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담양군

담양...대치리 석불. 대치리 느티나무

임병기(선과) 2009. 11. 27.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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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사지 마애불 초입에서 왕복 3시간 소요된다는 주민의 이야기에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늘 여정의 마지막인 대치리 석불좌상은 한재초교에 위치해 있다. 뜻밖에도 교정에는 천년기념물인 대치리 느티나무가 반겨주었다. 그런대 대치大峙이면 큰재 그래서 한재 초교인가? 

 

담양 한재초교의 느티나무...고재종

 

어른 다섯의 아름이 넘는 교정의 느티나무,

그 그늘 면적은 전교생을 다 들이고도 남는데

그 어처구니를 두려워하는 아이는 별로 없다

선생들이 그토록 말려도 둥치를 기어올라

가지 사이의 까치집을 더듬는 아이,

매미 잡으러 올라갔다가 수업도 그만 작파하고

거기 매미처럼 붙어 늘어지게 자는 아이,

또 개미 줄을 따라 내려오는 다람쥐와

까만 눈망울을 서로 맞추는 아이도 있다.

하기야 어느 날은 그 초록의 광휘에 젖어서

한 처녀 선생은 반 아이들을 다 끌고 나오니

그 어처구니인들 왜 싱싱하지 않으랴

 

아이들의 온갖 주먹다짐, 돌팔매질과 칼끝질에

한 군데도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지 끝에 푸른 울음의 별을 매달곤 해도

반짝이어라, 봄이면 그 상처들에서

고물고물 새잎들을 마구 내밀어

고물거리는 아이들을 마냥 간질여댄다

 

그러다 또 몇몇 조숙한 여자 아이들이

맑은 갈색 물든 잎새들에 연서를 적다가

총각 선생 곧 떠난다는 소문에 술렁이면

우수수, 그 봉싯한 가슴을 애써 쓸기도 하는데,

그 어처구니나 그 밑의 아이들이나

운동장에 치솟는 신발짝, 함성의 높이만큼은

제 꿈과 사랑의 우듬지를 키운다는 걸

늘 야단만 치는 교장 선생님도 알 만큼은 안다

 

아무렴, 가끔은 함박눈 타고 놀러온 하느님과

상급생들 자꾸 도회로 떠나는 뒷모습 보며

그 느티나무 스승 두런두런, 거기 우뚝한 것을

 

 

 

說에 의하면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전국의 명산을 찾아서 공을 드릴 때 이곳에 들린 기념으로 이 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거나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다.

 

담양 대전면의 느티나무는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34m, 가슴높이의 둘레가 8.78m의 크기이다. 이 나무는 한재골이라는 마을에 서 있는데, 조선 태조(재위 1392∼1398)가 전국을 돌면서 명산을 찾아 공을 드리던 중 이곳에서 공을 드리고 그 기념으로 손수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되어 있으나 옛날에는 한양(漢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꿈솟에서 계속 보이던 석불은 시골마을을 지키는 할아버지 처럼 동구밖 당산나무 같은 느티나무 아래에 계셨다.

 

 

대치리 석불좌상. 영천 이씨인 이언좌의 꿈에 나타나 발굴해 낸 유래가 있던 것으로 대전면 대치리에 있던 석불을  옮겨왔다. 광배까지 갖추었고 석질이 거칠어 대부분이 파손 또는 마멸되어 자세하지는 않으며 허리 아래가 매몰되어 좌상인지 입상인지 분명하지 않다.

주형거신광배 형이며 소발, 육계, 삼도, 법의는 통견으로 보인다.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에 연봉우리와 같은 것을 쥔 채로 대었으며, 왼손은 배를 거쳐 오른팔 아래를 받쳤으나 파손이 심하여 알 수 없다. 불상은 법당에 모신 정통적인 불상이기 보다는 동네 주변에 모신 미륵불의 유형으로 파악될 뿐이다. 제작연대도 고려말 이후로 알려져 있다.

 

시기가 고려 이후라고 알려졌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익산 연동리 불상과 오버랩 된다. 한 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옛님으로 남을 것 같다.

 

200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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