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녘에 산문을 통과하여 새벽 진불암까지 내쳐 달렸다. 진불암에서 북암 가는길. 아직 산도 숲도 잠 들었다. 계곡마져 밤새 흘러내려 지친듯 조용하다. 청량한 느낌이 폐부에 가득하다. 길을 바로 들었는지 판단도 유보한 채이정표를 벗삼아 무작정 고고씽이다.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몸을 맡겼다. 내가 왜이렇게 신새벽에 이자리에서 이러고 있는지 궁금타. 자유로운 생각마져 사치인듯 무심한 하늘에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길을 재촉한다.
북암에 대한 기록은 "대둔사지"에 몇줄 언급이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萬年不毁之基)”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토록 한 도량이기도 하다. 이후 대흥사는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과 교학승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는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도 간직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의 구국정신을 기려 국가에서 건립한 호국도량의 한 표상인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둔사지』에는 '건륭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북암은 1754년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 이분이셨구나. 땀도 숨가픔도 잊고 깊은 예를 올렸다. 지긋하게 내려보는 그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 오체투지로 빌고 빌었다. 용화전 미륵불이시다. 보수전에는 가운데 마애여래좌상만이 보호각으로 덮혀있었으나 2004년 보호각을 해체하니 광배와 4구의 비천상이 우리앞에 나투신 미륵불이다.
땀이 말라 여름이건만 한기가 감돈다. 불경하게 슬며시 옆으로 누워 바라보았다. "너 많이 피곤하구나"며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그래 나도 어제 저녁일을 용서하고 이해를 하자. 어제 저녁 대흥사 사하촌의 저녁밥은 최악이었다. 혼자서는 먹을 음식이 마땅치 않았고 주인은 싫은 표정이 역력히 얼굴에 드러나더니 소금에 절은 반찬만 나왔다. 숙박지도 모기가 서식하는 방이었다. 해남군청과 사하촌 상가에서는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오끼나와로 빠졌구먼!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왔다." 바위면에 고부조되어 있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공양천인상이 함께 표현된 독특한 도상의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으로 규모가 크고 조각수법도 양감이 있고 유려하여 한국의 마애불상 중에서는 그 예가 매우 드물고 뛰어난 상으로 평가된다.
비천상
4구의 비천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쪽 무릎을 꿇고서 연화좌 위에 앉아 연봉을 본존에게 바치듯 헌화하고 있으며, 신체에서 흘러내리는 천의자락은 천상으로 상승하는 비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반적인 조각수법은 통일신라에서 고려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고려시대 등장하는 거대의 마애불상 양식과 흡사한 모습이다.
대좌는 11엽의 앙련과 12엽의 복련이 마주하여 잇대어진 연화대좌로 두툼하게 조각되어 살집 있는 불신과 더불어 부피감이 두드러져 보이며, 다른 예에서와는 달리 자방이 높게 솟아올라 있어 특징적이다.
구전에 의하면 두륜산 노승봉 아래에는 북미륵과 남미륵이 있었으며, 북미륵은 볼록하게 돋을새김한 양각불상임에 비해 남미륵은 평평한 곳에 선을 이용한 음각불상으로 그 모습이 대조적이었다고 한다. 양각의 북미륵은 여자가 조성하고 음각의 남미륵은 남자가 조성한 것으로, 이들은 모두 제석천이 하강하여 남북에 음양의 조화를 기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또한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천상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천동과 천녀가 다시 천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하루 만에 불상을 조성해야 하는 과제를 맡게 되었는데, 하루 만에 완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해가 지지 않도록 천년수 나무에다 끈으로 해를 끈으로 매단 채 불상을 조각하였다.
천동은 남쪽 바위에 입상의 불상을 조각하고 천녀는 북쪽 바위에 좌상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좌상이었기 때문에 먼저 일을 마친 천녀가 하늘에 빨리 오르고 싶은 욕심에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버렸다. 이에 해가 지자 천동은 불상을 더 이상 조성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모습이 미완성된 채 남미륵암터에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북미륵암 동탑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왔다.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큰 암반 위에 단층 기단부를 안치하고 그 위로 탑신부를 구성하여 고려시대(10∼11세기)에 조성한 신라양식의 3층 석탑으로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매우 우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어 가치가 있다.
이러한 양식은 영암 월출산 구정봉 정상에 있는 용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283호)과 동일한 기법이다. 양 귀퉁이에 우주가 모각되었다. 1층 탑신의 결구수법을 자세히 보면 기단부 면석의 결구수법과 서로 엇갈리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상층부에서 누르는 무게를 균등하게 받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2∼3층의 탑신도 같은 양식이다.
