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고양시

고양...서삼릉

임병기(선과) 2011. 1. 24.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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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 효릉 예릉 등 3기의 능이 있어 서삼릉이라고 한다. 그외에도 의령원 효창원 소경원 태실이 있다. 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과 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묘는 비공개이다. 서삼릉의 경내에는 3원과 46묘, 태실 54기가 있다.  아쉽게도 사초지에 올라 능을 살펴보지 못해 간단게 글을 남긴다.

 

희릉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장경왕후(1491-1515)는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이다. 중종의 후궁 숙의로 책봉되었으나 정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폐위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5년 세자 인종을 낳은후 산후병으로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정자각

 

제전을 올리는 건물로 丁자 형 구조로 정자각이라 부른다. 오래전 내가 알았던 분은 중국황제는 태양을 상징하여 일자각으로 조성했으며 중국에서 보아 우리나라가 정자에 위치하여 제향공간을 정자로 하였고, 후에 고종에 대한제국 황제가 된 후에 우리나라도 일자각을 배치했다고 했다.

 

 

정자각 좌후의 계단으로 제사를 모실 때ㅔ는 좌측(동쪽)계단으로 오르고 마친후에는 우측으로 내려오는 이른바 동입서출이 지켜진다.

 

신도비

비각

정자각 잡상

사초지

 

사초지 위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예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장조)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의 세째 아들이다.헌종이 후손없이 승하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인 대왕대비에 의하여 강화도에서 영입하여 19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대왕대비의 수렴청정,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국정을 바로잡지 못했고 1878년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참도. 중앙은 왕의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이며 좌우는 임금이 출입하는 어도이다. 이 용어에도 다른 의견이 있어 자료를 가져 온다.

 

                                                      조선 왕릉, 용어부터 정비해야
                                       (조선일보 2010.04/27  조선왕릉 연구가 김병헌)
난해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에 당국에서는 왕릉박물관을 세우고 관광상품을 개발하는 등 여러방안을 내놓고 있다. 필자는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용어정비라고 생각한다. 사료에 충실한 정확한 용어와 설명은 우리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해 필수이다. 이와 관련 문화재청 홈페이지와 자료를 살펴 보면 부정확한 것이 적잖아 혼란스럽다.


대표적인 예가 참도(參道), 신도(神道), 어도(御道)다.안내서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 월대까지 이어지는 길은 참도,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신도,오른쪽의 낮고 좁은 길은 임금님이 다니는 어도라고 되어 있다.하지만 의궤(儀軌)와 왕조실록을 살펴보면 그 근거를 찾을 수 없거나 부정확한 용어다.신도니 어도니 하는 용어가 쓰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도(道)와 로(路)의 쓰임에 있다.  두 글자 모두 '길'이라는 뜻이지만 그 쓰임에 차이가 있다. 로(路)가 구체적인 개념이라면 도(道)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어로와 어도 둘다 '임금이 걸어가는 길'이란 뜻이 되지만 가시적인 시설물을 두고 '어도'라고 쓴 사료는 없다. 신로와 신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물론 세종오례의에 신도가 두세 번 등장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길인지 적시하지 않았으며, 이후 문헌에는 신로만 등장한다. 즉 정자각 뒤쪽 신문(神門)에서 능상(陵上)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동구릉의 목릉(穆陵)처럼 수십m를 이어놓은 곳도 있다.


의궤에는 향어로(香御路) 또는 향로(香路)로 기록하고 있다. 재실(齋室) 향대청(香大廳)에서 출발한 향과 축문이 정자각으로 가는 신성항 길인 탓이다. 그 옆 낮은 길이 바로 어로다.의궤에는 산릉을 조영할 때 이 향어로와 어로에 쓰이는 석재(石材)의 크기, 수량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참도다. 지금까지 왕릉과 종묘에서 아무 의심없이 쓰던 이 용어의 출처가 일본 신사(神社)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믈다. 일제강점기 전국 신사와 신궁에는 '신궁을 참배하는 도로'라는 뜻의 참궁도로(參宮道路), 즉 참도(參道)가 있었는데, 이것이 왕릉에 들어와 '참배하는 길'이란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는 신사 참도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지금도 일본의 신사 안내도에 참도가 명시되어 있다. 왕릉의 홍살문에서 월대가지 이르는 소위 참도라는 길을 의궤에서는 정로(正路)라고 적고 있다. 조선왕릉의 1차 사료는 각종 의궤이다. 여기에 근거를 두지않는 용어나 설명은 우리 문화유산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 왕릉의 용어부터 정비해야 하는 이유이다.

 

 

배위.왕이나 제관이 출입시에 사배를 하는 곳이다.

 

수복방터

 

수복방은 수복방은 제사 그릇을 보관하고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청소일을 하던 일종의 관노비)이 지내던 집이다

 

정자각

정자각 우측 계단

비각

 

신도비

 

 

 

예감. 제향 후에 축문을 태워 묻는 방형의 석함

 

 

봉분을 난간석으로 연결한 동원쌍봉릉이다. 곡장이 둘러진 봉분에는 석양 석호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가 보인다.

 

일자각

 

의령원, 효창원 앞의 제각이다.

 

의령원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첫아들 의소세손의 묘이다. 세손의 이름은 정이며 3세에 세상을 떠났다. 북아현동에서 1949년 이장하였다.

 

효창원

 

의령원 앞에 위치해 있다.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이다. 의빈 성씨의 소생으로 5세에 세상을 떠났다. 용산 효창공원에서 1944년 이장하였다.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무덤를 만들 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를 집중관리 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아놓았다고 한다. 서삼릉의 영역에 후궁, 왕자, 태실을 모아놓은 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알려져있다.

 

20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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