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해남군

[스크랩] 2000년 남도 여행 스케치...2000.7/28~7/30일

임병기(선과) 2008. 6. 6. 07:54
728x90
 
오끼나와 남쪽에 위치한 태풍 볼라벤이 북상중이라는 기상 상황이 발표되었지만 빗속의 여정도 흥미있을 것이라 
자위하며 출발 준비를 하였건만, 보경이의 불참 의지가 분명한 무언의 시위에 달래고 구슬리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신화라는 그룹의 민우가 출연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꼭 청취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기가 막힌 사실을 알았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한 아빠의 심정을 언제쯤 이해해줄런지......
영호남을 연결하는 88고속도로는 양지역의 화합을 도모하고 산업활성화를 기대한다는 개설 취지가 무색하게 차량 
소통량은 적은편이여서 2차선 도로지만 주위 경관을 만끽하며 운전을 할 수 있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대나무의 고을 담양읍내에 소재하고 있는 죽제박물관은 화려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았으며 입장권과 함께 
건내주는 담양 안내지도 한 장에 보너스를 받은 기분으로, 화학제품에 밀려 옛 영화를 잃어버린 공예품을 
살펴보면서 퇴락한 종갓집 행랑채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편리하고 실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상에서 사라진 것이 어찌 죽제공예품 뿐이겠는가! 
전시실에서 나의 관심사는 팔방 미인을 생각하면서 죽부인을 안고 자는 너무나 아저씨다운 꿈을 꾸었고, 
마누라는 얼마전 구입한 돗자리가 가짜는 아닌지 바가지는 쓰지 않았는지에만 관심을 두었으며, 아이들은 
전시품에는 흥미없이 컴퓨터 조회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공사중인 지방도로를 따라 조선조에 조광조의 제자였던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된 스승의 적소 근처로 
내려와 일생을 보냈다는 소쇄원에 도착했다.
소쇄원은 양반문화의 일부분인 정자중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보고서도 느낄 수 없는 나의 무식을
 원망할 겨를도 없이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알고 훌륭한 가이드가되어 괘변을 풀기 시작했다. 
소쇄원은 영남지방의 정자와는 달리 주위 경관이 뛰어나고 대나무 백일홍 소나무 단풍나무가 요소 요소에 자연과 
조화를 이뤄 조성되어 있고, 물의 흐름을 막지 않으면서 흙돌담을 축성하고 암반위를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니 우리 조상들의 자연을 포용하려는 지혜가 돋보이지 않니?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의 속마음을 읽기나 했는듯 설명에는 관심도 없이 물장난만 치고 있다. 
아는 길도 물어 가라 했거늘 지도에 의지하다가 한참 길을 헤맨 후 조선초까지 천불 천탑이 있었고 현재도 백여기의 
돌부처와 이십여기의 불탑이 남아있는 화순 운주사 일주문을 지날 수 있었다. 불탑과 불상의 조성 배경과 관련된 
많은 얘기가 있지만 풍수의 비조인 도선국사 조성 설 (한반도는 대양을 향해 나아가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산과 산맥이 동쪽에 치우져저 일본으로 국토의 정기가 흘러가는 것을 방지하기위한 비보책으로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불탑 불상을 세워 정기를 한반도에 머무르게 했다)이 재미있다. 
운주사의 돌부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돌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신라 돌장이의 정교하고 세련된 솜씨와는 달리 
촌스럽고 투박하며 시골장터에서 막걸리 한 사발에 흡족한 미소를 짖는 촌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무튼 산기슭에 
천년을 누워있는 부부 와불이 벌떡 일어나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원해본다.
푸근하고 넓은 들녘의 땅기운을 듬뿍 머금은 푸르디 푸른 벼를 보며 한참을 달려가니 꽃봉오리 같고 왕관 같은 
월출산이 두팔을 벌리고 여행객을 맞이한다. "월출산 신-령님-께 소-원 빌었-네"로 시작되는 이미자의 낭주골 
처녀를 읊조리면서 영암고을을 지나 도갑사 입구에서 첫날의 여장을 풀었다.
