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문경시

[스크랩] 문경...희양산 봉암사(2)

임병기(선과) 2008. 6. 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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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내머리속에는 늘 토굴선방만 떠올랐다. 왜그랬을까? 올 수 없는 가람이기에 꿈꾸던 사찰 모습이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편의에 의한 순례 동선이 출발점인 여기에서 전각을 바라보는 순간 꿈이 깨어진 탓에 저으기 실망을 했으며 첫사랑은 품고 사는 것이지 만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뇌리를 스쳐가더라.

 

선암사 삼인당처럼 소나무 세그루가 제행무상,제법무아,열반적정의 가르침을 주려는 듯 청정하게 맞아주지만, 익숙치 않은 단체 행동에 우물쭈물 갈피를 못 잡고 대열에서 이탈하여 촌닭 시장에 나온듯 당황하여 눈을 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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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간

 

암기와, 수막새로 세워진 굴뚝이 멋스럽다. 남부지방에 비해 굴뚝이 높은 것은 연기 를 빨리 배출하여 난방을 효과적으로 하려는 것이다.초파일을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신도도 없을테고 주석하는 스님도 많지 않다는 것을 장독 숫자로도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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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도둑의 소굴이 될 터에 자리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으니 지극정성으로 산신을 모셔야 할 것이다. 단칸 전각으로 조붓한 산신각에 축서사 삼성각이 오버랩 되는 것은 경외일까? 비아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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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정면, 측면 한칸인 정방형 극락전은 겹지붕에 장식용 기와 대신 돌로 절병통으로 마감하였다. 사모.육모.팔모 지붕은 절병으로 마감하지만 절에서는 정병(淨甁)으로도 호칭한다. 일부에서는 초기 목탑지로 추정한다. 행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소풍나온 유치원생 처럼 행동한 탓에 전각안을 유심히 관찰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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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건축  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알려진 극락전은 견훤의 군사에 쫒긴 신라 경순왕 피난 왔을 때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전각으로, 수 차례에 걸친 봉암사의 대화재에도 소실을 면하였다.

 

다른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린 임진왜란에도 극락전만이 건재한 것은  "왜병들이 극락전에 불을 붙이기 위하여 불타는 장작개비를 지붕 위에 올려놓았더니 장작개비만 그냥 타버릴 뿐 신기하게도 극락전에는 불이 붙지 않아 왜병들이 극락전 소각을 단념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현재 극락전 내부에 어필각()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옥개 보수를 했는지 망와에 소화() 16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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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툇간

 

기단 면석이 창건시의 부재로 알려진 극락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사방에 설치된 세칸의 툇간이다. 이러한 독특한 참배 공간은 거의 유일한 예로 기억된다. 지극히 실용적인 기능을 엿볼 수 있는 구조이다.

 

여수 흥국사 丁자형 관음전도 사방에 툇간은 있지만 마루가 놓여졌으며 안동 개목사 원통전에도 전면에 툇마루가, 봉정사 대웅전에는 퇴주 없이 쪽마루만 깔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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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전


지증선사가 봉암사 창건시 중심은 어디였을까? 탑이 아니어도 누가보더라도 금색전으로 추측할 것이다. 실제로 대웅보전이 건축되기 전에는 금색전이 대웅전이었고 현판도 금색전 뒷편에 걸려 있다. 지증선사 비문에의하면 구산선문 사찰의 특징의 하나인 2기의 철붕중 1기는 금색전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의 하나인 지증대사 비에는 선종과 더불어 유입된 풍수관련 글들이 보인다. "지증대사가‘네 개의 처마기둥으로 터를 누르고, 철불로 사찰을 호위했다"는 비문은 풍수지리의 비보와 염승을 암시하는 문장이 분명해보인다.

 

봉암사터가 기가 너무 강해 비보책으로 탑을 조성하고 가람을 조성했으며 그냥 두었다면 도적의 소굴이 되었지 않았겠는가? 이로 미루어 구산선문을 개창한 개산조들은 도선국사처럼 풍수지리에도 혜안을 가졌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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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불

 

금색전 비로자나불이다. 부처를 모신 전각을 금당이라 하듯이 그곳에 봉안된 분이금색인(金色人)이며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웅전이든 금색전이든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인데, 근세에 조성하면서도 왜 비로자나불을 모셨을까? 동행한 신심 깊은 보살님들의 지극정성 참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전각내부를 들러지 않고 열려진 문틈으로 살짜기 한 컷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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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층탑

 

경북북부지방의 특징인 단층기단이며 한개 탱주가 보인다. 낙수면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는 수평이며 우동에서 가볍게 반전되었다. 풍수 비보책으로 조성되었다면 꽃술을 상징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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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부가 온전한 탑은 흔치 않다. 전쟁의 화마에서도 용케 살아 남아 심각(?)할 정도로 화려한 봉암사 에서 천년의 향기를 품고 있다.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수연.용차.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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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부재

 

이제 단체순례 분위기 파악도 끝났고 적당히 대열에서 이탈하여 혼자만의 즐거움을 향유할 눈치도 가진 우리 옛님들은 뿔뿔히 흩어져 보이지도 않는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흩어지고 일주문을 나서면 모이는 것이 각개 답사의 묘미지만 신기하게 사전 약속 없이 어느지점에서는 접선(?)한 후에 마주보며 피식 웃음지을 수 있는 동행인이 그리웁다.

45년전 선친의 손을 잡고 봉암사 나들이길에 저부재는 내눈에 무엇으로 보였을까? 아마 찐빵 또는 만두가 분명했다고 확신된다. 7살 아이의 기억 저편 퇴근길 아버지 자전거 뒤에 실려 있던 김이 모락모락 나던 찐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영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점촌. 집앞에 길게 늘어진 철길 철로위에 귀를 대고 기차가 접근하는지를 가늠하던 놀이, 힘샌 대장간 집 아이의 완력에 기죽었던 내모습, 풍로, 풀무, 일본식 가옥,찐빵집, 마중물로 퍼올렸던 펌프, 그런 모습이 대장간 가마에 활활 타오르던 푸른색깔을 띤 불빛처럼 또렸하다. 아버지 생전에 휠체어에 모시고라도 점촌 그리고 봉암사에 한번 모셔야했는데 답사내내 아버지 얼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많이 보고프고 그리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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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부재? 45년전이 지금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오던, 꿈꾸던 봉암사 풍광과 너무나 거리감이 느껴져 실망감을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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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을 맺었던 스님들은 머얼리 아주 멀리 돌아오지 못할 만행을 나섰지만 아름다왔던 시절을 이렇게라도 후세에 전하고픈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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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거대한다. 봉암사 만이라도 불사를 비켜가기를 바랐는데 특별선원과 부조화라는 생각은 나만의 아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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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도 최근에 불사를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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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선원

 

토굴은 아닐지라도 텁텁한 분위기의 선방을 그렸는데, 와인 향의 선원이었다. 우리나라 제일의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납자들이 용맹정진하는 수행도량인지라 담너머로 바라보아도 조심스럽기만 했다.  

 

直指人心 見性成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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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그리며 먼 하늘을 바라볼까?

먼저 인연을 지으신 성철, 청담, 자운, 향곡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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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하게 산사를 감돌던  극락전 추녀끝 풍경소리 여운만....


2007.8.26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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