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충주시

[스크랩] 충주...억정사 대지국사비.경종대왕 태실

임병기(선과) 2008. 9. 2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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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정사 대지국사비. 멀리 전각이 보인다. 비석마을에 보이는 전각 네비게이션이 알려주지 않아도 나의 애마는 잘도 굴러 간다.억정사지에 세워진 대지국사의 부도비(?)다. 그럼 부도는 어디로 갔을까? 방형 받침 위에 비신을 세웠다.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 비신 처럼 귀접이 즉 규수가 보이며 이는 고려 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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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국사는 고려말 승려이며 비는 입적후  조선 태조 2년(1393) 세웠다.

 

비문 전문을 가져오니 우리님들 답사시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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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州 億政寺大智國師智鑑圓明塔碑


大智國師碑銘(篆題)
有明朝鮮國忠州 政禪寺故高麗王師諡大智國師碑銘 并序
嘉靖大夫藝文春秋館學士都評議使司使兼成均大司成臣朴宜中奉 敎撰
近世有大沙門曰大古早悟玄旨叅歷四方至湖州霞霧山受達摩二十八代嗣祖淸珙禪師印可嗣派東還弘
揚其旨弟子甚衆不可勝計
其才高氣邁豪爽卓越者固不爲少而大智國師尤其傑然者也 師諱粲英字古樗號木菴俗姓韓氏考楊州人司僕直長諱績妣郭氏淸
州人膳官署丞諱永潘之女以泰定戊辰正月八日誕焉年十四遊于漢濱望見三峯屹立超然有出世志投重興圓證國師祝髮受法五年」
卓然有成造淨慧國師赴叢林升迦智山下第二座選充行謳名出行輩又叅楡岾守慈和尙薰陶未幾己飽禪悅登庚寅九山選上上科癸」
巳又魁䛒師科時國一智嚴尊者相之曰此子當爲王者師矣尋住大興寺歎曰出家而爲住持非吾素志也
遂拂衣入小雪山以究明一大」
事爲期至三角山住三夏己亥春 玄陵召致之敬其法奇其貌歎賞不己稱爲碧眼達磨又以僧錄司所繫甚重不可處以冗僧乃選於釋」
林以 師爲兩街都僧錄大師典其司數年 師辭之甚懇許之厥後累承特命歷住石南月南神光雲門䓁寺所至輒演禪那弟子彌衆壬」
子春 王邀置于內院賜號淨智圓明無礙國一禪師又賜金襴迦棃衣鉢及妙筆觀音大士以致敬重之意甲寅春 玄陵賓天 師欲遁世新 王勉 之仍命住迦智寺特加禪敎都摠攝淨智圓明妙辯無礙玄悟國一都大禪師歲丁巳固辭不允遂入實盖山抗書謝病而去」
明年住迦智又明年住太子山皆承特旨也壬戊春去之淸凉舊方丈居焉王慕之彌篤以癸亥三月乙丑冊命爲 王師大曹溪宗師禪」
敎都摠攝圓明佛日明辨大智祐世利生普濟無礙都大禪師妙辯智圓應尊者仍備儀遣使邀安于忠之億政其燕居常以禪書敎之來學」