우리가 묵은 민박집의 연세 지긋하신 주인어른은 집옆 450년된 팽나무 만큼이나 후덕하고 넉넉하신 분으로 
친절식당이라는 상호와 너무나 잘 어울렸고, 머리가 천장에 닿을 만큼 볼품없고 초라한 방이지만, 사군자(대나무)와 
陰德陽福이라 쓰여진 액자와 상반신이 노출된 미인도(서양화)가 걸려 있어 여정에 지친 나그네에게는 궁궐 같은 
침실이었다.
우리가 월출산 등반은 하지 않고 도갑사만 둘러본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침 일찌기 가면은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가외의 덤까지 주셨다. 장거리 이동으로 피곤함이 눈꺼풀에 내려앉은 아이들을 깨워 무료입장의 달콤한 
꿈을 꾸면서 도갑사로 향했건만 매표소 부스안에 앉아 있는 분이 왜 그렇게 얄밉고도 위대해 보이는지.......
도갑사는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조선조에 수미선사가 중수한 가람이지만 이 절집도 예외없이 불사라는 미명하에 
현대 문명의 이기가 가득해서 황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여기서도 새벽녘 도량석과 예불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교교한 달빛 아래 십우도 탱화는 비쳐질 것이며 만추의 풍경 소리는 여행객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리라!
대웅전 부처님께 삼배를 울리고 짧은 입정을 마친 후 절집을 나오는 등뒤에서 보경이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아빠! 절에는 그만 가자 왜 가는 곳마다 부처님께 삼배를 해야하노!" 
그러자 아들놈이 나를 거든다 "누나! 부처라도 똑 같은 부처는 없는 기라!"
백제때 일본에 경서와 문물을 전해주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아스카 문화의 원조인 왕인박사의 유적지와 
탄생지는 정갈하게 단장되었지만 지나치게 성역화된 느낌이 들었다. 
여기보다는 일본에서 추앙 받고 존경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애국심일까? 이기심일까?
유쾌하지 못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쪽 월출산 자락에서 울리는 독공에 열중하는 우렁차고 쉰 듯한 목소리 아! 득음을 
위하여 저렇게 노력을 하는구나. 가족만 옆에 없었다면 현장으로 달려가 그네들의 득의에 찬 표정과 득음을 
갈구하는 땀에 젖은 얼굴을 보고 싶은데......
해남을 향해 달리던 중 장천리 선사시대 유적지라는 안내판을 쫓아 서호의 고인들 유적지를 찾았다. 
우리집 근처에 있는 진천동의 지석묘와 같은 남방식 고인돌 7기가 산재해 있고 주거시설인 움집을 복원해 놓아 
아들놈은 책에서 본 것과 같다면서 움집 안을 들락날락 전시실 안을 기웃기웃 고인돌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마냥 
신이난 얼굴이다. 
한반도의 끝자락 해남읍내에 위치하고 있는 녹우당은 해남 윤씨 종택이며 효종이 고산에게 하사한 경기도 수원의 
행랑채를 이전했고 양반집의 전형인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갖추어져 있으며 500년 된 은행나무가 녹우당의 
고풍스러움을 더해준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으로는 해남 윤씨는 시집온  며느리가 친정으로부터 받은 상속 재산으로 재테크를 잘하여 
해남 제일의 갑부가 되었다는데 알 수 없는 일이며 나에게는 고교 국어시간에 배운 오우가와 어부사시사의 작가 
고산의 체취가 베어있다는 사실과, 소쇄원과 더불어 정자중 조경이 가장 우수하다는 보길도 세연정을 가보지 못한 
아쉬움에 대리만족을 하면서, 또한 짧은 한문 실력을 원망하며 노비문서 상속문서 장원급제 답안지 산중신곡 
고산의 증손자인 윤두서의 회화가 비치된 전시실을 살펴보았다. 
해남읍내에서 일어난 에피소드 한 장면
-.아저씨! 윤선도 유적지 어디로 갑니까?
-.무슨 도라고요?
-.윤선도 윤선도 말입니다.
-.완도는 좌회전이고 진도는 직진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윤선도는 어디 있는 섬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
땅끝 마을에 거의 다다를 무렵 최근 종영된 드라마 허준의 촬영 세트가 있는 해변가를 찾았다. 드라마의 인기를 
반영하듯 많은 관광객이 유배지로 설정된 세트장 주위를 신기한 듯 살펴보고 있었으며, 젊은 피서객 일행은 임오근 
흉내를 내면서 "홍-춘-이"를 남발했지만 상대 아가씨는 싫지 않는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고 서 있다.
