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화성시

화성...용주사

임병기(선과) 2009. 4. 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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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사에서 용주사는 지호지간이었다. 하지만 창원에서 출발 어젯밤을 수원에서 보내고 수원화성 투어중인 유현과 약속 시간을 당겨 잡아 마음이 조급했다. 천왕문 앞에서 도킹하여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식당을 찾았지만 용주사 근처에는 음식점이 없었다. 앎의 허기짐 보다 더 감내하기 힘든 인간적인 배고픔이건만 발길은 용주사를 들어서고 있었다.

 

사찰정보에서 창건 내력를 살펴보자. "용주사(龍珠寺)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의 능사(陵寺)로서 1790년에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실질적 창건이라고 할 만하다. 절이 세워진 자리는 신라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다.
 
정조가 처음 절을 짓고자 장소를 물색하였는데 당시의 신하들이 이 갈양사터가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고 하였다. 이에 이곳에 절을 새우고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게 하니, 비로소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된다.
 
갈양사터는 천여 년 전인 신라시대 때 이미 부처님의 복전(福田)이 가꾸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다만 신라 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廉巨, 또는 廉居, ?~844)이 창건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용주사 천왕문은 가장 일반적인 배치로 사찰측에서 보아  좌측부터 비파-동방 지국천. 칼-남방 증장천. 용과 여의주-서방 광목천. 삼지창과 탑 -북방 다문천이 외호하고 있다. 천왕문부터 외삼문까지의 공간이 가장 낮은 권역이며 효행박물관이 들어서있다. 

 

 

효행박물관 앞 오층석탑. 위치로 미루어 이건되어 온 석탑으로 2기단, 오층탑으로 고려시대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두어기 석탑의 조합으로 보이며 5층은 복원된 듯하다.

 

 

하기단에는 네면에 안상과 귀꽃이 피어있으며 상기단에도 문비(?)가 보인다.

 

 

옥개받침은 1~3층은 4단, 4~5층은 2단이다.

 

1층 몸돌 앞뒤면에 문비와 자물쇠를 양각하여 이채롭다

 

홍살문

 

용주사는 산지 중정의 영남지방 사찰. 평지 가람의 호남사찰에 익숙한 객에게는 혼돈을 초래하기에 충분한 구조로 효행박물관을 나와 외삼문으로 방향을 잡으면 향교. 서원. 사당처럼 홍살문이 마주한다.

 

홍살은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용주사 홍살문은 신성공간이라는 의미 외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에 사도세자 위패를 모셨기 정조의 원찰이라는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다.

 

용주사 자료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경의황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외삼문의 죽농 안순환의 용주사 현판

 

외삼문

 

용주사에서는 향교나 대가집 솟을삼문처럼 사찰에 유례가 없는 외삼문과 옆으로 길게 행랑이 달려있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사도세자의 재궁(齋宮), 즉 능사(陵寺)로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 있는 것은 삼문 양편에 두 마리의 해태상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화재 예방이라는 비보책으로 조성되었겠지만 익살스러운 표정이다.

 

 

외삼문에 천보루로 이어지는 용주사 가람배치의 두번째 단 천보루 앞 석탑. 역시 제위치인지 의아스럽다.사이에 있다. 단층 기단의 오층석탑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 스님이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몸돌에는 우주가 보이고 상륜에는 노반.복발,앙화.보주가 남아 있다.

 

 

천보루.하늘이 보호한다는 루대이다. 대웅전으로 누하 진입 공간으로 다른 사찰과 달리 석주이며, 용마루 뿐만 아니라 합각마루에도 용두를 올려 다른 사찰과 차별를 염두에 둔듯한 구성으로 왕실과 관련성을 함축한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층루 바깥쪽에 쪽마루를 설치한 것은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구조이다. 

 

천보루 좌우 전각은 나유타료(승방) 및 만수리실(선당)로 알려져 있으며 천보루 용마루 용두 처럼 장방형의 네벌기단을 사용 일반민가와 차별화 되었다. 천보루와 좌우 건물은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산지가람 口자 배치의 전형이다.

 

천보루 좌측 나유타료의 장방형 네벌 기단

 

 

대웅전 계단의 소맷돌

 

 

용주사의 세번째 대웅보전 구역. 다른 사찰과 달리 기단위 좌우에 노주석이 설치되어 있다. 1790년에 조성한 전각으로 정측면 3*3칸 겹처마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천보루와 같이 합각마루에도 용두로 장식했다.  다른사찰과 달리 좌우에 단칸전각속에 법고와 범종을 설치하였다.

 

대웅보전과 법고각(앞)과 멀리 범종각

 

 용주사 답사 동선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가 대웅보전 후불 탱화이다. 하지만 오늘은 제를 주관하시는 스님의 염불 대문에 감히 법당에 출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문화재청 자료를 가져오니 우리님들 답사시에 참고하길 바란다.