장인은 멋을 부렸다. 기단부 구성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하였는데 좌우로는 벽판석이고 전후면은 삽입식인데 각 면의 양 귀퉁이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중앙에 탱주 1주씩을 표출하였다. 그런데 중앙의 탱주가 상하의 폭이 같은 기둥이 아니고 위쪽은 좁고 아래쪽이 넓은 이를테면 팔자(八字)형으로 되었다. 위쪽은 폭 24cm, 아래쪽은 가장 넓은 면이 74cm나 된다. 이러한 탱주 기법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이다.
비록 단층 기단이긴 하나 각 부재가 정제되고 탑신의 체감율이 알맞아 매우 우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과 동시대인 10∼11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같은 북미륵암 경내에 있는 보물 제301호인 삼층석탑 조성을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북미륵암 서탑
얇고 넓은 지붕돌은 밑면의 단의 수가 층에 따라 다른데, 1·2층은 4단, 3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 앙화가 남아 있다.
북미륵암에 세워진 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돌로 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한반도의 남쪽 끝인 해남에 이처럼 구성이 가지런한 탑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기단은 지대석 위에 귀기둥와 탱주를 새긴 하대석과 중석을 갖추고 있고, 갑석은 4매로 되어 있다.
상층기단의 중석과 갑석은 1매석으로 되어 있는데 갑석에는 부연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으로 되어 있고 각 탑신에는 네 개의 귀기둥을 본떠 새겼다. 외관상으로 볼 때 이 석탑은 비교적 정제된 석탑으로서 양식적으로는 약화된 점도 있으나, 신라석탑의 형식과 양식을 일부 따르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조성연대는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만일암지 석탑
만일암지를 찾다가 산속에사 길을 잃고 헤매이었다. 별수 없이 묘각님에게 전화를 걸어 겨우 위치를 확인하고 뵈었다. 산속 암자터.마치 토기 집 느낌이었다. 포근하고 아늑하며 따스함이 가득했다. 작은 우물터도 옛추억이 고여 있었다. 현재는 단층기단이지만 매몰된 기단을 확인하면 2기단 가능성도 배제 못 하겠다. 흩어진 부재를 바라보다 석탑 상륜에 눈이 머물렀다. 누구의 발상인지 석등 상대석과 옥개석을 석탑 상륜에 올려 놓았다. 지금 당장 올라가서 내려 놓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큼직한 장대석 수 매를 놓아 주변을 탑구로 구획하고 그 안에 기단부를 안치하였다. 기단부는 현재 면석만 보이고 양 귀퉁이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중앙에 탱주 1주씩을 표출하였다. 갑석은 상하 수평이고 하면에는 각형 부연이 각출되고 상면은 2단 각형 괴임을 조출하였는데, 하단은 조금 높고 상단은 아주 낮게 하였다.
튼튼한 기단부의 구성, 초층 탑신이 다른 예(광주서오층석탑, 월출산용암사지삼층석탑, 광주춘궁리오층석탑 등)에서처럼 두 개가 상하로 포개진 기법이 아니고 세로로 세워서 결구하는 특이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다른 석탑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현재는 복원이 잘못되어 양우주가 맞보며 상하로 포개져 있다. 옥개석 우동마루를 도드라지게 한 기법은 옛 백제석탑의 건축적인 요소로 알려져 있다.
만일암(挽日菴)...대흥사 홈
만일암에서는 만화원오(萬化圓悟), 연해광열(燕海廣悅), 금하우한(錦河優閒), 금봉희영(禽峰僖永), 백화찬영(白花贊英), 지월정희(智月鼎熙), 응성민훈(應星旻訓) 등의 여러 고승들이 머물렀다.
만일암지에는 7층석탑이 있으며, 그 탑은 아육왕이 세웠기 때문에 아육왕탑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오층의 석탑은 석등의 옥개석을 상륜부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7층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할 때 암자보다 탑을 먼저 세웠다고 한다. 탑을 완성한 후에 암자를 지으려니까,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가 지지 못하게 탑에 묶어 놓고 암자 세우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암자를 완공 한 후에 암자명을 잡을 만(挽)자와 해 일(日)를 써서 만일암(挽日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석탑 앞에 있는 샘터는 배수가 잘되지 않아서 물맛은 좋지 않다. 이 샘은 원래 음양의 조화를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고 한다. 암자터 아래쪽에 암 수의 괘목 나무가 서 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음 양수 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괘목나무가 두 그루였는데, 한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식물 학자들은 이 나무의 수령을 천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나무를 천년수라 부른다. 어쩌면 이 나무의 나이테가 곧 만일암의 역사라 할 것이다.
산아래 대흥사는 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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