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동선에 포함하였으나 답사하지 못한 안동의 옛님을 만나고 왔다. 몇달전부터 심한 목감기 때문에 오늘도 병원에 들려 진료를 마친 후 안동시 임동면 황산사를 찾았지만 그 곳에는 봉황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황산사(黃山寺)로 알고 있었던 봉황사는 1980년 당시 사찰 옆 개울에서 발견된 사적비를 통해 원이름이 봉황사였음을 알 수 있었지만, 아직도 황산사와 봉산사명을 두고 설왕설래 명확한 정리가 되지 않은 듯 했다. 절집명은 내게 그다지 중요치 않아 주석하는 스님들이 칭하고 있는 봉황사로 통일 하겠다.
"봉황사(鳳凰寺)가 자리한 산이 아기산(鵝岐山)이다. 산세가를 찾았습니다. 거위 모양을 하고 있어 거위 ‘鵝’자에 산 이름 ‘岐’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태백산의 한 갈래인 일월산(日月山) 지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해발 591m인 아기산을 이루고 있다. 그 주봉이 우뚝 솟아 무실마을의 진산(鎭山)이 되고, 봉황사를 끌어안고 있는 황산곡(黃山谷)을 만들었다. 황산골은 북쪽을 향하여 널찍한 터를 갖고 있으며, 아기산의 기(氣)가 모여 뻗어 내려온 곳에 봉황사가 자리하고 있다.
봉황사는 신라시대인 644년(선덕여왕 13)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창건 이후 조선시대까지의 내력도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으나, 다만 현존하는 자료로 가장 앞선 기록인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임하현에서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기산(岐山)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라고 황산사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사적비의 내용에 비중을 두고 보면 번성기 때에는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승당, 선당, 청풍당, 만월대, 범종각, 만세루 등의 여러 전각과 부속암자로 낙석암(樂西庵), 정수암(淨水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다가 왜란 이후에 대웅전과 요사 1채만이 중창되어 그 명맥을 이어오다 사적비의 발견으로 가람의 옛 모습을 확인하고, 이에 맞게 옛 터에 중창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넓은 터전에 대웅전.극락전.산신각.요사.공양간이 있지만. 올망졸망한 산지 가람의 전형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분방만 평지 가람 같은 분위기이다. 임진왜란 이후 1624년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은 높은 기단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불단은 후벽에서 한 칸 앞에 고주를 4개 세워 3칸의 불벽을 꾸민 다음, 어칸의 절반 정도까지 불단을 만들어 불단을 중심으로 우요삼잡이 가능한 구조다. 불단이 앞으로 돌출된 구조는 법당 예배공간이 좁아지는 것으로 조선 중기 이후 많이 보이는 구조로 알고 있다.
강희 35년(1696년)이 새겨진 대웅전 편액. 각자를 한 인물이 정삼품을 지낸 신*이며, 편액 테두리 그림(?)은 승려 **이다. 임진왜란 이후여서 승려의 위상이 격상되어 사대부와 나란히 할 수 있었을까?
기둥에는 배흘림이 유려하다. 대웅전 외부의 단청은 특이하게도 전면과 좌우측면에는 했으나 뒷면에는 단청이 없다. 창호는 정자 살창으로 어칸은 3분합, 협칸은 각 2분합이며 양측면에도 출입문을 두었다. 추녀 끝은 활주로 받쳐져 있다.
불단의 삼세불.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 석가모니불. 미래불 미륵불을 모셨다.
석가모니불
과거불
미래불
봉황사 삼세불화 중 석가모니탱...출처/다음
삼세불 후불탱은 최근에 조성하였으며 기존의 봉황사삼세불화는 안동 민속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최근 경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들은 강희13년(1674) 갑인 4월에 조성된 불화로 알려져 있다.
중앙황제탱..출처/다음
"봉황사에는 밖으로 드러난 당우(堂宇) 외에 별도로 보관하고 있는 오제탱(五帝幀)이라는 불화가 있다. 오제탱은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과 안동 봉정사, 문경 김룡사 등에 남아 있으나 그 용도는 불확실하다.
봉황사에 현존하는 오제탱은 동방청제(東方靑帝), 서방 백제(西方白帝), 중앙황제(中央黃帝), 연직사자(年直使者), 월직사자(月直使者), 일직사자(日直使者), 시직사자(時直使者) 등이다. 그러나 명문이 없어 정확한 도상의 주인을 밝혀내기가 어렵다. 크기는 대략 높이98cm에 너비 68cm이다. 조성 연대는 17세기로 보인다."
