 큰 전란을 겪는 와중에서도 학문 연마를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결과 51세(1598년; 선조 31)에는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를, 이듬해에는 {가례집람(家禮輯覽)}을 완성했다. {근사록석의}는 주자가 저술한 성리학 책인 {근사록}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며, {가례집람}은 관혼상제의 예를 고찰한 것이었다.

김장생이 이처럼 예론(禮論)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모든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으로 서로를 도와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의 행동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질서가 필요하다.' 고 보았고, 그것을 예(禮)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장생의 사상에 있어 어짐(仁)과 바름(義)은 도덕과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며, 예는 올바른 마음과 어진 마음을 드러내는 태도와 절차이다. 때문에 예는 어질고 바른 것이어야 하지만, 어질고 의로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라는 방법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복잡한 사회에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밝힌 것이 예(禮)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김장생은 예를 행하는 형식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양상이 변화함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김장생을 "고금의 예설(禮說)을 취하여 뜻을 찾아내고 참작하여 분명하게 해석했으므로 변례(變禮)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질문하였다." 고 했다.
김장생은 예가 다스려지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해지면 국가가 혼란해진다고 하여, 예(禮)를 국가 치란(治亂)의 관건으로 보았다. 즉 김장생의 정치사상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治國)이란 인간사회의 조화를 성취한다는 목표가 가장 우선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가르쳐 예절 바르게 살아가도록 한다는 예교(禮敎)와,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정치(政治)를 일원화(一元化)시킨 것이다.

{전례문답}은 김장생의 이러한 예치(禮治)에 대한 사상이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된 대표적인 예이다. 인조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의 아들로서 왕위에 오르자, 인조의 친아버지인 정원군을 제사할 때 사용할 축문에서의 칭호와 인조의 어머니인 계운궁(啓運宮)의 장례 복제(服制) 문제, 정원군 추숭의 문제 등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김장생은 이러한 문제를 종법(宗法)과 국통(國統)을 바로 세워야 국가의 기강이 선다는 정치사상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김장생의 예학과 정치사상은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은 조선사회의 사회질서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실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에게 김장생의 사상을 그대로 적용시키려한다면 이는 시대 착오적 발상일 것이다. 그러나 김장생은 예(禮)의 본질에는 변치 않는 덕목이 있는 반면, 예의 형식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또한 예(禮)의 가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善)을 행하는 데 있으며,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다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예학(禮學)의 근본정신은 현재 우리 사회의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17세기 예학(禮學)과 김장생의 사상은 한국의 지성사적 차원에서 전통예제의 근간을 이룩했다는 학문적 평가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우리에게 예학의 근본 정신에 입각한 창조성을 발휘하라는 훌륭한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다.

 

현석 박세채

 

1631(인조 9)∼1695(숙종 2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1. 가계와 수학
홍문관교리 의(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 《사변록 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혈족이다.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7세 때인 1638년(인조 16)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생활 2년 만에 과거공부마저도 포기하였다. 원래 이이(李珥)의 《격몽요결 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으며, 이이를 존경하였다.

2. 이이의 문묘배향 주장
그 무렵 이이·성혼(成渾)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으므로 이에 분개하여 과시(科試)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서 배웠는데, 그의 큰아버지 호(濠), 종부 미(瀰)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하여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3. 관직과 유배생활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5월에 마침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게 되었다.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서인측의 이론가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지은 《복제사의 服制私議》는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의 3년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윤휴를 경책(警責)한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이때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지평(砥平)·원주·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4. 재등용
그러나 그가 다시 등용되던 1680년까지 6년간은 도리어 학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소학》·《근사록》·《대학》·《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독서기 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 추가한 《춘추보편 春秋補編》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 心學至訣》 등을 저술로 남겼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집권층의 변화에 따라 그는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이(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 皇極蕩平論》을 발표하여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에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계 학자들과 학적 교류와 활동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서 야인생활을 하였다.이때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학구적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이 기간중에 윤증·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하여, 이른바 소론계의 학자들과 서신내왕이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히려는 저술 경향을 보인다. 《양명학변 陽明學辨》·《천리양지설 天理良知說》을 비롯하여 《이학통록보집 理學通錄補集》·《이락연원속록 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 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 三先生遺書》·《신수자경편 新修自敬編》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에는 정계의 영수격인 송시열이 죽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는 우의정·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그는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 등과 더불어 이이·성혼에 대한 문묘종사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한 바 있다.


박세채는 위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다시 말하면 중화적(中華的)천하가 무너지고 이적(夷狄)의 국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바 역천패리(逆天悖理)의 위기의식이 만연된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공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학구생활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긴밀한 연관 속에 이룩된 측면을 볼 수 있다.

