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고양시

고양...공양왕릉

임병기(선과) 2011. 1. 25. 23:18
728x90

 

 

 

공양왕.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기 때문에 죽어서도 왕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옹색하고 초라하게 조성되어 있다. 왕의 능 뒤로 누군가의 무덤이 보인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고려왕조를 무시하는 사조를 반영하듯 석물, 비석이 왕릉을 능가하고 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재위 1389∼1392)과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노신의 딸로 숙녕·정신·경화 세 공주와 창성군을 낳았으나 고려가 멸망한 후 왕과 함께 폐위되었다.

 

 

무덤은 쌍능 형식으로 무덤 앞에는 차라리 없었으면 더 좋을 듯한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궁색하게 놓여 있다.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동자상을 세웠지만 무인상은 보이지 않았다. 비석은 처음에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있는 무덤을 표시하는 돌은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양왕과 삽살개 전설이 어린 연못

 

파주를 지나 고양 땅 식사동에 숨은 공양왕과 왕비, 그리고 왕이 사랑한 삽살개는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헤매다가 어두침침한 저녁 무렵에 식사동의 한 절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절에서는 왕을 숨겨 주었다가 후일 큰 화를 당할 것을 우려해 부근의 대궐고개에 왕의 일행을 숨겨 주었다. 그리고 매일 끼니때마다 밥을 날라다 주어 이 동네는 식사(食寺)동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그 후 왕의 일행은 추격군의 말발굽을 피해 원당 동 왕릉골로 숨어들었으나, 공양왕과 왕비는 이곳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일행들도 모르게 사라졌다.일행들은 근처 연못에서 구슬픈 소리로 짖고 있는 삽살개가 수상하여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보았더니 그곳에 왕과 왕비의 시신이 있었다.  그래서 공양왕이 아끼던 삽살개도 공양왕릉 앞에 석상으로 서있고 그 앞에 공양왕이 빠져 죽은 연못도 있다.

 

 

전설속의 삽살개

 

일전에 올렸던 강원도 삼척의 공양왕릉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된 이 무덤은 일명 궁촌왕릉(宮村王陵)으로 불리고 있으며, 궁촌리 추천 고돌재(고돌치)의 동편에 위치한다. 삼척에서 남으로 약 16km 정도 가면 동막리를 지나 사래재라는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가면서 바다 쪽을 건너다보면 큰 소나무가 외로이 서 있고 그곳에 석축굽을 돌린 큰 무덤이 보이고 그 옆과 앞에 작은 무덤이 2기 보인다. 이 분묘들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 등 3부자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양왕 4년 7월에 이성계가 즉위하고 8월에 전왕을 폐하여 공양군으로 봉하고 강원도 원주로 보내어 감시하다가 다시 왕과 장자인 왕석과 차자인 왕우의 3부자를 간성으로 옮겼으나, 역시 불안하여 태조 3년(1394) 3월 14일에 그 3부자를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한달 뒤인 4월 17일에 그들을 모두 죽였다

 

 

소박하다는 표현보다는 초라해보이는 공양왕릉. 정권에 빌붙어 살아남은 후손들은 세세만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왕릉보다 놓은 자리에 무덤을 조성하였으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차라리 녹음 짙은 여름날 들렸으면 이리 스산하지는 않았을텐데.

 

2010.11.13

728x90
728x90

'경기도 > 고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양...밤가시 초가  (0) 2011.01.28
고양...송포 백송  (0) 2011.01.27
고양...서삼릉  (0) 2011.01.24
고양...강매 석교  (0) 2011.01.23
경기북부 나들이  (0) 2011.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