 

문화재청 사진

 

조선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사(陵寺)로 중창한 용주사의 대웅전에 후불탱화(불상 뒤에 모셔두는 불화)로 봉안되어 있는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1745∼?)가 그렸다고 구전되어온 것이다. 정조 14년(1790)에 전국 각지에서 각 분야별로 이름난 명장(名匠)들을 불러모았는데『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어(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御)』에는 '대웅전보탑불탱삼세여래체화원정풍현감김홍도(大雄殿寶榻佛幀三世如來體畵員廷豊縣監金弘道)'라고 하여 이 후불탱화가 당시 연풍현감인 김홍도의 작품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밑단에는 일반적인 불화의 형식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화기(畵記)가 적혀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식적으로도 김홍도의 화풍과 차이가 커 김홍도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그림은 길이 320㎝, 폭 270㎝ 크기의 화면을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상단 중앙에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측에 과거불인 약사불, 우측에 미래불인 아미타불의 삼세불을 모시고 그 주변과 하단에는 10대 보살, 가섭(迦葉)과 아난(阿難), 나한(석가의 열반 후, 미륵불이 올 때까지 불법 수호의 사명을 위임받은 성자들)들, 사천왕 등을 배치하여 일반적인 석가삼세불화의 특징인 군집도 형식군(群集圖 形式)을 취하고 있다. 또한 각 존상(尊像)들의 얼굴은 모두 중앙의 삼세불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어 원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삼세불의 표현은 잘못 되었지만 인용한 글이라 그대로둔다) 

 

채색은 삼세불의 법의(法衣)와 석가의 광배(부처나 보살의 머리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조형화한 것으로 두광과 신광이 있다)에 홍색을 칠하고 대좌(부처·보살·천인·승려 등이 앉거나 서는 자리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불상을 안치한다)는 청연화(靑蓮花)로 표현해 청홍(靑紅)의 대비를 보인다. 인물들의 얼굴과 드러난 신체 부분에는 갈색빛이 감도는 살색을 썼는데, 코를 비롯한 앞으로 나온 부분은 백색으로 처리했고, 두광에는 어두운 녹색을, 기타 부분에는 간간이 흑색과 백색을 섞어 썼다.

 

필선(筆線)은 비교적 딱딱한 편이나, 모든 존상의 얼굴과 손에 서양화의 음영법(陰影法)을 구사했는데, 이렇듯 조선 후기 불화로서 독특한 음영법을 구사한 경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보이는 특징으로 주로 이 시기에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화파(畵派)의 작품들에 보이는 표현수법이다. 또한 용주사 대웅전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그려진 칠성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김홍도가 그렸던 원래의 후불탱화가 아니라 조선 말에 이를 모본삼아 다른 화승(畵僧)이 새로 제작한 그림일 것으로 추정된다.

 

 

 

용주사 범종.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신라시대 동종인 에밀래종.상원사종의 계보를 잇는  고려 초기의 범종으로 볼록한 유두로 미루어 상원사 계열으로 보인다.  상.하대가 분명하고 종신에는 전 후에 비천을 새겼고 그 사이에 연화대좌 위에 삼존불을 모셨다.

 

용통이 보이고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이다. 종신에는 주조연대(854년)를 새겼으나 854년은 신라 문성왕 재위기간으로 종을 제작 후 후대에 새긴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부모은중경 탑으로 효행박물관과 더불어 정조의 효행을 기린 탑이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세운 호성전 내부 위패. 호성전에는 사도세자,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 위패다.

 

 

지장전 현판은 왜 세로일까?

 

 

시방칠등각. 독특한 전각으로 삼성각처럼 산신.칠성.나반존자를 모셨다.  시방(十方)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상,하이며, 칠등(七燈)은 칠성, 즉 북두 칠성을 의미하여 결국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라 하겠다.

 

 

전강선사부도비. 전강선사(田岡禪師, 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이다. 입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주사 대중들에게 크게 추앙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강선사의 속성은 정(鄭) 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오랜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 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전강선사는 만공선사(滿空禪師)를 찾아갔다가 더욱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처음에는 만공선사로의 인가를 받지 못하다가 재발심을 하고 다시 정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전법게(傳法偈)를 전수 받으면서 선종 제77대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이후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였다.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하고 용주사 선풍 진작에 크게 공헌하였다.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조실을 역임한 전강선사는 1975년 1월 13일 좌탈입망(座脫立亡)하였다. 전강선사는 특히 수행자들을 위한 수많은 설법 테이프를 남겨 놓았으며, 『전강법어집』이 제자들에 의해 출판되면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가득한 가람 용주사. 우리님들도 향을 가슴에 품고 부모은중경을 음미해보길 빈다.