客至則便擧以示之笑曰此吾日用也歲甲子樹碑于重興寺以記圓證國師之德行可謂有美而能傳者矣明年乙丑 王邀至于廣明寺」
事之益謹歲戊辰 幼君嗣位遣還印章于師復以先君所事者事之是年十月移錫于興聖寺三以疾
辭明年二月 王專使護行復安于
億政 恭讓君卽位之明年庚午卑辭遣使邀至于京城將冊命爲師時臺諫有斥異端之議 師乃色斯擧矣 王勉留懇至歸志浩然勞
莫可遏乃遣知申事李行慰諭之且曰秋當相面以償素志 師曰僧之前程不遠伊邇秋來當不獲奉面矣又遣中使賷香護行 師曰▨」
蹤水性野人家風 上何拳拳如是其至耶遂如億政以羪聖胎一日謂門人曰吾今年數己竆殆不可久於世因指方丈西隙地曰此吾▨」
緣所在也宜置壽堂其亟構之門人卽命工督之工旣訖 師感疾越是年六月二十八日告于衆曰今日吾當脫殼漏子矣遂賦古德頌曰」
卽此見聞非見聞無餘聲色可呈君箇中若了全無事體用無妨分不分 師云此便是吾偈也門人更請 師曰贅上附贅作麽直饒更作」
千偈吾意不越是矣還信得及麽言訖北首下右脇寂然而逝以禮闍維塔于寺之東崖壽六十三臘四十九 王聞訃追悼致賻厚贈諡曰」
智鑑國師塔曰慧月圓明 師儀表魁偉器局宏深性敏而行峻色厲而言温口不臧否形無喜慍人之舊惡不以爲念雖有仇讎勿滯于懷」
人以是多之凡九歷名藍三加法號受兩 王凾丈之禮承二代贈諡之寵是其德行無愧於古人而可銘也恭惟」
主上殿下卽位之初彰善癉惡作則垂法而於 師薨四年追慕其德行更諡曰大智國師塔曰智鑑圓明仍 命臣宜中銘其碑 師之德行」
見信於世於此益可見矣臣竊念臣於至正丙申錄圓融府事値 師入侍于其府因得內交焉是於其銘義所不辭況禀之」
上命乎臣雖不敏敢不拜手稽首而銘之其詞曰 卓爾 大智天賦之資惟質之美玉絶其玼惟學之博海無其涯恢恢其量皎皎其儀釋林」
之秀祖室之榰淵乎智嚴先事而期允矣 恭愍歎貌之奇源于大古道不多歧律以百丈動必中規德日益進名日益熈承聞于」
上乃作之師 君篤敬止民咸仰之法乳斯普品彙以滋慧晷忽隱餘輝莫追世既云遠人孰我知是用作
銘以識于碑凡百來哲尙監于茲」
前內願堂判曹溪宗事禪敎都摠攝慈興慧照國一都大禪師兼判僧錄司事臣旋 奉 教
書幷篆額
洪武二十六年癸酉十月 日門人大禪師中允立石 惠公刻
門徒
大禪師
釋希 中允 乙珪 景松 天冒 善濡 天雨 省文 師智 淸裕 法海 竟自
小禪師
省珍 竺闌 印生 心印 道修 意正 信玄 洪坦 惠㞐 定厸 智瑚 向信 惠澄 乃珪
智仍 仁照 定宜 惠齊 行澄 洪誼 乃澄 明浩 仁冏 凉原 克澄 尙文 宗海 海
仍 尙田 覺倫 意原 萬雄 宗喜 衍嚴 文遠 誼聞 法性 尙忍 學賁 勝安 惠淵
斯近 善能
中德
智寬 禪皓 惠闌 省敏 乃乳 衍田 省敦 德琛 釋崇 䪺和 淸信 志川 衍璘 斯敏
克如 可松 尙其
大選
衍海 義天 正藏 善南 省如 了衡 當午 處雲 哲南 守全 省南 斍益 省樞 戒然
戒天 達禪 尙令 克誠 定通 乃令 雪牛 惠登 慈淑 性哲 衍瑚
雲水
衍玄 正安 達心 海印 信溫 玄和 達修 延圭 雪仍 斍如 達芬 正因 六空 止川
明訓 圓信 雪祥 達令 衍具 正閑 雪栖 了 斯牧 永超 法 信仍 戒行 意
禪 惠度 普惠 惠門 曇順
叅學
尙雄 道原 覺異 鴻規 雪尹 惟善
俗門徒
判門下洪永通 門下侍中李穡 侍中沈德符 判開城禹仁烈 政堂文學朴形 奉翊朴德公 右司
尹閔由誼 判事孫敬時 左諫議李滉 左尹韓介臣 軍器監郭拯 摠郞李芳茂 摠郞李陽實 外
正朴尙文 外正李漬 前通州鄭之道 祗候崔湜 都事趙啓生 禮賓卿金璫 校勘鄭之稚 及第
李擔及第崔沆 進士韓臯
安墖別監
祗侯金輊
建碑管事員
兩街都僧錄大師尙柔 州住崛山寺禪師斯近 州住廣林寺中德衍璘
忠州
牧使李希桂 判官安智寶