그래 젊음은 좋은거야! 나에게도 예진아씨와 허준 간의 사랑처럼 젊은 날 아련하고 애잔한 추억이 쌓여있거만, 
나의 속내도 모르는 마누라는 더위에 지쳐 무표정하게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유사이래 수많은 전화와 풍상을 굳건히 지켜온 반도의 끝 땅끝 마을, 가슴 설레는 기대와 무엇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바램은 부르조아적 사고였고 착각의 절정이었으며 망상의 극치였다. 도심의 중심가를 방불케하는 
소란함과 기이한 패션의 물결 무질서의 극치.......
그래, 땅끝은 땅끝으로만 생각하자! 애초부터 의미를 부여하고 찾은 사치스러운 사고는 파도 속으로 던져버리자.
땅끝의 꿈을 떨쳐버리고 강진으로 향하면서 친구 선제를 생각했다.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를 제외하면 화제거리가 없다고 했던가?
선제와 나는 20여년전 논산훈련소와 병참학교 동기일 뿐 자대 생활을 같이 하지 않았지만, 외환은행에 근무하다 
입대한 강진 촌놈과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무척 가까웠고 교육 수료후 나는 경기도 연천으로 선제는 대구 
50사단으로 배치를 받아 그냥 젊은 날의 짧은 만남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넉살 좋은 이 친구는 나의 부모님을 
친척으로 빙자하여 외박을 자주 하였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나와는 군생활중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며 제대 
후에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안부 전화는 사는 사이로 현재까지 진행중이다.
작년 이때쯤 그 친구 왈 "야! 내고향 강진으로 휴가 같이 가자 니가 관심 많은 유적지와 전통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고 낚시도 즐길 수 있어 대낄이다! (선제는 경상도 사투리를 즐긴다)" 하지만 충남권 여행이 계획되어 있던 
내탓으로 내년을 기약했었다.
며칠전 내가 야! 임마 너거 고향 보고 싶어 일년동안 살이 빠져 피골이 상접했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빙신아! 지난주에 어머님 모시고 해외여행 다녀왔다. 왜? 그렇게 안 통하노? (지하고 내가 무슨 염화시중의 
미소로 통하는 부처님과 가섭존자 같은 사이라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강진에 혼자 계신 어머님께 연락해 놀테니 
찾아가라고 한다.
아서라 아서 친구 아들보고 당신 손자와 아들 보고 싶어 혼자 계신 노모님 눈물 뿌리실라......
아무튼 강진은 선제와의 인연 때문이지 항상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의 남도 땅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지인 다산초당(지금은 기와집) 가는 길은 한낮인데도 하늘을 가릴 정도의 울창한 숲이 
더위를 가시게 했고, 상큼한 공기는 풍진에 오염된 나그네의 폐부를 씻어 내려주었다. 범인이라면 조정을 원망하고 
반대 당파를 시기하며 보복의 날을 손꼽아 기다렸겠지만, 가슴속 깊히 맺힌 한을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저술활동으로 승화시킨 다산은 슈퍼맨이었다,
아담한 암자같은 분위기의 다산초당은 제자들을 가르친 서암과 주거처인 초당, 저술활동을 주로한 동암과 다산이 
직접 조성한 샘과 연못이 있으며 다를 준비한 다조라는 바위가 초당 앞에 놓여 있었다. 경외심의 발로인지 다산의 
초인간적인 면면은 별 감흥을 받을 수 없었지만, 흑산도에 유배된 형을 그리며 천일각(다산 유배시에는 없었음)이 
위치한 산기슭에서 멀리 강진만을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찐한 너무나 인간적인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산과 나를 동일시하려는 견강부회의 어림없는 논리의 전개일까?
천일각에서 강진만을 조망하면서 맛본 카타르시스를 가슴에 품고 갯벌 사이를 비집고 서서히 밀려오는 밀물의 
흐름을 즐기면서 강진읍내 영랑 생가에 들리니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우리를 반가이 맞아준다.
