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해남군

[스크랩] 남도의 봄볕을 따라서 / 해남 대둔사

임병기(선과) 2008. 6. 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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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잠이 없는 탓에 일찍 눈을 떠서 뒤척이고 있는 중에 가까이서 닭울음 소리가 들린다.
너무도 오랫만에, 아니 잊고 지냈던, 닭울음 소리에 젖어 유년의 고향집 긴 겨울밤이 머리속에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며 향수를 자극한다. 정채봉 시인이 그랬었지? 고향의 붕알친구가 새벽녘에 "친구야! 닭이 운다"라며
전화를 하여 전화기를 타고 오는 그 진한 고향내음과 소식에 눈물 흘렸다고...
그런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닭울음 소리와 함께 휴대전화기의 진동음이 요란스럽게 요동을 친다.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단 말인가?
수화기를 타고오는 목소리 큰 화상 "헹님! 6시20분에 삼산 농협으로 오이소" 광주 찜질방에서 밤을 샌
幽玄이란 화상이었다.
이른아침의 산사는 무료 입장의 즐거움 보다는, 한적함과 신선한 공기의 청량함을 만끽할 수 있는데,그런
여유로움이 이제는 사치로 여겨질 만큼 나자신도 많이 타락했다. 더구나 九林里 長春洞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지명에서라도 알 수 있듯이 온갖 나무가 울울히 도열한 숲길은 이른 봄내음과 여린 푸르름을 가득 머금었을텐데...
그런 마음이나 알기나 한듯 影池의 느낌보다는 유교에서 원림 느낌의 無染池가 보인다.아마 연화를 상징하는
處染常淨과 의미가 통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가허루를 통과하여 꽃살 분합문이 고운 천불전에 들어선다. 
천불전의 현판은 원교 이광사 특유의 흘림의 글임을 알 수 있지만 골기가 묻어난다는 느낌은 어찌 내가
알 수 있으련만, 또한 가허루의 현판이 창암 이삼만의 글이라니 추사가 귀양도중에 천은사에서 창암의 후학과,
이 곳 대둔사에서 원교 글씨와 관련된 일화가 떠올라 웃음을 머금으며 나오는 뒤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자며 
동의를 구하는 듯 처마를 바라보며 유현이"오늘은 이상하게 직선이 눈에 가득 들어 오네요"란다.
가허루를 나와 표충사로 발길을 옮기니 찻집이 보인다 '동다실' 이곳에 주석했던 茶僧 초의선사의 동다송에서 
유래되었겠지만 품차는 고사하고, 음다에도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이른 아침 문이 열려있지 않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모든 답사기에 천편일률적으로 대둔사를 네개의 구역으로 구획했지만 엄밀히는 박물관도 포함 다섯개 
구역일거야 라며 가람배치의 부조화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속으로 삭혔지만, 한편으로는 무상출입의 반대급부로 
성보박물관의 고려동종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며, 윤고산이 장군을 낳을 샘이라고 하여 매일 길러다 
먹으며 장군수로 명명하였다는 샘을 거쳐 서산대사를 배향하는 유교식 사당의 솟을 삼문을 들어섰다.
군사정권 시절 무신우대의 성역화는 스님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초등학생만 되어도
아는 스님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아니던가? 만약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서산대사가
계셨을까?. 대둔사는 서산대사의 후광없이도 사세를 펼칠 수 있었을까? 라는 잡다는 생각을 접어며 시대적 
편년은 차치하고 창건설화의 주인공인 아도화상을 비롯 16분의 조사를 모신 조사전과  정조임금이 사액한
금물이 찬란한 표충사 현판 아래 사명대사와 뇌묵스님을 좌우로 하여 서산대사가 모셔져 있어 동행한
님들과 퇴계와 학봉 후손간에 펼쳐진 병호시비를 입에 올리며 사명당이 서산대사의 적통임을 되새겼다. 
표충사당 뒤 동쪽은 대광명전 구역으로 선원이라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제주도에 유배중인 스승 추사의 
방면을 축원하며 제자인 위당 신관호와, 소치 허련이 지었으며 초의가 단청을 하였다는데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지만 사도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올망졸망 짜집기된 듯한 가람배치의 대둔사에서도 중심영역은 남향하고 있는 북원이겠지만 어찌 남원보다 
낮게 위치하고 있어 과연 동시대에 건립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무지개 다리가 놓인 진입공간 침계루가 
의문을 해소시키며 넓지 않은 대웅보전 중정으로 답사객의 동선을 유도한다.
아~ 저 글씨가 원교와 추사 그리고 초의 선사의 일화를 간직한 대웅보전, 무량수각 현판이란 말인가!
좁은 중정을 가득 채울 듯한 느낌의 대웅보전,무량수각 서체를 보며 잠시 老阮의 호로 인해 시대적 편년를 
더듬어 보았지만, 젖살이 통통한 애기의 볼처럼 느껴진 것은 건방진 심사인가?
장대석 3벌대의 기단으로 보아 조선중하대 이후 중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계단 소맷돌의 도깨비에게 
건방진 서체에 대한 감상을 접고, 팔상도와 흔치 않은 사천왕벽화가 그려진 대웅전에서 삼존불 탱화에 대해
유현의 유려한 설명을 듣는다. "본존불 탱에 비해 아미타와 약사여래불의 후불탱은 자기(유현)를 닮아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라는 표현이 압권이었다!
오늘날 제자리를 잡고 있지 못 한 것이 인간이나, 절집이나 뭐 그리 문제일까만은 대둔사 범종각은 건방이 넘쳐 
대웅보전 옆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더구나 좌체우용을 희롱이나 하듯 좌측에서 눈을 부아리고 큰집(대웅보전)에 
드나드는 식객을 감시하는 모습에 기가죽은 듯, 나한전과 산신각은 한 집안에 조용히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신라말의 형식을 두루 갖춘 약화된 삼층탑도 제위치를 못찾고 비켜나 있다. 창건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는대 방해가 되었기에 대접을 못 받았는지 어찌 처량해 보인다.
대둔사 금당 영역을 뒤로하고 부도전으로 내려와 능숙한 솜씨로 진의문(?) 자물통을 열고 잠입해 성공 어려운 
한문투성이에서 눈에 익은 몇몇의 단어로 부도의 주인공을 더듬는다.금강산에서 입적하신 서산대사의 의발을 
수습후 대둔사에서 꽃을 피운 고승들의 부도라지만 우리에게는 추사,다산과 더불어 늘 함께 등장하는 혜장, 
초의 선사 정도인데 허허참!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중수비에 새겨진 이름 이후락!!!
대둔사 부도전도 사찰 서쪽에 모셔진 것은 틀림이 없으나 진입공간에서 치우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나만의 
욕심이겠는가?라고 자문해 보지만, 부도전에서 나오라고 소리치는 대둔사를 너무도 사랑하는 트럭기사 
보살을 본 순간, 시대는 다르지만 인간의 끝없는 현시적인 욕망이 차이가 없다는 명쾌한 결론을 내리며 
달구지에 몸을 실었다.
2005.03.21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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