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나주시

나주...동문밖 석당간

임병기(선과) 2009. 9. 16.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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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정이 길었나 보다. 피로가 엄습해온다. 종일 에어컨 바람 탓에 머리도 어질어질하다. 건너뛸려고 했는데 길옆 이정표에 이끌려 몇년만에 다시 찾았다. 예전 유현과 들렸을때 떠벌렸던 "왕골돗자리, 오씨부인"이야기도 생각나고 옛글도 있어 문화재청 자료와 발굴과 관련된 신문 스크랩으로 대신한다.

 

피곤 탓인지, 입맛 때문인지 나주 곰탕이 예전보다 못했다. 나만 그랬는가? 동행이 있었다면 홍어회로 막걸리 한주발 했으면 좋았을 금성의 밤이었다.

 

출처...문화재청

 

대개는 두 지주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당간이 함께 남아 있어 중요한 유물이다. 당간은 5개 돌을 서로 맞물리게 하여 세웠는데, 아래는 굵고 올라갈수록 차츰 가늘어져 안정감 있다. 이러한 당간에 철띠를 두른 후 지주의 안쪽에 마련된 받침돌 윗면에 구멍을 파서 이를 고정시켜 놓았다. 당간 위에는 8각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와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달아 놓았다.

본래 당간은 절 앞에 세워지는데, 이 곳에 절이 있었다는 역사기록은 없고 다만 풍수설과 결합하여 나주의 땅모양이 배모양이기 때문에 안정을 빌기 위하여 당간을 돛대로 세운 것이라는 말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고적조에 주(州)를 설치할 때 나주의 지형이 주형(舟形)인 까닭에 그 안정을 빌기 위하여 동문밖에는 석장(石檣)을 동문 안에는 목장(木檣)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872년에 그려진 나주목지도에는 나주읍성의 동문밖과 안쪽에 석장과 목장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석장과 목장이 있었다. 목장의 형태는 지도에 나타난 그림으로 보아 석장(현재 동문밖석당간)과 같은 형태로 보인다.

 

 

나주신문. 2008.12.21

 

동문밖 석당간에 대한 해체 보수작업과 기단부 발굴이 이뤄지며 기단 구조물에서 선조들의 지혜로운 석조건축 설계를 보여주는 유구가 발견됐다. 동신대문화박물관은 지난 7월부터 동문밖 석당간에 대한 해체와 보수작업에 관련, 기단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올 12월에는 그 구조를 파악하고 자료 정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번 발굴을 통해 동신대문화박물관 측은 전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3층으로 이뤄진 기단부를 확인했다. 지대석(기단 1층) ,장대석(기단 2층) 위자형 8개, 정자형으로 요철형 맞춤을 한 3층 구조로 만들어진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3층 구조 기단부는 축조 당시 약한 지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쓰였다. 때문에 당간 자체의 하중을 견디고 지반침하를 고려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잡석과 돌을 사용하여 기단부를 더욱 견고하게 보강했다.
 
이번 발굴에서는 12 ~ 13세기 삼감청자파편도 발굴됐다. 동신대문화박물관 이수진 학예사는 "원래 이곳이 인간 생활지와는 관련이 없어 단지 물에 휩쓸려 들어온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동신대 박물관 측은 석당간의 구조와 양식을 볼 때 고려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해체 보수작업은 (주)예담문화재가, 기단부에 대한 발굴은 동신대박물관이 실시했다.

 

200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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