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담양...봉안리 은행나무. 언곡사지 삼층탑

임병기(선과) 2009. 11. 3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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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곡사지 탑.봉안리 은행나무 답사기는 3번째 준비(?)했다. 첫번은 글을 올리는 도중에 날려 버렸고 또 한번은 몇일전 주인장 보물창고에 보관중이던 글을 옛님방으로 옮기려다 실수로 삭제 해버렸다. 답사기는 완성도 보다는 흥으로 준비하는 편이라 지금 흥이 나지 않는다. 다만 훗날 이 길을 걸을 님들을 위해 간단히 자료만 올린다.

 

 

봉안리 은행나무. 언곡사지 초입 술지 마을의 당산목이다. 수령 400년이며 마을 외곽 네방위의 느티나무와 함께 비보책으로 심은 흔치 않은 당산목이다. 수확되는 은행은 마을 공동 기금으로 조성한다.

 

 

담양군청 홈에서 가져왔다. 마을 중앙에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는 밑 부분에서 2개의 줄기가 자라고 있는데 작은 줄기는 근원부에서 발생한 부정측간이 생장한 것으로 보이며, 큰 줄기는 지상 2m 부위에서 11개의 줄기로 갈라져서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 모습인데 확장된 수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대단히 장엄하게 보이는 당당한 풍채의 수형이 벌교의 은행나무(도 기념물 제147호)와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생육상태는 양호하며 남쪽으로 뻗은 하단부 가지에 지지철이 설치되어 있다. 나무 주위에는 이중의 원형단이 있는데 나무의 중심으로 반경 1m, 높이 80cm의 상단과 반경 4m에 이르는 하단으로 축조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한일합병, 8·15해방, 한국전쟁 등 국가의 중대사마다 은행나무가 울었다고 하며 옛날에 생활이 어려워 도둑이 빈번한 시절에도 이 마을만은 한 번의 도둑도 없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매년 정월 15일이면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은행나무는 향교나 사찰의 뜰에 많이 심어져 있는 수종인데 마을 안에 이 정도 크기의 노거수가 자라고 있는 것은 흔치 않으며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나무라는 측면이나 역사성으로 볼 때 보존할 가치가 있다.

 

 

장난감 같은 2층 요사 창문이 열리며 스님께서 말했다. "처사님. 탑은 뒤돌아가서 연등 따라 가세요" ㅎㅎ 행색으로 절집 손님이 아님을 아셨나 보다.

 

 

연등이 없었다면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맙다. 너무너무...

 

 

탑에대한 글도 담양군청에서 가져왔다. 언곡사지는 백제 성왕 6년(528)경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고증할 길이 없으며 절 이름 역시 각종 지리지에 등장하지 않아 전해지는 내용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추성지(秋成誌, 1758년)』에는 석탑 존재사실이 나타나고『무정면지(武貞面誌, 1934년』에는 언곡사라는 절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언곡사지 삼층석탑은 1927년 현 봉안리 뒷산인 비봉산에 있었던 것을 무정초등학교로 옮긴 것을 1995년 지금의 위치로 다시 원상·복원하였다. 무정초등학교로 옮길 때 1층 탑신에서 금동불이 발견되었으나 당시 일본인 교장이 금동불을 매각하여 그 돈으로 학교실습답을 사들였다고 한다.



 

 

옥개석(屋蓋石) 상면은 1단의 각형괴임을 각출하여 위층의 탑신을 받고 있다. 특히 3층 탑신의 전후면에 여래상(如來像) 2구를 조각한 것이 주목된다. 전면의 여래상(如來像)은 좌상으로서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하였으며 후면의 상(像)도 좌상(座像)이긴 하나 수인은 손에 약을 들고 있는 것이 전면과 다르다.

 

 석등 하대석

 

 

이 석탑은 현재 기단부(基壇部)와 면석(面石) 2매가 유실된 상태이며 상륜부(相輪部) 일체가 남아 있지 않다. 탑의 구조를 보면 기단부 중석인 면석 2매가 양쪽에서 탑신부(塔身部)를 받치고 있다. 면석의 양식을 보면 각 면에 양우주(兩隅柱)와 탱주(撑柱) 1주가 모각되었고, 그 위로 갑석(甲石)이 이어지고 있는데, 갑석은 상·하 수평이며 하면은 각형부연이 표출되었고 상면은 2단의 각형괴임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塔身)과 옥석(屋石)이 각 1석씩으로, 탑신은 각 면에 양우주(兩隅柱)를 모각하였으며, 다른 조식은 없다. 1층 옥개석(屋蓋石)은 약간 얇은 편인데 낙수면이 급경사를 이루며 우동(隅棟)마루가 뚜렷하다. 층급받침은 1층에서 2층까지는 4단이며 3층에서는 3단으로 줄어들었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중석 이하가 모두 유실되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탑신부 내요를 보면 평박한 옥개석(屋蓋石)이라든지 전각(轉角)의 밋밋한 반전(反轉), 또는 층급받침이 4단 및 3단으로 줄어든 점은 고려시대의 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은행나무와 더불어 산천비보 석탑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풍수형국은 뭐였을까?

 

 

200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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