대웅전 우물 천장에는 연꽃이 활짝 피어 화려함과 장엄을 더해준다.
대웅전 빗천장에는 극락세계를 묘사한 듯한 봉황 ·학 ·신선이 구름을 배경으로 하늘을 날고 화초가 만발해 있다.
대웅전 후벽. 전면과 달리 단청이 없다. 옛전설을 간직하려는 듯한 불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전설에 의하면 대웅전을 중창한 후 봉황이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단청을 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정면과 좌 ·우 측면을 끝내고 건물 뒤에 단청을 할 때 그만 사람들이 쳐다보자 끝내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오늘날까지 뒷면에는 단청을 하지 못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이러한 연유로 봉황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용마루와 막새기와에는 연봉을 세웠다.
대웅전 옆에 세워져 있는 1980년 주지스님께서 사찰 옆 개울에서 발견된 사적비. ‘아기산봉황사사적비(鳳凰寺鵝岐山碑)’라는 아홉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음각된 비문은 마모가 심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산신각
사전에 인지한 석불좌상을 수배하였으나 보이지 않아 보살님의 안내로 찾았다. 대웅전 뒤로 산길을 올라 샘이 있는 샘골에 계셨다. 어깨는 넓고 법의는 통견이며 주름은 깊지 않고 가슴아래 승각기가 보인다. 결가부좌에 수인은 선정인으로 보인다. 불상의 머리는 떨어져 나갔고 둥근 자연석을 시멘트로 접합하여 불두를 삼았다. 고려시대의 석불로 전해오고 있다.
봉황사 초입 민가 건너편 산자락의 석종형 부도 3기. "종신에 당호가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완전히 읽혀지지는 않지만, '포월(抱月) 섬대사(暹大師)', '청파(淸波)', '송계(松桂)'등의 당호(堂號)가 기록되어 있다. 화강암제 이며 기단석과 종형부도석이 각각 1매의 돌로 제작되어 있다.
사각 형의 기단석은 상부에 2단의 몰딩이 처리되어 종형부도를 받치고 있다. 종형부도는 정점이 뾰족하게 돌기되어 있고 그 아래는 모자 의 창처럼 둥글게 처리했는데 가운데 1조의 침선을 돌리고 있다. 부도의 몸통부분은 상광하협식(上廣下狹式)의 타원형인데 상단부에 1조의 침선이 돌려 있다."
석등 간주석을 끝내 찾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에 뵌 부도. 부도를 보고 내려오는 마을주민이 나를 부른다.
-.교수님입니까? (내 대답도 듣지 않고)부도 몇 개 보았니껴? -.세 기 보았습니다. -.(득의만만만 표정으로)그위에 한 개 더 있는데
다시 올라가기가 싫었다. 인연이되면 다시 만나겠지요.
-.그럼 석탑부재 위치는 아시나요? -.따라오소
개인집에 옥개받침이 3개인 옥개석 하나가 뒤집어져 있었다. 밭둑에 있던 부재를 주인 아저씨가 지고 왔으며,예전에는 석조부재들이 산재했다고 한다. 심지어 작은 비석 등이 묻힌 개울가 위치도 짐작간다고 했다. 이런 증언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하루바삐 전국 폐사지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이유라 하겠다.
주민 네분과 함께 옥개석을 보고 있는중에 재미난 이야기들이 솔솔 나온다. 봉황사가 폐사된 이유는 "봉황사에는 신도가 넘쳐나 스님들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날 주지스님이 도인으로 부터 절의 풍수 형국이 다리미 자리(즉 화기를 품은 형국)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절 앞에 연못을 조성하여 폐사되 었다고 한다."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큰기대 없이 들린 절집에서 뜻밖의 귀한 옛님들을 만났다. 기회가 되면 안동민속박물관의 삼세불화와 봉황사에 보관중인 오제방탱, 사자탱도 뵙고 접다. 최근에 들어 상처나고 마모된 님들이 오히여 정겨운 까닭은 왜일까? 연륜으로 생각하면 좋으련만 모두들 연로라고 말하겠지? 그래도 봄날에는 가끔 꿈꾸고 싶다. 남가일몽일지라도...
2010.04.03
전통사찰정보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
'경상북도 > 안동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동...황학산 용담사 (0) | 2010.04.14 |
---|---|
안동...금소리 석탑. 석불좌상 (0) | 2010.04.09 |
안동...남양사지 삼층탑 (0) | 2010.04.06 |
안동...나소리 삼층탑 (0) | 2010.04.05 |
안동...학가산 광흥사 (0) | 2010.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