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광탄면 용미리 쌍미륵을 모시는 용암사. 고려 제13대 선종(宣宗:1083-1094)때 석불입상을 조성한 배경과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모르긴 해도 용미리석불입상이 조성된 11세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판단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하다.
이승만 대통령 탄생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 13대 선조대왕은 왕후에게 후사가 없어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맞이 하였으나 또한 아무런 보람이 없어 일상을 초조히 기다리던 중 어느 날 밤 후궁한테 도승 두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남쪽 백 여리 되는 산(현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에 사는데 식량이 끊어져 곤궁하게 산다"면서 사라지자 깜짝 놀라 깨어났다고 한다. 꿈인지라 즉시 후궁은 사람을 데리고 그 지점 근처를 샅샅이 살피니 과연 화강암으로 조각된 거대한 쌍석불이 있는데 우람스럽게 정립한 장관을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풍파로 초라해진 불상의 주위환경을 청결히 하고 그 밑에 요사를 마련하여 백일정성으로 공양기도를 마치니 얼마 후 임신되어 한산후물(漢山候勿)이란 왕자를 탄생하게되었다고 한다. "
현재는 작은 국도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임진강을 건너 개성과 한양을 오가는 길목이어서 찾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향화가 꺼질 날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불상은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무사안전을 빌어주며 이정표 역활도 톡톡히 했으리라 판단된다. 풍수에 문외한이어서 용미리가 있으면 용두리고 분명 있을텐데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용미라는 의미가 무덤의 무덤의 꼬리 부분을 뜻하기도 하기에 우리 조상들은 용미리 시립묘지가 들어설 줄을 예견한 듯 하다.
미륵불에 대한 설명은 전통사찰관광정보에서 가져 왔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천연암벽을 몸체로 삼아 그 위에 목ㆍ머리ㆍ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은 석불이다. 보물 제 93호로 왼쪽의 불상은 사각형의 갓을 쓰고 있고, 오른쪽의 불상은 원형의 갓을 쓰고 있는데 마을 앞의 장승처럼 각각 여상과 남상을 상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위압감(威壓感)은 있으나 신체 비율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서투른 조각수법을 가지고 있어 조상(造像)의 지방화된 양식을 보여준다.
왼쪽의 둥근갓을 쓴 불상(원립불 : 圓笠佛)은 장방형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 안동 제비원 석불과 비슷하다. 하지만 부처의 상호로서 정신적인 불성(佛性)은 적어 보이며, 세속적이고 민속적인 얼굴이 지방화되어 표현된듯하다. 목은 원통형이며 당당한 가슴을 드러내고 있지만, 돌이라는 바위의 제약으로 목과 가슴이 혼연일체 되지 못하고 있다.
민족상잔의 전화가 마애불에도 얼굴에도 남아 있다. 쌍미륵으로 불리며 처음부터 남녀로 구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미술적인 관점이 부족한 나로서는 천원지방 사상을 대비하여 원립은 남, 방립은 여로 해석할 뿐이다. 괴산 원풍리 마애불 처럼 이불병립상은 거의 유례가 없어 가치가 더 커다고 본다. 또한 이불상이 삼존불이었다는 이야기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불입상을 조성하여 삼존불로 모신적도 있다고 한다.
몸체는 법의(法衣)로 감싸고 있으며, 옷자락은 양쪽으로 길게 늘어져 가운데를 V자형 선으로 조각하였다. 법의 상체는 유연하여 가슴의 띠매듭이 이 불상의 장식적인 효과를 보여주나 아랫부분은 옷자락을 나타내는 선만 조각했을 뿐이어서 바위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양손은 가슴에 들어 올려 연꽃을 잡고 있는데, 이는 관촉사 미륵보살상, 대조사 미륵 보살상처럼 이 불상 역시 미륵보살상이 아닌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오른쪽 사각형의 갓을 쓴 불상(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만 다를 뿐 신체 다른 부위의 조각수법은 왼쪽 불상과 흡사하다. 오른쪽 석불의 합장한 모습은 석불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기라도 하듯이 지극히 내려 보면서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다. 합장한 모양이 벙어리 장갑을 끼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을 자아낸다.
뒷모습
뒤에서 보면 천연암벽을 몸체로 삼고,그 위에 목ㆍ머리ㆍ갓을 별석으로 조성한 모습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다른 불상과 달리 뒷부분도 정성을 들여 마무리 하였다.
조성시기와 관련된 허균님의 글을 가져왔다. "1995년에 불상의 몸체와 뒤편 바위에서 명문이 발견되면서 이 마애불이 조선시대불상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명문은 세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제1명문에 “世祖大王往生淨土 來彌勒如來”라고 적혀 있었고, 제3명문에는 성화(成化)1년(1465)7월에 태인군 부인 이씨, 대비구니 도명, 정경부인 이씨, 전(前) 중흥사 주지대사 등의 이름이 보이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마애불의 조성연대가 조선 세조 11년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는 명문의 내용을 근거로 한 ‘조선시대 조성설’을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불상과 그 주변 바위에 새겨진 명문들은 축원문일 뿐이지 불상의 낙성 사실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명문에 나타나 있는 연대는 세조의 ‘왕생정토(往生淨土)’를 축원한 시점을 기록한 것으로서 불상 조성 시기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 명문이 불상의 조성 내력을 기록한 것이라면 지금까지 확인된 유례에서 보듯이, 명문 속에 ‘落成’.‘造’.‘成’.‘重修’ 등의 글자가 한 자라도 들어 있어야 할 것이나 이 명문에는 그런 글자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애불이 조선시대에 조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이 마애불에 조선시대 사람들이 세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축원문을 새겼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여러자료에 지방화된 불양양식이라고 했지만 불상을 조성한 장인의 정성과 테크닉 그리고 당시에 왕실과 호족의 지원없이는 조성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양식적인 측면을 강조한 의미라도 개인적으로는 "지방화"라는 표현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지방화된" 이라는 설명을 하는 다른 불상에서도 동일하게 가지는 생각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과 무병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기 위해 많이 찾고 있으니 우리카페 신혼부부 또는 예비부부는 한걸음에 달려가볼지어다. 2010.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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