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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안내하는 가인강산님은 문경에서 교감선생님으로 재직중이어서 문경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그들과 교류가 깊어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듯 했다. 지난번 방문 때도 밤 늦도록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도예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었다.
오늘도 답사 첫코스를 영남요로 하였지만 김정옥 선생님과 8대 김경식님의 부재로 요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래 자료는 문경 향토사료 제11집에서 가져 왔다.
문경의 도자기 생산은 동로면 인곡리에서 조선초기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인곡에서 시작된 도자기 생산은 종곡과 소야, 생달, 적성을 거쳐 갈평, 관음으로 전파되었고, 특히 관음요는 조선후기와 말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에서도 맥을 이어 오늘의 문경도자기의 맥을 이어주고 있다. 관음리의 도자기 생산의 모든 조건은 앞에서 언급하였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현재의 산업사회에서도 전통기법에 의한 문경도자기가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으며 번창하고 있기까지는 문경도자기의 맥이 오늘에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관음리의 강성규씨의 입신의 경지에 이른 도자생산 과정을 소개한 바가 있다. 강씨의 그와 같은 능력은 우연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관음리에서는 1800년대의 김교수, 김성진 등 전통도자기 생산기술이 전승되어 맥이 끊어지지 않은 결과이다. 때문에 문경도자기는 전통예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광복후 오늘까지 그 맥을 잇고 전하고 전수받은 사람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김교수(金敎壽)와 김순경(金順慶)에서 이어진 관음요(觀音窯)의 맥(脈)
관음리에서 사기를 굽기 시작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으나 기록상으로 보이는 것은 1923년도에 경상북도 “도예수공업 실태”에 나오는 관음요의 김교수, 김순경 두 사람의 도요이다. 그 기록에 의하면 김교수는 1843년 9월에 관음요를 개창했다고 하였다.
1843년은 우리 나라 헌종 9년이다. 김교수는 헌종때부터 철종, 고종을 거쳐 일제치하인 1923년까지 80년간을 관음요에서 사기를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김교수가 관음요를 개창한지 150여년이 훨씬 지났다. 이 기간을 지나는 동안에 그 맥은 아들 김운희, 손주 김장수, 증손 김천만, 김정옥 등 가족중심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가 있으며, 그 밖에도 관음리를 중심으로 거주한 도예가들에게 이어졌다고 보인다.
문경 관음도요의 계승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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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 수(金敎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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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순 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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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운 희 ┃ 김 장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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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영 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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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근 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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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천 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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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복 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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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정 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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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성 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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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한 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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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성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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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선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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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장 김정옥(名匠 金正玉)과 영남요(嶺南窯)
문경이 낳은 도자공예 최초의 명장인 백산 김정옥씨는 사기그릇의 고장인 문경읍 관음리에서 7대를 이어온 전통도예 집안에서 1942년 2월 24일에 태어났다. 나이 18세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관음리에서 선친 김장수씨에게서 도자기 제조기술을 전수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예가 김정옥에서는 도예집안의 후예답게 남다른 정성과 노력으로 1991년 10월 22일 노동부가 시행한 산업별 명장 선정에서 도예부분 최초의 명장으로 선정됨은 우연하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자기수련과 끝없는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의 출생지인 관음리 중점마을은 그의 7대조부가 농사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생활용기인 사기그릇을 빚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한 때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반곡리, 경북 상주군 화북면 율곡리 등지로 옮겨지며, 그릇을 구워 팔던 그의 집안은 5대조 때에 다시 관음리 중점마을로 옮겨왔다. 조부 운희씨는 뛰어난 기량으로 소문이 나서 경기도 광주분원에 있는 조선왕조의 관요에 징발당해 일하기도 했으며, 많은 제자들도 양성했다. 그의 아버지 장수씨도 관요에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아무튼 7대를 이어온 도공집안이 우리 고장에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거니와 지금도 관음리에는 그의 큰형님인 천만씨의 아들인 김영식씨가 농사를 짓는 틈틈이 그릇을 굽고 있으며, 둘째형인 복만씨도 관음2리에서 흙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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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씨가 도예수법에 첫발을 디딘 것은 18세때 중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가마일을 도우면서 시작됐다. 얼마 안되는 농사를 지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백자류와 각종 다기류 만드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막사발 등 사기그릇은 어느 시장에 가도 형편없는 헐값에 팔리거나 아예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생활에 편리하고 보기도 좋은 플라스틱이나 양은그릇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으니 투박하고 잘 깨어지는 사기그릇들이 천대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화분·화병·항아리 등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아버지 밑에서 10년을 넘게 기술을 익혀온 그는 31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통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김정옥씨도 그의 재질을 인정받을 기회가 온 것은 역시 한·일간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일본인들의 발길이 잦아진 이후였다. 김씨가 만든 사발은 일본인들이 새미골사발이라 부르는 것으로 일본인들이 국보로 모셔놓은 다완을 재현한 것이다. 그가 일본에 가서 박물관을 찾았을 때 우리 조상들의 사기그릇이 보물로 모셔져 있는 것을 보고 많은 감흥을 받았다. 우리의 막사발에서 그들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12년전 관음리에서 현재 위치인 문경읍 진안리로 옮겨온 이후 전통자기의 재현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김씨는 다기류뿐만 아니라 분청사기와 백자계통의 대작들도 성공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문경읍 진안리 16번지 3번국도변에 위치한 영남요는 문경도예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민속도예의 현장으로 오늘도 그의 흙묻은 손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주요생산품은 다완 및 막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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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인 문경 영남요 백산 김정옥 선생(65)이 한국언론인연합회가 뽑은 올해의 자랑스러운 한국인에 선정됐다. 도예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김씨는 7대째 가업인 도자기를 빚고 있는 장인으로 1991년 도예명장, 1996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대표 도예인이다.
문경도예인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문경전통찻사발축제와일본, 미국 등의 전시회를 통해 한국 전통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려왔다. 지금은 아들인 경식씨가 8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http://www.mginews.co.kr/ArticleFile/2006123010633.JPG)
사진출처:문경 인터넷뉴스 문경 영남요 김경식 대표가 2006 중소기업청 신지식인으로 선정돼 중소기업청장이 주는 표창장을 29일 대구·경북지방중소기업청에서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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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