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안동시

안동...금소리 석탑. 석불좌상

임병기(선과) 2010. 4. 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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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면 금소리. 길안천과 신기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흐른다.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일부 지역이 수몰되었다. 금수는 마을의 안산()인 비봉산() 봉우리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앞 들의 수로에 물이 비단폭을 펼쳐 놓은 듯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럼 錦水 인가?

 

새로난 도로에서 내려 옛길로 접어 들어 경로당을 찾았다. 다른 시골마을과 달리 할아버지 몇 분만 계셔( 할머니들이 안 계신 연유를 답사후에야 알았다.) 방문 목적을 말씀드렸더니 밖으로 나와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석탑과 석불은 골목을 돌아 개인집 마당 한켠에 계시지만  인기척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부답이다. 왜 돌아 앉았을까? 사람이 무서운 것일까? 

 

 

안동 금소동 560번지  옛절터의 터줏대감. 이제 석탑과 석불이 남아 옛향기를 품고 있다. 망가지고. 흩어지고. 도난당하고 서러움과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했다. 시류에 편성하지 못한 성정 때문에 몸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나를 잊은지 오래인 듯 입가에는 달관의 미소가 보인다. 오랜 도반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석탑을 바라보는 눈빛이 고웁기 그지없다.

나를 버리고 우리를 사랑한 그런 아름다움이며, 모두가 웃을 수 있는 행복을 택한 그런 여유로움이다.

 

 

이중기단의 삼층탑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하다. 옛사진에는 기단면석에 사천왕상과 팔부신중이 탑신석에 기대어 있으며 하기단 면석에도 12지신상이 있다. 도난 당했다가 회수하였지만 현재 보관 장소는 인지 못했다. 세개 옥개석과 양주가 모각된 초층 탑신, 상륜에는 노반과 앙화가 하나의 돌로 놓여 있다. 옥개석 받침은 4개이다. 통일신라시대 탑으로 추정한다. 

 

탑처럼 석조여래좌상도 상처가 심하다. 불상은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있으며 대좌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은 복연으로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으며 중대받침은 2단이다. 팔각 중대석에는 안상이 면마다 1개 있으며, 상대석은 의도적으로 파손한 흔적이 역력하다.

나발, 육계가 보이고 상호는 형색을 알아 볼수 없다. 법의는 우견편단, 항마촉지의 수인,  결가부좌한 왼무릎은 잘려 나갔다.  통일신라 하대부터 석탑의 친구로 보인다.

 

 

안태고향 금소리. 이곳에 트인 공간을 마련해주면 좋겠다. 박물관도 좋지만 역시 제자리가 가장 안온하고 어울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굽은 소나무가 산천을 지킨다고 했듯이 석탑과석불로 인해 금소리가 더욱 환영 받는 농촌체험 마을로 부각되리라 확신하며, 안동포 박물관, 고택 체험과 연계하면  관광 상품의 가치가 극대화되리라 믿는다. 물론 안동시의 전향적인 자세와 복원 등 행정적 지원이 선행되어야야 할 과제일 것이다.

 

경북안동포마을 로고

 

금소리는 경북무형문화재 1호 안동포짜기가 전래해오는 마을이다. 오래된 기사이기 때문에 현재와 다소 거리감이 있을 줄 모르나 영남일보 기사를 옮겨오니 우리님들 답사길에 참고하길 바란다. 

 

[마을 .43] 안동포 유명한 임하면 금소리
 
 
[Copyrights ⓒ 영남일보.

금소리 마을전경.
금소리 마을전경.
題字:혜정 류영희

안동시내에서 남동쪽으로 14㎞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하면 금소리는 안동포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모시와 함께 한 여름철의 옷감으로 많이 쓰였던 삼베는 안동, 특히 금소리에서 생산된 것이 가장 유명하다.

초여름이면 한식을 전후해 파종한 대마 수확으로 마을 전체가 분주하지만, 봄을 재촉하는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지금은 온마을이 적막감에 휩싸여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인 금소리.

그러나 기자에겐 그 금소를 찾는 일이 왠지 만만치가 않았다. 안동포라는 이름으로 시중에서 형성되는 만만치 않은 가격 탓에 입는 것은 고사하고 먼발치서 구경해 본 기억이 전부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치고 지나간다.

안동대학교 앞 반변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자, 시원스럽게 뻗은 국도 옆 산자락을 지키고 선 헐벗은 나뭇가지에 반사된 따사로운 햇살이 시야를 밝혀, 나른한 식곤증을 털어버리게 한다. 출발한지 15분 남짓 지나 반변천과 길안천이 심한 곡류천(曲流川)을 이루며 동시에 흐르는 면 소재지를 거쳐 금소에 들어선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고전을 무시하는 우회도로가 시원스럽던 마을의 풍광을 깨뜨리는 점이 아쉽다.

문명의 이기인 차량으로 인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넓은 금소들판 중앙을 성벽처럼 쌓아올려 우회시킨 국도가 마을의 풍광을 이렇게 답답하게 할 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인간의 무심함이 애석할밖에는 없다.

이전에는 금소역촌(琴韶驛村)이라 불렸으며, 금소동의 안산(案山)인 비봉산 봉두에서 이 촌락을 내려다보면 마을 앞 들에 가로지르는 수로를 통해,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이 물이 흐른다고 해서 금수(錦水)라고 불렸다는 곳이 여기다.