 

<< 첫째는, 아이를 잉태하고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 >>

       여러겁에 인연이 지중하여
       금생에도 어머니 태에 의탁했네.
       달이 차서 오장이 생겨나고
       일곱달이 접어들어 육정이 열리었네.
       몸이 무겁기는 산과 같고
       움직일 때마다 바람 재앙 두려우네
       비단옷은 걸쳐볼 생각조차 없고
       단장하던 경대에는 먼지만 자욱하네.

<< 둘째는, 낳으실 때 고생하신 은혜이다 >>  

       아이를 잉태한지 열 달이 지나면
       어려운 해산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네
       하루하루 중병 든 사람 같고
       하루하루 정신마저 혼미하네
       두렵고 겁난 마음 무엇으로 형용할까
       근심은 눈물되어 가슴속에 가득하네
       슬픈 생각 머금고 어른에게 아뢰되
       이러다가 죽지 않나 겁난다고 하네.

<< 셋째는, 자식을 낳고 근심을 놓으신 은혜이니 >>

       자애로운 어머니 그대 낳던 날
       오장육부 그 모두가 찢어지는 듯
       몸과 마음 모두가 끊어졌네
       피를 흘려 놓은 자리 짐승 잡은 듯
       갓난아이 건강하다는 말을 들으면
       기쁘고 기쁜 마음 무엇에 비유할까
       기쁨도 잠시요 슬픔이 다시오니
       산후의 고통이 온 몸에 사무친다.

<< 넷째는,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먹여주신 은혜이니 >>

       무겁고 깊은 것은 부모의 은혜이니
       보살펴 주시는 일 때를 잃지 않는다
       단 것은 다 뱉으니 잡수실게 무엇이며
       쓴 것은 삼키셔도 얼굴하나 변치않네
       사랑하심 무거워 정을 참기 어려워라
       은혜 더욱 깊으시니 슬픔이 더욱 더하구나
       아기 배부르기만 바랄뿐
       자애로운 어머니는 굶주림도 마다 않네.

<< 다섯째는, 마른자리 아이 주고 젖은 자리로 나아가는 은혜이니 >>

       어머니 자신의 몸은 젖은데 누우시고
       아이는 받들어 마르자리 눕히시네
       어머니 젖으로는 아기 배를 채워주고
       고운 옷소매로는 찬바람 가려주네
       사랑의 정성으로 잠조차 잊으시고
       아이의 재롱으로 기쁨을 다 하시네
       오직 어린 아기 편안함만 생각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편안함을 원치않네

<< 여섯째는,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이니 >>

       어머니의 높은 은혜 땅과 같고
       아버지의 높은 은혜 하늘과 같네
       하늘과 땅의 은공이 균등하듯이
       부모님의 은혜도 그러하여라
       두눈이 멀었어도 개의치 않고
       손과 발이 불구라도 싫어하지 않으시네
       내 속에서 태어난 자식이기에

<< 일곱째는, 더러운 것을 씻어주신 은혜이니 >>

       생각하면 그 옛날의 아름다운 그 얼굴과
       아리따운 그 자태는 곱기도 하였어라
       두 눈썹은 버들잎 같고
       두 뺨은 연꽃보다 붉었는데
       은혜가 깊을수록 아름다운 자태 없어졌고
       세탁하시느라 곱던 얼굴 상하셨네
       오로지 자식만을 사랑으로 거두시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얼굴 모습 바뀌셨네
       종일토록 아끼시고 귀여워하네

<< 여덟째는, 멀리 떠나면 걱정하시는 은혜이니 >>

       죽어서 헤어짐도 잊기 어렵고
       살아서 헤어짐도 아프고 서러운 것
       자식이 집을 나가 타향에 가 있으면
       어머니의 마음도 타향에 가 있다네
       밤낮으로 마음은 자식에게 가 있고
       흐르는 눈물은 천 줄기 만 줄기
       원숭이가 새끼 찾아 슬피 울듯이
       염려하는 마음은 간장을 끓는다네

<< 아홉째는, 자식을 위하여 궂은 일을 하신 은혜이니 >>

       아버지와 어머니는 강산보다 중하오니
       깊은 그 은혜는 정말 갚기 어려워라
       자식의 괴로움을 대신 받기 원하시고
       자식이 고생하면 부모 마음 편치 않네
       자식이 먼 길 간다는 말을 들으시면
       집 나간 밤부터 단잠을 설치시네
       자식들은 잠시동안 괴로운 일 당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오래도록 아프시네

<< 열째는,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시는 은혜이니 >>

       부모의 크신 은혜 깊고 무거우니
       베푸시는 크신 사랑 그칠 새가 없다네
       앉거나 섰거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가깝거나 멀거나 생각 항상 따라가네
       어머니 연세 백살이 되어도
       팔십도니 그 자식을 항상 걱정하네
       이 같은 부모 은혜 언제나 그칠런가
       두 눈을 감아야 비로소 다하려나

200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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