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충주시

[스크랩] 충주...추평리 석탑. 백운암 철불

임병기(선과) 2008. 9. 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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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문화재 이정표는 길가게 서 있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시야에 석탑은 보이지 않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라 내가 환장하겠다. 외딴 집으로 향했더니 손바닥 만한 멍멍이 놈이 악다구니를 부려 발로 걷어차고 싶었다. 다행이 마당에 나와 계시는 분에게 탑 행방을 여쭈었더니 시커멓게 차양막이 가린 곳을 가리킨다.

 

참 한심한 충주시청이다. 우리나라 지자체중 문화관광 행정과 열정이 남달라 보였는데 찾는 사람이 적다고 이런 자태를 보이는지 외진 곳은 팽개쳐버리는지 답답하기 그지 없다. 집주인에 의하면 작년 겨울에 탑을 해체했다고 했지만 해체 보수와 관련된 어떤 안내판도 없다.

 

당장이라도 충주시청 홈페이지 문화관광 게시판에 보수중임을 공지하여 비싼 발품 팔아 헛걸음 하지 않도록 해야하며 현장에도 보수 일정, 보수 내용을 알림은 물론이고 기존 탑 사진이라도 설치 해두는 작은 노력이 절실하다. 답사기는 아래 문화재청 사진, 글로 대신한다.

 

충주추평리삼층석탑...문화재청
 
추평리(楸坪里) 탑평(塔坪) 마을에 위치하며 탑 주변의 경작지와 인근 민가일대까지 주초석과 많은 기와들이 나오고 있다. 또한 추평리사지의 암자로 추정되는 뒤쪽 8부 능선상에도 많은 기와가 확인되고 있다. 사명(寺名)은 밝혀진 바 없으나 자기(磁器)와 고려시대 와편(瓦片)들이 상당량 출토되고 있어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 축조된 탑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 사지(寺址)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엄정사(嚴政寺)’일 가능성이 크나 현재로선 확인할 수는 없다. 절터는 3층석탑이 있는 주변과 인근 민가일대까지 포함되는 약 3,000평 규모로 추정된다.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갖춘 ‘일반형석탑(一般型石塔)’으로 2매로 조립된 갑석(甲石) 위에 초층 탑신이 안정감있게 올려지고 탑신의 양쪽에 우주(隅柱)가 정연하게 모각(模刻)되었다. 낙수면은 급하며 옥개(屋蓋)에는 전각(轉角)의 반전이 있으며 탑신괴임은 생략되었다. 옥개의 양쪽 끝에는 풍경원공의 흔적이 또렷하고 층급받침은 모두 4단이다. 상륜부에는 복발(覆鉢)로 보이는 부재(部材)가 남아 있다. 탑은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갖춘 일반형의 석탑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3층까지 남아 있다. 탑 주변에서 토기편 외에 수막새기와, 백자발 등 다량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충주 추평리삼층석탑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고려시대에 건조된 일반형 석탑으로 주변일대에서 수습되는 자기(磁器)와 와편(瓦片)으로 보아 고려조에 번창했던 사찰(寺刹)로 추정되며 탑신(塔身)의 우주(隅柱)표현, 전각(轉角)의 반전으로 보아 신라시대 양식을 이어 받으면서 다소 변형된 고려초기 탑의 양식을 고찰할 수 있는 석탑으로 보존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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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암

 

보물이며 충주 3대 철불로 알려진 백운암 입구에도 암자에서 세은 작은 안내판만 보인다. 백운암은 윤씨 성을 가진 무당이 여대감 진령군이 되어 현몽에 따라 민비에게 청하여 창건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해 온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노은 국망산 아래 신흥동으로 피신해 있던 민비는 서울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인근 백운봉 아래에점술이 귀신처럼 신통하다는 파평 윤씨 무당이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민비는 그 영특함을 시험하기 위해 초라한 옷을 입고 시녀를 물린 후 무당의 집을 방문하였다. 바깥을 내다보던 무당이 민비를 보자 버선발로 뛰어나와 마루에 모신 후 무릎을 꿇고 부복하였다. 민비는 시치미를 떼며 괴히 여기는 체하였지만, 무당은 기어코 국모임을 밝혀내었다.

 

민비는 사실이 드러나자 무당에게 굳게 입을 다물게 하고 앞으로의 국가정세와 자신의 신상에 대해 물었다. 무당은 환궁날짜를 상세히 일러주며, 본궁에서 기다리던 기별이 있을 것이라 당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양에서 고종의 파발이 도착해 민비는 물론 주위 사람들이 탄복하게 되었고, 이후 그 명성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그 후 무당은 민비의 소환을 받아 "진령군 여대감"이라는 작호를 받게 되며, 민비를 등에 업고 많은 재물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진령군의 꿈에 백의를 입은 철불이 나타나, 백운봉 동쪽 언덕에 집을 지어 모셔달라는 상서러운 꿈을 꾸었다. 따라서 민비의 도움으로 이곳에 절을 짓고 산이름을 따라 ‘백운암‘이라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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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충주철불좌상, 단호사 철불좌상과 함께 백운암 철불은 충주 지방의 3대 철불로 알려져 있다. 지근 억정사지에 전해오던 철불로 나발, 작은 얼굴, 근엄한 표정이다. 우견편단, 삼도, 항마촉지의 수인이며 결가부좌의 자세는 안정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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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동네 경로당에서 뵈은 할머님은 백운암 위치를 묻는 나를 향해 맨발로 나오시며 산자락을 가리키시며 소원 들어주시는 부처님이 계신다고 흥바람으로 설명하셨다.

 

그런 할머님에 마음 속에 자리잡은 불상은 참으로 행복 한 부처이다. 억만금 보시하여 중창불사하고 개금하는 화려한 외양보다 촌부의 한자루 초와 향공양이 더욱 값진 정성이고 공양이다. 그런 보살님을 만나고 계시는 백운암 비구니 스님도 한 말씀 한 말씀이 너무 따뜻했다. 스님 다음에는 꼭 차 즐기고 가겠습니다.()()() 

 

2008.08.08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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