5. 학문과 저술
그의 학문은 이러한 17세기의 국내외의 상황과 관련하여 네가지 특성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蕩平論)이며,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는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나아가 배척하는 일, 넷째는 사회규범으로서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외정치면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복명반청(復明反淸)의 거사를 알고 이를 적극 지지하여 존주대의라는 정책과제를 제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깊이 깨닫고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라고 우려하여 그 나름의 탕평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존주대의의 정책과제는 김상헌과 관련할 때 그의 스승에게서 전수된 대외관(對外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의식 속에서 도통수호(道統守護)라는 학적 과제에 대한 간접적인 인과관계성을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도통수호의식은 그가 이미 《이학통록보집》을 저술하여 중국 유학의 학통을 밝혔고, 그와 아울러 방대한 《동유사우록》을 써서 동방의 도학연원을 밝혔던 것이다. 그의 공적은 수제자 김간(金幹)의 평과 같이 “계개(繼開)의 공과 찬술의 풍부함은 참으로 근대 유현(儒賢)에는 없다.”라고 자랑할만한 업적이다.


또한 그가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한 태도는 《양명학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고본대학 古本大學》·《대학문 大學問》·《치양지 致良知》·《주자만년정론 朱子晩年定論》 등 양명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양명에 대한 비판은 도통수호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그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설(陽明說)을 신봉함으로써 사우(師友)사이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정제두는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의고결남계서 擬古訣南溪書》를 써서 “양명의 심설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고, 그뒤 여러 사우간에 논변이 있었던 만큼 그들의 스승으로서 논변을 질정(質定)하는 뜻에서 이러한 저술이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6. 예학사상과 저술
박세채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학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예학의 대가’라고 칭할만하다. 《남계선생예설 南溪先生禮說》·《육례의집 六禮疑輯》 등은 예의 구체적 실천문제를 다룬 서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절차까지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의 변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예학의 구현이라는 오륜적 근거를 밝히는 학적 과제가 된다.여말선초의 사상적 전환기에 제기되었던 불교의 멸륜성(滅倫性)을 극복하고 예에 의한 실천방법으로서 오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가례 家禮》를 권장하고 《삼강행실도》·《국조의례》 등의 간행은 일종의 범국민적 규범원리로서 예의식을 광역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비의 복(服)에 대하여 기년복·삼년복을 주장하거나 또는 대공(大功)·기년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예송(禮訟)은 파당적 대립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으나 문제는 대립의 성격이 예에 대한 기본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는 점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립적 성격은 분명히 예학의 구현이라는 유학의 기본과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이며 예학적 전개라는 차원이 이해된다.


그의 예학적 전개는 《육례의집》·《변례질문 變禮質問》 등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그의 견해는 역시 문인 김간의 《동방예설 東方禮說》에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제두의 글에서 고례(古禮)를 존중하고 간례(簡禮)를 강조하면서 이이·성혼과 더불어 박세채의 예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예설은 위의 학적 계통의 선상에서 정제두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저술로는 《범학전편 範學全編》·《시경요의 詩經要義》·《춘추보편》·《남계독서기》·《대학보유변 大學補遺辨》·《심경요해 心經要解》·《학법총설 學法總說》·《양명학변》·《남계수필록 南溪隨筆錄》·《심학지결》·《신수자경편》·《육례의집》·《삼례의 三禮儀》·《사례변절 四禮變節》·《가례요해 家禮要解》·《가례외편 家禮外編》·《남계예설 南溪禮說》·《남계시무만언봉사 南溪時務萬言封事》·《남계연중강계 南溪筵中講啓》·《남계기문 南溪記聞》·《동유사우록》·《주자대전습유 朱子大全拾遺》 등이 있는데, 단행본으로 유포되고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관세위. 서원 답사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시설물이다. 헌관이 사당에 들어가 제향을 행하기 전에 손을 씻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사당 동쪽 계단옆에 설치 한다.

 

 

망료위? 제향을 지내고 난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망예위라고도 한다. 도동서원에는 담장에  '감坎"이 있으며, 왕릉에는 정자각 뒤에 '예감'이라는 동일 목적의 시설물이 있다.

 

 

자운서원 내 율곡기념관에는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유물이 전시돼 있으며 가족 묘역도 있다. 부지가 넓고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한적하여 느긋하게 답사를 즐기기에 좋을 듯하다. 기왕이면 매년 9월 율곡문화제가 개최되는 시기에 맞추어 들리면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다음에서 검색한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20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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