 

 

大智國師碑銘 (篆題)
有明朝鮮國 忠州億政禪寺 故高麗王師 諡大智國師碑銘과 아울러 序文
嘉靖大夫 藝文春秋舘學士 都評議使司使 겸 成均大司城 臣 朴宜中은 王命을
받들어 碑文을 짓다.

近世에 큰 스님이 있었으니, 그의 호는 太古이다. 일찍이 玄旨를 깨닫고, 四方으로 두루 다니면서 善知識을 親見하다가 중국으로 遊學을 가서 湖州 霞霧山 天湖庵에서 달마대사의 28代 法孫인 石屋淸珙禪師로부터 法을 이어받고 귀국하여 그의 宗旨를 크게 떨쳤다. 그의 弟子가 매우 많아서 그 數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제자 중 재주가 뛰어나고 氣像이 고매하며 豪爽하고 卓越한 이가 참으로 많았으나, 그 중에 大智國師가 더욱 傑然하였다.


스님의 휘는 粲英이고 字는 古樗이며, 호는 木菴이다. 속성은 韓氏이며 아버지의 諱는 績이니 楊州 사람으로 司僕直長을 역임하였고, 어머니는 郭氏이니, 淸州 출신으로 膳官署丞인 永潘의 딸이다. 泰定 戊辰年 1월 8일에 탄생하였다. 14살 때 서울로 유람차 왔다가 三角山三峰이 우뚝 서서 超然함을 바라보고, 出家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삼각산 重興寺 圓證國師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고 스님이 되어 法을 배웠다. 5년만에 卓然히 깨친 바가 있어 淨慧國師를 친견하고, 총림으로 가서 迦智山제 2座가 되었다. 그 후 選拔되어 行謳에 충원되었고, 名望으로는 修行輩中에서 뛰어났다.


또 楡岾寺 守慈和尙을 親見하고 그의 會下에서薰陶받았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禪旨를 크게 깨달았다. 庚寅年 九山禪門의 승과고시에 應試하여 上上科에 합격하였고, 癸巳年에는 또 功夫選科에 으뜸으로 합격하였다. 그 당시國一智嚴尊者가 스님의 관상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王의 스승인 王師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얼마 있다가 大興寺의 주지가 되고 나서 탄식하기를 “出家하여 住持가 되는 것은 내가 出家한 本意가 아니다”라 하고, 드디어 주지직을 떨쳐 버리고 小雪山으로 들어가 一大事인 見性을 기약하였다. 三角山으로 가서 3년간 머물렀다.


己亥年 봄에 공민왕이 궁중으로 招致하여 스님의 法力을 공경하고, 그의 容貌가 奇異함을 찬탄해 마지 않고 碧眼達磨라고 칭하였다. 또 僧錄司에 繫屬시키고 매우 존중하면서 스님과 같은 이는 一般的인 冗僧과 같이 대우해서는 안된다면서 釋林에서 선발하여 스님을 兩街都僧錄을 맡게 하였다. 스님은 이 직책을 數年間 맡고 있다가 간절히 辭意를 표하여 允許를 받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特命을 받아 石南·月南·神光·雲門 等寺의 주지를 역임하였는데 就任하는 곳마다 禪那를 講演하여 弟子가 더욱 많아졌다.


壬子年 봄에는 공민왕이 內院으로 맞아들여 “淨智圓明 無礙國一禪師”라는 호를 올렸고 또 金襴비단으로 만든 가사와 바리때 및 妙筆과 觀音大士像 등을 선사하여 지극한 精誠을 보였다. 甲寅年 봄에 공민왕이 崩去하자 스님은 世上을 피하여 山中에 은둔하고자 하였으나, 新王이 간곡히 만류하며 迦智寺 주지로 임명하고, 특별히 “禪敎都摠攝 淨智圓明 妙辯無礙 玄悟國一都大禪師”라는 贊號를 첨가하였다.


丁巳年에 이르러 완고하게 사양하였으나 允許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드디어 寶盖山에 들어가서 편지를 올려 病을 핑계대고 떠났다. 그 다음해인 1378년에 迦智寺 주지로 있다가 또 그 다음해에 太子寺의 주지로 있었으니, 이는 모두 王의 特旨를 받들었던 것이다. 壬戌年 봄에는 淸凉山으로 가서 옛 方丈室에서 지냈는데, 王의 欽慕함이 더욱 돈독하였으므로癸亥年 3월 乙丑日(22日)에 王師로 책봉하여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圓明佛日 明辨大智 祐世利生 普濟無礙 都大禪師 妙辯智 圓應尊者”라는 칭호를 드리고, 예를 갖추어 使臣을 보내어 忠州 億政寺로 맞이하였다. 스님은 日常에는 언제나 禪書로써 後學을 가르쳤으며, 客이 찾아 와서 법을 물으면 문득 이 禪書를 들어 보이고 웃으면서 答하기를 “이는 나의 日用事이다”라고 하였다.


甲子年에는 重興寺에 太古圓證國師의 비를 세워,국사의 德行을 記刻하였으니, 참으로 美德이 있어 능히 後世에 널리 傳할만한 偉業을 남기신 분이라고 할만 하다. 다음해乙丑年에 禑王이 스님을 廣明寺로 모시고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돈독하였다.戊辰年幼君이 寶位를 계승하게 되었다. 스님은 또 新王에게 王師의 辭退書와 印章을 還納하였으나, 幼君인 昌王은 이를 다시 스님에게 돌려보내고 다시 先王이 섬기던대로 王師로 섬겼다. 그리고 그 해 10월 興聖寺로 옮겨 주석하며너, 세 번이나 병으로써 辭意를 표하였다.