뒤켠의 대나무 숲만 아니었으면 모란꽃 정원으로 착각할 만큼 모란이 많았지만 시문학 동인인 정지용의 향수는 
노래로 만들어져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데 영랑의 모란은 언제쯤 만개할까??
8월초에 열릴 청자축제 깃발이 난무하는 가로를 헤치며 칠량 옹기마을에 도착하니 기대했던 가마는 없었지만 
노부부와 젊은 아들이 이방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어 우리도 옹기장이가 되어 그 분위기에 
몸을 던져버렸다.
한참후 담배를 꺼내문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수요는 있는지요?
-.황토에 관심이 있는지 조금 나은 편이야.
-.(나의 말문을 막으며) 예전 이야기야 이동네에 나밖에 없어.
-.오래하셨습니까?
-.증조부님이 시작하셨고 나는 40년째지.
   (나와 주인 아저씨의 대화 도중에도 보경이와 종수는 장식용 옹기 뚜껑을 만들고 있는 주인 
    아들의 손놀림에 푹빠져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보람은 있으십니까?
-.(담배 한모금 길게 마신 후) 돈으로 따지면 이짓 못해,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야.
-.???
-.기능 보유자로 인정 받았거든 (일어서더니 방문을 열고 인증서를 가리킨다)
-.혜택은 있으십니까?
-.한달에 80만원 받어.
-.선생님의 기능을 전수할 분은 계신지요?
-.저놈이 받을런지?
짧은 대화였지만 진솔하고 꾸밈이 없는 그분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작업장에서 한참이나 머무른 후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돌려 청자 박물관으로 향했지만 아뿔싸! 6시가 막 지났는데 문을 닫아버렸다. 강진읍내를 뒤덮은 
청자축제 깃발은 한낱 치장에 불과했단 말인가? 토, 일요일 휴가철에는 폐관 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여유로움을 
기대하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긴 아쉬움을 달래며 해안선을 굽이굽이 돌아 장흥 땅 수문 해수욕장에서 둘쨋날
여정을 마감했다.
나는 주강현 교수의 저서를 통하여 우리문화의 맛과멋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접해오고 있지만 그분의 저서중 
한겨레신문사에서 발간한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2에 언급된 모정(募亭)과 누정(樓亭)의 내용중 한번도 본적이 
없는 모정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남도 땅에서는 마을 초입마다 당산목과 모정을 볼 수 있어 
여행의 기쁨이 배가 되었다.
모정에 관한 내용을 발췌 요약하면 "모정은 농민들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 잠시 휴식을 위해 사용하는 방이 딸리지 
않고 마루뿐인 마을 건물로 농민들의 휴식처이자 집회장소다. 누정이 양반 남성들만의 독과점 종합문화센터였다면 
모정은 무지랭이  농민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모정이 제역활을 발휘하는 시기는 역시 여름철이다. 
김매던 농군들이 점심을 먹고 불볕 더위를 피새 눈을 붙이는 요긴한 장소이자 굽이치는 들녘을 바라보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사랑방 구실도 하고 모깃불이 사위어 가도록 밤더위를 피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 모정이 없다면 
아마 한 여름철 농촌문화 자체가 없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모정이 호남지방에만 주로 있는 까닭은 야산조차 
없어 일망무제로 펼쳐진 들녘에서 햇볕 가릴 곳조차 없기 때문일 것이다"
3일째 새벽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더니 보성땅 다원을 조망할 수 있는 다향각에 올라섰을 때는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산허리를 돌고돈 이랑은 끝이 보이지 않고 물결이 밀려오듯 이랑은 자꾸만 나에게로 달려오고 있다. 
6학년인 아들마저 "아빠! 참 좋다 그지" 할 정도로 가슴이 탁트인 기분이다.
영화나 사진으로 접해본 장소를 찾아가면 느낌이 반감되는데 여기는 오히려 시각적 즐거움이 더해지나 짧은 문장력을 
한탄하며 관광버스 속의 여행객들이 무어라 하든 말든 우리는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빗속을 헤치며 천천히 
차밭 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다향각으로 되돌아와서도 차밭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과자와 차를 
팔고 있던 아저씨가 말을 붙인다. 
-.참 좋지요
-.그러네요. 넓고 많은 이랑에서 일일이 손으로 잎을 채취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네요
-.그렇지 않아요. 4월 20일 곡우를 전후해서 한사람이 두 개의 이랑을 맡아 손으로 따지만 그
   후에는 기계로 땁니다.
