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나주시

나주...덕룡산 불회사

임병기(선과) 2009. 9. 19.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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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조성한 일주문을 무사 통과했건만, 장승보다 먼저 템플스테이로 차량 출입을 금한다는 바리케이트가 막아선다. 하긴 내 동선을 알리가 있겠는가? 터벅터벅 산사를 오른다. 언제나 처럼 "너 꼴 좋구나"라는 표정으로 건방진 중생을 샅샅이 검색한다. "너 예전에도 여기까지 와서 진흙탕에 바퀴가 빠져 돌아갔지? 라며 웃음 짓는다.

 

그길은 이제 포장되어 과거의 운치가 사라져 두려움이 엄습한다. 절집 까지 포장되면 가장 빠른 변화가 사하촌 상권의 형성은 명약관화한 사실 아닌가? 문명의 이기를 즐기는 중생이 아이러니하게 고즈넉한 산길을 운운하고 있으니 참 잘 난 중생이다.

 

이제는 차이가 줄어들었지만 답사를 하다 보면 영남과 호남의 가장 큰 차이가 들판의 모정과 정자 였다. 정부 시책인지 영남지방 들판 마을 입구에도 모정이 많이 들어서 있다. 모정과 정자문화의 차이는 옛님의 숨결방 어딘가에 언급을 했기에 여기서는 략한다. 하지만 사찰벅수는 석장승과 목장승으로 뚜렷하게 구별된다. 영남의 경우 창녕 관룡사.상주 남장사. 의성 대곡사 외에는 전례가 드물지만 호남지방에는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원인을 나름 생각하고 있지만 설명을 피하겠다.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로 이해하길 바란다. 

 

하원당장군

 

언제부터 장승을 남녀로 구별이 했는지 모르지만 남장승이라고 한다. 정수리부분 상투, 둥글고 큰 얼굴, 왕방울처럼  툭 튀어나온 눈, 미간의 4줄 주름이 있는 주먹코, 송곳니는 밖으로 드러나 있다. 거칠게 표현한 긴 귀, 턱에는 수염이 길게 늘어져 있다.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무섭기는 커녕 농짓거리 걸고 싶은 장승이다. 마누라 장승이 눈 감아준 사악한 무리를 철두철미하게 검색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몸에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음각되어 있다.

 

 

여장승. 남장승에 비해 부드럽고 온화하며 수줍은 표정이다. 넓은 얼굴. 튀어나온 눈, 쌍꺼풀과 긴 속눈썹, 미간에 3줄 주름이 있는 뭉퉁한 코, 수줍은 듯 웃는 입술 사이에는 드문드문 이빨이 보인다. 귀를 표현하지 않았고,  몸체의 앞부분에 ‘주장군(周將軍)’이라 새겼다. 

 

석장승의 제작 년대는 가까운 운흥사(雲興寺)의 1718년 제작된 석장승과 비슷한 점이 많아 비슷한 시기 18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아침 산길 공기가 청량하다. 빗물을 머금은 흙내음도 향수를 자극한다. 템플스테이에 참석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예쁜 보살님은 한가하게 느릿느릿 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표정이건만, 내 입에서는 불평불만을 마구 토하고 있다. "차를 통과 시키면 절이 없어지나?"

 

 

석등.부도 부재 조합이다. 어차피 극락왕생했을텐데 이름을 남겨 무엇하겠는가? 대웅전 옆에서 스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어 진작에 답사하고자 했던 원진국사 부도를 건너 뛰었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연식 탓인지 요즘 흔하게 도지는 증상이다. 영암 도갑사 부도전에 와서야 불회사 일주문을 벗어나며 내내 찜찜했던 정체를 알았다.

 

 

도암당 부도  

 

 

진여문. 일주문을 지나 불회사 개울 위에 걸린 산문이다. 순천 송광사 우화루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다. 진여문과 천왕문 사이 대문에는 금강상을 그림으로 그려 모셨다. 진여문은 천왕문을 덧붙여 'T'자형 평면의 산문이다. 천왕문에는 사천왕 탱화를 봉안하여 이채롭다.

