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해남군

해남...금강산 은적사(철불. 장촌리 삼층탑)

임병기(선과) 2009. 10. 7. 18:34
300x250
300x250

 

진도에서 은적사를 향해 가속을 더했지만 날은 어둑어둑 하다. 금강산이라 했다.금강산이 줄기를 뻗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이 바로 이 곳이라서  금강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일주문도 천왕문도 사치일까? 나무줄기에 멋진 현판이 객을 반겼다. 전통사찰 정보에서 사적을 가져왔다.

 

"본래 다보사(多寶寺)라는 절이 있었고  부속 암자로 은적암이 있었으나 19세기 중반 무렵에 다보사가 폐허가 된 뒤 은적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보사는 신라 560년(진흥왕 21)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해남 최초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현재 비로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좌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늦어도 고려 초기에는 절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절터 만이 주변에 남아 있지만 사하촌(寺下村)으로 형성된 절 아래쪽의 집들로 보아 다보사가 한 때는 큰 규모의 절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은적사 아랫마을 장촌리 남계. 모정에 삼삼오오 모여 계시는 할머니에게 3층탑의 위치를 여쭈었더니 벌써 은적사로 옮겨갔다는 이야기가 스트레오로 울려온다. 늦은 시간 개인집에 찾아드는 일도 실례이기에 마음속으로 고민했었는데 기우였다.

 

은적사에서 제일 먼저 반겨준다. 장촌리 남계마을의 석탑으로 비지정이다. 기단 일부, 3층 옥개. 상륜이 복원되었다. 화강암을 다듬어 지대석을 만들고 위애 3단  괴임으로 기단을 받치고 있다. 탑신과 옥개석이 각기 한 개 부재이며  몸돌에는 양우주가 모각되었다. 옥개석 받침은 3단으로 얇게 새겼다.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 이후의 탑으로 추정된다.

 

 지대석 안상

 복원한 지대석 안상속 귀꽃

 

오랫만에 만난 고향 친구 같았다. 출세는 했지만 유년의 친구에서 풍기던 독특한 향취를 간직한 그런 친구 말이다. 멀리서 다가오는 걸음걸이로도 인지할 수 있어 세월이 지났음에도 익숙한 그런  동무 말이다.

 

쪼그려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로 다가오신 보살님에게 "참 좋습니다"라고 했더니 왜 좋으냐고 묻는  대신    "참 좋지요?"라고 대답하는 보살님도 참 좋았다. 해질녘 산색깔.분위기.탑빛깔. 내마음의 색조는 어부지리요 금상첨화였다.

 

 

엄숙한 예불이 아니라 문닫힌 비로전에는 동자승의 염불이 들려온다 이따금 엇밧자 목탁소리로 싫지 않다. 궁금증이 더해갔지만 예불중인 법당으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더구나 옆에 계시던 보살님이 끝날 때가 되었다고 애타는 내마음을 달래주신다.

 

 

비로전 수미단. 짓굿은 어린아이 분위기의 사자. 법당에는 4명의 동자승(3명은 삭발하지 않았다)이 저녁 예불을 마치고 장난이 한창이다. 스님은 출타중이고 자기들이 예불을 올렸다고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밖에서 들었더니 목소리가 참 좋더라고 했더니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다.

 

 

비로전 철조비로자나불.  볼륨있는 얼굴에 비해 눈은 길게, 코는 작게 표현하여 단정하면서도 다소 근엄한 인상을 준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어깨는 둥글며 전체적인 신체 표현은 양감과 활력이 줄어든 느낌을 준다. 양 어깨에 두른 법의에는 규칙적인 평행 계단식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오른손 검지를 왼손이 감싸 쥐고 있는데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의 손모양과는 반대로 되어 있다.

 

 

법의의 형태나 두 팔에 걸쳐진 옷주름 등은 865년에 조성된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철불, 858년에 만들어진 장흥 보림사 철불과 닮았으며, 신라 하대 비로자불의 전형 양식을 일부 고수하면서도 오히려 고려 시대로 연결되는 작품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조성 시기는 10세기 무럽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비로자나불에는 달빛에 젖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날 절로 들어오는 조그마한 포구인 공세포에 한 불상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공양을 드리며 서로 모셔 가고자 하였으나 불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은적사에서 스님이 나와 옮기려 하자 그 때까지 꿈쩍 않던 부처님이 비로소 들려져 대웅전에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한쪽 다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여서 불상 주의에 불단을 만들어 다리가 보이지 않게하고 허리 윗 부분만 사람의 눈에 보이게 했다고 합니다."

 

2009.07.27

300x250
300x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