-.그럼 왜? 참새 혀처럼 작은 잎을 원료로 한다고 해서 작설차라고 하나요?
-.여기 사람들은 곡우차라고 부르는데 다른 지역에서 작설차라고 이야기해요.
-.그렇군요.
-.저기 멀이 득량만이 보이죠? 그 옆동네가 서편제 마을이고요 산아래 계곡이 국악인 조상현씨  
   가 득음 득음아세요?    얻을 득(得) 소리 음(音) 득음한 득음골이요! 우리보성은 소리의 고장이요! 
차는 맛으로 느끼고 소리는 가져가세요! 
(아저씨의 설명은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했으며 유창하지도 않았으나 자신에 찬 표정과 애향심으로 똘똘 뭉친 
"미스터 보성" 이었다.)
-.선생님(왠지 아저씨보다는 선생님이 어울릴 것 같았다)은 과자 파시는 분이 아니신가요?
-.나요? 저 아래 동네에서 차농사 짓고 틈틈이 장사도 합니다.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면서)  동네 이장일도 맡고 있어요.
우리 농어촌을 지키고 계신 자랑스런 이장님들 화이팅!!!!
이장님 덕분에 과자를 한뭉치 손에 들고서 잠시 차를 달리던 중 과자를 몇 봉지 더 사야겠다며 마누라가 저기 보이는 
휴게소에 들어 가자고 한다.
마누라는 가게주인과 이야기를 나눈후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후 만면에 희색이 가득한 득이 만만표정으로 
나온다. 주인에게 과자 값을 물었더니 한 봉지에 2500원이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의식해 살며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저위에 다향각에서는 2000원이라고 하던데 500원 깍아주세요 했더니 주인 아줌마가 
에누리 해주었단다. 
이장님과 마찬가지로 내 마누라도 화이팅! 
오락가락하는 빗속을 뚫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주무대인 벌교 땅을 지나 순천 낙안읍성에 도착했다.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된 곳으로 지금도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일반적인 
성과는 달리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초기에는 토성을 쌓았으나 나의 중시조인 
임경업 장군이 석성을 쌓았으며 고을 원님으로 재직시 선정을 베풀어 읍성 사람들은 매년 음력 정원 보름날 
추모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제 2박 3일의 여행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이제 우산리에 있는 고인돌 공원만 거치면 전남에서의 일정은 
끝난다는 생각에 짧은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고인돌 공원은 전남지역에서 발굴된 남방식지석묘를 옮겨와 조성한 공원으로 장래희망이 역사학자인 아들놈은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의 차이점을 누나에게 설명하며 마냥 즐거워했다. 자료실에서 상영된 영상물만으로도 
고인돌에 관한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북방식 고인돌을 암석이 아닌 재료로 복원한 것이 다소 아쉬웠지만 
갈대밭은 만들어 발굴전 지석묘의 주위 환경을 알리려한 의도와 공원 입구에 세워진 마을 지킴이인 솟대를
보면서 선사시대의 강가 마을로 달려가 보고 싶었다. 나는 송광사도 들리고 싶어 은근히 보경이에게 물었다.
-.보경아! 송광사만 들리지 않을래?
-.싫어!
-.송광사는 불보사찰 통도사, 법보사찰 해인사와 더불어 삼보 사찰인 승보사찰인데......
아들은 "아빠! 우리 둘이만 가고 누나와 엄마는 차에 남아 있게 하자" 라고 하지만 딸에게는 지쳐 보인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신화의 민우라는 놈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계획에는 송광사, 함양의 상림, 합천의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와 덕천 서원을 답사하기로 했지만 한반도를 
그냥 스쳐가기 아쉬운 듯 얄밉게 비를 뿌리는 태풍 볼라벤을 원망하며 남해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그래!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나, 지나침 보다 모자람이 낮다고 했으니 다음을 기약하고 집으로 향해야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억하자!  
호남들녘의 넉넉함, 옹기장인, 이장님의 애향심, 그리고 조상들의 한과 정이, 땀과 체취가 베여있는 
문화유산과 우리의 산하를...................!!! 
2000.7/28~7/30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