다음해 2월 王이 專使를 보내서 護行하여 스님을 다시 億政寺로 모셨다. 恭讓君이 卽位한 다음해인 庚午年에 謙遜한 말로 편지를 써서 사신을 보내어 京城으로 맞이하고 國師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당시 臺諫으로부터 異端인 佛敎人을 국사로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배척하는 上疏가 있었다. 스님은 이 일을 알고 강력히 거절하였다. 王도 또한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스님의 돌아가려는 뜻은 浩然하여 도저히 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知申事李行을 보내어 위로하기를 “다가오는 가을에 다시 만나 본래의 뜻을 나눕시다.”라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小僧은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가을에 다시 온다 해도 서로 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中使를 시켜서 香을 하사하고 護行토록 하였으나, 스님이 이르기를 “나의 자취는 흐르는 물과 같고 野人의 家風이므로 모실 必要가 없거늘 主上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拳拳하며 이처럼 극진히 보살펴 주시는가”라 하고 드디어 億政寺로 가서 조용히 聖胎를 頤養하였다. 어느 날 門人에게 이르기를 “나는 올해 壽命이 다 할 것이다.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라 하고, 곧 方丈室 西쪽 중간 지점을 가리키면서, “여기가 나와 因緣이있는 곳이니, 마땅히 여기에 나의 壽堂을 짓되, 급히 서두르라.”라고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문인들이 곧 木手를 불러서 命하고 감독하여 준공하였다.

 

스님은 병을 얻어 그 해 6월 28일 大衆에게 이르기를 “오늘 내가殼漏子를 벗어 버리고자 한다.”라 하고 드디어 古德의 頌을 읊어 이르기를 “곧 이 見聞이 見聞이 아니므로 이것 밖에 어떤 聲色으로도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 이 가운데서 만약 전혀 無事한 理致를 안다면 주관인 體(정신)와 객관인 用(육체)이 나누어지든 나누어지지 않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면서 “이것이 곧 나의 偈頌이다.”라고 하였다.


門人이 다시 臨終偈를 청하였더니 스님이 이르기를 “혹 위에 다시 혹을 붙여 무엇 하겠는가? 다시 이 밖에 千萬偈頌을 짓는다 하여도 나의 뜻은 이것을 뛰어 넘질 못할 것이니, 나의 말을 믿겠는가?” 라 하였다. 말이 끝나자 마자 北쪽으로 머리를 向하고右脇으로 西쪽을 보면서 누워서 조용히 入寂하였다. 화장을 마치고 億政寺의 東쪽 언덕에 탑을 세우고 遺骨을 봉안하였으니, 세수는 63세요 법랍은 49夏였다. 王이 訃告를 듣고 追悼하면서 敦厚한 賻儀를 보내고, 시호를 智鑑國師, 탑호를 慧月圓明이라 追贈하였다.


스님의 儀表는魁偉하고 器局은 넓고 깊었으며 性品은 민첩하고, 行動은 峻嚴하였다. 얼굴은 근엄하지만 말씀은 溫和하였고, 입에는 남의 잘하고 잘못하는 일을 言及하지 않았으며, 얼굴에는 기껍거나 不滿스러운표정을 나타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저지른 舊惡을 마음 속에 두지 않았으며, 비록 원수일지라도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지 않았고, 항상 다른 사람의 잘하는 것만 말하였다. 무른 9개소의 有名한 伽藍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쳐 法號를 加贈받았고, 兩王으로부터 函丈 곧 王師의禮遇를 받았으며, 二代王에게서 시호를 받았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그의 德行이 古人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어서 碑文에 새길 만하다고 하겠다.


공손히 생각하여 보건대, 주상전하께서 卽位하신 초기부터 善行을 표창하고, 惡을 막으려고 새로운 法則을 제정하여 시행하였다. 국사께서 入寂하신지 4년 후에 스님의 덕행을 추모하여 다시 大智國師라는 시호와 智鑑圓明이라는 塔號를 추증하고 臣宜中에게 命하여 스님의 碑銘을 지으라고 하였다. 스님의 德行이 世上에 널리 알려져서 尊信을 받는다는 것을 또한 이를 통해서도 더욱 더 잘 알 수 있다. 臣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臣이 至正 丙申年에 圓融府錄事로 있을 때 스님이 入侍의 책임을 맡고 왔을 적에 서로 알게 되었으니, 스님의 碑銘을 짓는 것을 義理上으로도 차마 사양할 수 없거늘, 하물며 主上의 命을 받았음이랴! 臣이 비록 不敏하기는 하지만, 감히 拜手하고 稽首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碑銘을 짓게 되었으니 그 詞에 이르기를,