또 비봉산 아래에 있는 오동수(梧桐藪)에 거문고가 있어야 부합이 된다는 설에 금소로 바뀌어 불렸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파발마를 둔 역말이 있어, 금소역촌 또는 역마로 불리기도 했다는 금소. 600여년 전인 조선초기 예천임씨가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금소리는 지금도 임씨가 90%를 넘는 집성촌이다. 한때 300여가구가 넘을 정도로 마을이 번성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농촌경기침체와 이농 등으로 점차 가구수가 줄어 겨우 200가구를 헤아린다.

옛 정취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안동포짜기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배분령 할머니(99·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집을 찾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고기와집과 초가, 돌담이 즐비했다는 금소리지만 새마을운동 이후 초가와 돌담이 자취를 감췄고, 마을 안길은 시멘트로 덮였다. 적당히 높은 담이 쌓인 골목길을 지나 대문도 없이 객을 맞는 너른 마당에 들어섰다.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는 탓인지 2평 남짓한 사랑방에서 배 할머니는 이웃 할머니와 함께 화투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필경 귀찮은 손이겠지만 할머니는 방 한켠을 기자에게 선뜻 내어준다.

근대화 과정에서 무명과 함께 나일론 등의 화학섬유가 보급되면서 삼베는 그 수요가 점점 줄어들었고, 안동포 또한 그 명맥을 잇기조차 바빠졌다. 그 전통을 잇기 위한 방편으로 관계당국이 1975년 기능보유자에 지정한 배분령 할머니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대화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정정했다.

"안동포 중 금소 삼베가 유명한
안동포 짜는 기술을 배운 며느리 우복인씨.2
안동포 짜는 기술을 배운 며느리 우복인씨.
것은 건조한 토질의 땅이 삼의 재배에 적합한 때문인 것 같다"며 운을 떼는 할머니는 삼베짜기에 대한 기억 한 자락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에 "머 그라이께네 내 쪼매할 때는, 광상목(광목)도 없어가아 옷 입을라카머 농사 안질 때 베짜는 게 당연한 일이레가, 머 별시런 게 없니더"라며 사양한다.

결국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그 바쁜 일상 속에서 일에 쫓기다 보니 베짜는 일도 삶의 일부분으로만 기억될 뿐, 특별히 고되다거나 보람으로 남는 기억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베 한필을 짜서 장날 시장에 팔아 목돈이 생겼을 때 잠시나마 넉넉했던 그 순간이야 어떻게 기억속에서 사라질까.

배 할머니는 '요즘 삼베 중 10세(한 세가 40올을 뜻함) 이상 된다고 자랑하는 안동포는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한다. 옆에 있던 임재진씨(77·배분령 할머니 아들)가 "시중에 유통되는 삼베 대부분은 6~8세이며, 올이 고운 최상품이 9세 정도"라고 강조하면서, "안동포를 직접 생산하는 집을 아무리 둘러봐도 10세 이상의 삼베를 짤 수 있는 직기가 없다"고 부연 설명했다.

실제로 10세 이상의 삼베를 제작하면 삼베올이 머리카락 굵기 만큼 미세할 정도로 고울 뿐 아니라, 잘 끊어지므로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등 작업 난이도가 높은 탓에 한 사람이 연중 1필(40자)을 생산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또한 6~8세의 삼베에 비해 10세 이상의 삼베는 재료도 최소 3~5배 이상 사용된다. 반면 가격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아, 투자된 노력에 비한 품이 한참 떨어지는 바람에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지가 오래라는 것이다.

배 할머니와 같이 화투놀이에 열중하면서 대화에 귀 기울이던 임분서 할머니(80)는 "6세 정도의 안동포 한필을 완성하기까지 삼실을 뽑는 과정은 그만두고, 베짜기에만 일주일 정도가 소요된다"며 끼어든다. 따라서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도 농한기(3개월) 동안 9세 이하의 안동포는 3~5필 생산이 가능해 만만치 않은 부수입이 되는 반면, 몇 배나 많은 노력을 들여도 10세 이상의 안동포는 한 필을 완성하기 어려운 데 누가 그것을 만들어내겠느냐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일하는 여인상의 상징인 삼베짜기. 극심한 이농현상의 태풍을 피하지 못한 이곳 금소리에도 이제 빨랫줄에서 어린 아이의 옷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워진 지금, 기능보유자 한 명에 전수자와 전수조교 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수입이 최저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현실탓에 베짜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상류층만이 비단과 빛깔 있는 옷을 입을 수 있었던 옛날, 무명이 옷감으로 널리 퍼지기 전까지만 해도 사계절 서민들의 중요한 옷감이었던 것이 삼베였다. 그러나 금소리에서도 이제 대마농사를 짓는 농가가 100여가구에 불과하고 연중 베틀에 한 번이라도 앉아보는 부녀자가 30명도 안되는 게 현실이다. 늘 꾸준한 수요가 있고, 올해는 특히 윤달이 끼여 있어 주문이 폭주하고는 있지만 생산할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인 것.

이젠 명맥을 잇기에도 다급해 금소리를 안동포 생산의 중심지로 선정하고 그 주민 가운데 원로격인 배 할머니를 기능 보유자로 선정한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막막한 현실이 넓었던 금소들을 가로막은 국도만큼이나 답답하기만 하다.
2004-03-31 입력

 

201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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