 

 

한국전통사찰정보에서 창건 자료를 가져왔다. "불회사에 관한 문헌기록은 「호좌남평덕룡산불호사대법당중건상량문(湖左南平德龍山佛護寺大法堂重建上樑文)」, 「불호사창건주원정국사전말사적(佛護寺創建主元禎國師顚末事蹟)」, 「일봉암기(日封菴記)」, 「불호사불량시주공덕기(佛護寺佛粮施主功德記)」 등이 있다. 이중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資料)"에 기록된 「호좌남평덕룡산불호사대법당중건상량문」에 의하면 불회사는 백제 침류왕원년(384) 인도승 마라난타가 동진(東晋)으로부터 서해안 변산반도 법성포로 들어와 먼저 불갑사(佛甲寺)를 창건하고 곧바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한다. 또 다른 설에는 신라시대 희연조사(熙演祖師)에 의해 중창 불사가 이루어 졌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이 두 설 모두 입증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검토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후 조선 태종 3년(1403)에 원진 국사(元稹 國師)가 3창했다는 내용이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진여문 맞은편 산기슭에 있는 고려 말 충숙왕 4년(1317)에 건립된 원진국사(圓眞國師)의 부도를 3창주인 원진국사의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서로 다른 인물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불회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지리서와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불호사(佛護寺)로 기록되어 있는데, 창건 시에는 ‘불호사’로 불리다가 대체로 순조8년(1808) 무렵부터 지금과 같은 ‘불회사’로 바뀌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1664년, 1747년, 1798년 세 차례 화재가 일어 건물은 소진되었는데, 그때마다 뒤이어 중창하였다. 이 외에 1693년에는 괘불탱화가 조성되었고, 1791년 3월 26일에는 연담(蓮潭)스님의 제자인 제해(濟海) 스님이 나한전을 상량했는데, 이 나한전은 1798년 화재 시에도 불을 면하고 건재하였으며, 이어 1799년에는 명부전이 신축되었다."

 

괘불대 3기가 중정에 서있는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다포계 팔작집이다. 현재 전각을 지을 때 쓴 '대법당상량문(大法堂上樑文)'을 보면 지금 건물은 1799년(정조 23)에 건축하였다.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3단으로 축대를 쌓았다. 자연석 주초에 민흘림기둥을 그랭이 했다. 추녀에는 활주를 보강했다. 

 

 

 안초공 외부 용머리

 

 

내부에 드러난 좌청룡, 우황룡 꼬리

 

 

대웅전 비로자나 삼존불. 무슨 사연인지 당호와 주존 협시불이 맞지 않는다. 비로자나불은 지불로서  위에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건칠불이다.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머리는 뾰족한 나발인데 육계는 높지 않고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통견의 법의. 슴 아래부분에는 띠매듭으로 고정한 승각기가 보인다. 옷주름은 어깨에서 자연스레 흘러내려 소매에 이르고, 다리부분에도 원호형으로 흐르다가 결가부좌한 두 다리 사이에서 부채꼴을 형성한다. 제작 시기는 고려후기로 추정한다.

 

협시보살인 관음, 대세지보살은 크기와 자세, 세부의 모습이 서로 같고, 두 손의 수인만 서로 대칭되어 장식물 등 세부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보살상은 소조상으로 제작 시기는 조선신대 후기로 추정된다.

 

후불탱은 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의 심신탱이다. 중앙에 키형광배의 비로자나불. 좌우에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춘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크게 배치하고, 그 위로 10대 제자를 비롯한 성문을, 그 아래로는 사천왕과 협시보살을 묘사하였다.

 

 

대웅전 건칠비로자나불을 촬영하고저 스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디서 오셧습니까?

-.대구서 왔습니다.

-.저도 김천 수도암에서 이번에 여기로 왔습니다.

-.스님 제가 제일 좋아하는 절집이 수도암과 완주 화암사 입니다.

-.어? 소승 속세 고향이 불명산 아랫동네 입니다. ㅎㅎ 마음껏 촬영하세요

 

스님 하안거 마치시고  만행길 오르셨죠? ()()()

 

200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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