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갑산 대사리 모전석탑 못 미쳐 우측으로 진입하여 들어가는 산길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물은 시리도록 맑다. 안동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명경지수의 계곡과 폭포, 깊은 소. 아하!!! 용담사의 용담(龍潭)이 허불명전은 아니었구나.
"용담사는 664년(문무왕4) 신라시대에 화엄화상(華嚴和尙)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서는 1574년(선조7) 혜증(惠證)법사가 중창하였다. 한창 사세가 좋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쌀 씻는 물이 절 앞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 묵계까지 흐를 정도로 승려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당우 전체가 소실되어 버렸다가 17세기에 중창되었고, 20세기 초에 무량전을 새로 지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동안 다소 사세가 위축되었는지, 1924년과 1925년 사이에 절에 있던 누각이 뜯겨 부근에 있는 묵계서원의 강당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용담사 무량전. 높은 석축위에 막돌을 허튼층으로 기단을 삼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판을 달고 있다. 공포는 익공양식이며, 겹처마로 단청이 부분적으로 되어 있으며 1969년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자연석 주초위에 기둥에는 배흘림이 있다. 정면 어칸이 좌우 협칸보다 넓으며 최근에 다시 조성한 듯하다.
소박하면서도 정이 묻어나는 현판에 눈이 오래 마물렀다. 누구의 글씨인지 자료를 검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왜 봉은사의 추사 글씨 板殿이 오버랩 되는지 모르겠다?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후불탱이 지장탱이며 좌우 협시불없이 단독으로 모셨다. 나발, 원만한 상호, 두터운 입술, 삼도가 보이는 목은 짧아 거의 없는 것 같다.법의는 통견이다.
무량전 뒷태
3칸의 후벽 중 2칸에 화조도, 고사도를 가벼운 터치로 그렸다. 한 칸은 왜 비워 두었을까? 전설이 있을 것 같은데...
무량전 좌·우 측면은 2칸이며, 띠살문 창호 위에 중방을 댄 다음 넉살형 봉창을 달았다. 자주 보는 구조는 아니다.
용담사 무량전 앞 석등 2구가 있다. 앙증맞은 발과 꼬리를 가잔 거북등 위에 팔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위에 원형의 연화상대석을 올려 놓았다. 화사석과 옥개 석은 손실되었다.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떨어지며 조선 말의 석등으로 전해진다.
여러 자료에도 같은 형태의 석등이라 했지만 우측의 석등은 간주석이 육각이다. 팔정도 육바라밀이 오락가락 했지만 간주석을 팔각과 육각으로 다르게 조성한 이유가 참말로 궁금하다. 석등일까?
무량전 편의 요사 정면. 무량전과 대웅전을 사이에 두고 앞쪽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 좌측 1칸의 부엌을 내었다. 고풍스러운 멋이 남아있다. 뒷쪽에 보이는 대웅전은 예산 고건축박물관장이신 전응수 님의 작품으로 우리님들 답사시에 건축 전공자와 동행하면 무량전, 금정암 화엄강당과 더불어 볼거리가 많을 것 같다.
대웅전 에서 바라본 요사. 정면과 후면 중앙에 툇마루를 두었다. 우측에 보이는 공양간에서 처사님이 나오셔서 식사하고 가라고 몇번이나 불렀지만 소심한 탓에 마음과 달리 발길을 돌렸다. 거듭 고마움을 전한다.
대웅전 앞 선방
용담사 터를 잡은 지관이 쇠삿갓을 착용한 사람이 용담사에 들면 폐사가 될 것이라고 주의를 당부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후 승려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시절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억수같이 퍼붓는데 아이를 업은 여인이 솥뚜껑을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하여 절에 먹을 것을 구하러 왔다고 한다. 그 뒤로는 수백명이나 되던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신도들도 하나둘씩 발길이 뜸해져 쇠퇴하였다는 슬픈 설화가 전해온다. 그 설화에 안상학 시인이 시를 남겼다.
용담사... 안상학
쇠삿갓 쓴 사람을 들이지 말라는 연기설화가 있었다는데 그만,
비도 미친놈 억수같이 내리던 날 무쇠솥을 쓴 여인이 굶주려 우는 아이를 업고 용담사 처마 밑으로 기어들었네 그만, 삼백 리 떠나온 길 어디에 불 피운 흔적도 없이 밥 짓는 연기도 없이 손가락 물리며 무명저고리 옷고름 빨리며 승려들 쌀 씻은 물 따라 용담사로 올랐네 그만,
바람도 미친년 아귀같이 불던 날 쇠삿갓을 쓴 여인이 무쇠솥을 쓴 여인이 용담사 처마 밑에 짐을 풀었네 아이를 풀었네 아아 그만, 아이의 주검을 풀었네 허제비처럼 허수아비처럼 등짝에 매달려온 아이는 칠성판도 없이 행장도 없이 그만 돌무덤을 썼네 비가 와도 씻기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날리지 않는 돌삿갓을 썼네 그만, 여인은 쇠삿갓보다 더 큰 무쇠솥보다 더 무거운 맞배지붕을 썼네 기어코, 깎은 머리에 똬리도 없이 그만,
그래서 그런지 길안천에는 쌀뜨물이 뚝 끊겼다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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