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담양...용구산 용흥사

임병기(선과) 2009. 11. 2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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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여름 휴가를 즐기려는 인파가 계곡에 넘치고 사하촌은 분주하다. 사찰이 관광지가 된지 오래여서 행락에게 참배객이 자리를 빼앗긴지 하루 이틀일은 아니지만 까칠한 중생에게는 거부감. 불쾌감으로 사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

 

사하촌 주차장 못미쳐 괘불대가 자리하고 있어 뜻을 모르겠으며, 산문이 없는 용흥사 초입 7기의 부도가 고찰의 위엄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다. 용흥사 전성기에 조성된 조선 후기 부도이다.


 

 

소란스런 사하촌을 벗어나면 노거수가 먼저 반긴다.

 

 

용흥사의 창건연대에 대해 구전으로는 백제 때 창건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용구사(龍龜寺) 혹은 몽성사(夢城寺)였다고 전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는 없다. 그 뒤의 연혁 역시 잘 알 수 없으며, 조선후기 이후부터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 숙종 때 궁녀 최복순(崔福順)이 이 절에서 기도하여 영조를 낳고 숙빈이 된 후, 절 이름을 용흥사(龍興寺)라 하고 산 이름을 몽성산(夢聖山)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1644년(인조 22)에 만들어진 용흥사 동종에 ‘용구산 용흥사(龍龜山 龍興寺)’라 기록되어 있어 산 이름과 절 이름에 혼동을 주고 있다. 더욱이 용흥사가 『태고사법』에는 몽성산에, 『범우고』에는 용구산에 자리한다는 기록이 보이며 절 이름도 원래 용구사(龍龜寺)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정리해보면 동종의 제작시기인 17세기에는 ‘용구산 용흥사(龍龜山 龍興寺)’로 부르다가, 숙종 연간에 최복순에 의해 ‘몽성산 용흥사(夢聖山 龍興寺)’로 개칭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17세기 이전에 용구사로 불렸는지는 지금으로서 알 수 없는 일이다. 1871년에 간행된 『호남읍지』의 창평현 사찰조(寺刹條)에, “용흥사는 용구산에 자리하며 궁(宮)의 원당(願堂)으로 종이를 만드는 임무를 담당하였다”고도 하였다.

 

 

 

용흥사 동종을 보기 위해 들렸지만 두 분 스님을 방해 할 수 없어 돌아서야 했다. 

 

출처:다음 블로그 행복공간( http://blog.daum.net/hyun4556/8708746)

 

사진을 촬영하지 못해 사진은 다음 블로그에서, 글은 담양군청 홈에서 가져왔으니 님들 답사시에 참고하길 바란다.

 

"이 범종은 정형인 상대와 하대가 있고 중앙 윗부분에 4개의 유곽(乳廓)과 유곽 내에 각각 9개의 유두(乳頭)를 표출하였다. 세부를 보면 하대로 굵은 두 줄의 가로줄을 두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용을 양각하여 반결형을 하였으며 3개의 발톱과 입에서 불을 내뿜는 불꽃무늬가 각출되었다. 몸체 중앙부에는 凹형의 4각선곽을 조식하고 그 안에 ’순치원년 사월일 창평현 용구산용구사신주종기(順治元年 四月日 昌平縣 龍龜山 龍龜寺 新鑄鐘記)……’라는 명문(銘文)이 표기되었는데 행서종행으로 총 38행 255자가 새겨졌다.

이 명문에 의하면 종의 조성연대는 인조22년(1644)임을 알 수 있다. 종신중앙 상단으로는 네 군데 유곽에 9개의 유두와 인동당초문으로 그 외곽을 장식하였다. 유곽사이로는 전후좌우로 두광(頭光)을 선각한 보살상을 정교하게 새겨 몸체의 장식성을 나타냈다. 상대로는 두 줄의 가로줄에 범자(梵字)를 양각했으며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라 명문하였다.

 

상부의 용머리는 대개의 경우 한 마리의 용이 허리를 구부려 그 중심부에 고리를 걸도록 하고 그 뒤로 음관(용통)을 세우고 다음 용꼬리를 조각한데 반해 이 범종에서는 이러한 통례와는 달리 4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고리에 걸도록 되었으며 음관은 생략하였다. 조선시대 범종이 대개 임진왜란 이후 것인데 이 종은 임란 이후 중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속하며 태안사 천순명동종과 함께 매우 귀중한 예라 할 것이다."

 

 

대웅전도 최근에 지은 전각으로 보이고 탱화도 오래되지 않은 듯한데 또다시 무슨 불사일까?

 

 

대웅전 기단 아래 소맷돌.

 

만만치 않은 격이 묻은 절집 용흥사에서  온고이지신을 되내이며 발길을 돌렸다. 

 

200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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