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해남군

[스크랩] 남도의 봄볕을 따라서 / 해남 윤씨 종택 녹우당

임병기(선과) 2008. 6. 6.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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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가

윤선도

내 벗이 몇이냐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 때가 많은지라
좋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찌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지거늘
소나무야 너는 어찌하여 눈과 서리를 모르느냐
땅속 깊이 뿌리가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러고 사철을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추니
밤중에 밝은 빛이 너만한 것 또 있겠는가
보고도 말이 없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녹우당(綠雨堂) 이라면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지만 고교시절 국어 교과서에 나왔던 오우가 연시조의 작자 고산 윤선도의 집이라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고택 뒤 우거진 비자림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는 소리가 푸른비가 내린 듯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랑채의 당호이나 지금은 해남윤씨의 종가집 전체를 이른다.


답사해본 사람이면 첫눈에 느낄 수 있는 것이 고택의 입지 조건이 경상도의 좁은 들에 비해 넓은 들이기에 물산이 풍부했으리란 것을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남인 집안이기에 노론에 밀려 벼슬길에 들어서지 않아도 기본적인 의식주는 해결되었기에 예술가가 배출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억지인가?


하지만 처음부터 해남윤씨가 부자는 아니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조선중기 까지만해도 남자는 결혼후 일정기간 동안 처가살이를 의무적으로 해야했으며,첫아이는 처가집에서 낳은 것이 관습이었고, 상속 역시 남여 균등배분이어서 해남 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정씨 부인을 맞은 덕에 재산을 모아 이후 장자상속으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오늘날 호남을 예향으로 말하는 것도 기실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해남 윤씨 종택과 만날 수 있고, 실학의 핵심에서도 녹우당은 자리하고 있어 조선후기에 큰 족적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즉 어초은의 4대손이 고산이며 고산의 증손자가 윤두서이고 처가 실학의 선구자 지봉 이수광의 증손녀이다.


일행과 이런저런 족보 이야기며, 갑오경장 이후 조선에서 사라진 하위계층은 돈을 주고 족보를 사는 投託, 할애비를 바꾸는 換父易祖가 횡행했다는 말을 나누면서, 약간은 사시의 눈길로 유물관을 돌아보던중, 종손 어르신을 맞은 후에는 선비화가로 추앙받는 공재 선생의 뛰어난 예술혼으로 이야기는 반전되었다.


이만한 유물전시관도 흔치 않은 일인데 120억의 지원금이 나오면 확충은 물론 진입공간등 대대적인 사업이 전개된다고 하니 고풍스러운 맛이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을 가지면서 안채로 발길을 옮겼다.
녹우당은 호남전형의 가옥 배치인 一자 형과는 달리 영남 및 북부 지방의 전형인 口자 형으로 본디 부터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채에서 안채로 출입공간이 영 어색하여, 초기에는 분명 암문이 있을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채의 녹우당 이름과 현판은 동국진체의 원조로 알려진 옥동 이서의 작품이며,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의 형이기도 하며 공재와는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어,호남 예술과 실학이 주로 남인들의 업적이라면 그 중심에 해남 윤씨 집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윤두서의 외증손이 실학의 완성자인 다산 정약용이란 것이다. 강진으로 유배온 초기에는 누구라도 그러했듯이 외갓집에서조차 다산을 멀리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유배 후기에 들어서면서 다산은 외가에 보관된 수많은 장서를 탐독하면서, 사상을 정립하며 저술활동을 했을 것이라 추측 가능하기에, 녹우당은 조선후기 사상계의 한가운데 자라잡고 있었다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한 집안에 두분의 사당을 따로 모셨을까?

2005.03.2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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