億政寺의 卓越하신 大智國師여!
先天에서 타고나신 투철한 資質
淳樸하온 그 性品은 오직 質일뿐
玉과 같이 맑고 맑아 티가 없도다! ①


經律論에 정통하여 해박한 지식
바다보다 깊고 넓어 끝이 없도다
모든 것을 包容하고 恢恢하오며
白雪같이 희고 맑은 그 모습이여! ②


釋林에서 選拔되어 스님 中 스님!
大衆들을 指導하는 祖室의 기둥
智嚴尊者 그 豫言이부합되었다.
모든 일을 直觀으로 미리 아시네!


恭愍王이 法門 듣고 존경하였고
魁偉하신 모습보곤 達磨라 하다
그 法統을 살펴보니 太古의 弟子
石屋淸珙 法을 받아 오직 외길뿐! ④


모든 規律 百丈淸規 依存하였고
日用事는 戒律條項 맞게 하였네!
智慧光明 日就月長 增益하오며
그 이름은 더욱더욱 빛이 나도다! ⑤


恭愍王이 스님 道德 傳해 듣고서
禮를 갖춰 王師로서 추대하였네!
임금께서 欽慕하여 마지 않았고
백성들도 한결같이 仰慕하도다! ⑥


중생에게 끼쳐주신 스님의 法乳
저마다의 그릇따라滋養을 받다
入寂後엔 스님 모습 볼 수가 없고
스님 陰德 만날 길이 전혀 없도다! ⑦


歲月이란 無常하여 점점 멀어져
自我 찾는 그 方法을누가 알리요!
門徒들의 請託으로 碑文을 지어
돌을 깎아 글을 세겨 碑를 세웠네! ⑧


뒤로부터 다가오는 모든 後哲은
자세하게 이 碑文을 읽어보소서!

前內願堂 判曹溪宗事 禪敎都摠攝 慈興慧照 國一都大禪師 겸 判僧錄司事 臣 旋軫이 王命을 받들어 碑文과 篆額을 썼다.
洪武 26년 癸酉 10월 일에
門人 大禪師 中允은 碑를 세우고
惠公은 글자를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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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에서 나와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 경종대왕 태실 아래 작은 주차장이 있다. 태실로 향하기 전에 하마비가 먼저 반긴다. 금표비는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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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10여분 올라가면 태봉이 보인다. 일반사람들과 달리 왕손이 태어나면 태실을 조성하게 된다. 과정은 이미 답사기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다시 가져왔다.

 

"세태의식(洗胎儀式)을 거친 태는 태항아리(胎壺)에 넣어 산실의 길한 방향에 두었다가 관상감에서 택일한 길일(吉日) · 길시(吉時)에 맞추어 태를 백자항아리에 담게 된다. 이때 백자항아리 안에 엽전 한 닢을 놓은 후 그 위에 정결하게 씻은 태를 넣고 큰 백자항아리(외항아리)에 솜을 깔고 작은 백자항아리(내항아리)를 넣고 솜으로 가득 채운 후, 초주지(草注紙)로 덮은 뒤 다시 솜을 넣어 밀랍으로 밀폐한 다음 뚜껑을 닫아 놓는다.

이후 관상감에서 미리 정한 태봉(胎封)으로 이송하게 되는데, 이때 출발과 도착에 따른 각종 제(祭)를 지내고 봉송해 온 태항아리와 태 주인공의 생년월일시 및 태를 묻는 날을 기록한 지석(誌石) 등을 석함(石函)에 넣어 함께 묻게 된다. 그리고 나서 태실(胎室)의 이름과 안태자를 새긴 태실비(胎室碑)를 세움으로써 태실의 조성을 마치게 된다.


태실의 주위에는 금표(禁表)를 세우고 왕은 300보, 왕자 · 공주는 200보로 정한 후 이 안에서의 거주와 경작을 금하게 하고, 각 태봉 아래에는 작은 절(小刹)을 지어 태실을 살피도록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태실은 주인공이 국왕에 오르면 태실을 다시 확장 설치하는 가봉(加封)을 하게 된다.


이런 대역사(大役事)에 속하는 태실의 조성과정을 통해서 왕실에서 갖는 태의 의미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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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의 태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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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경종대왕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자.

 

"조선 제 20 대왕 경종대왕 이 균은  숙종 14 년 무진년 ( 용띠 ) 1688 년 10 월 27 일  대궐 취선당에서 숙종대왕 후궁 소의 장씨가 낳았다 숙종대왕이 28 세에 얻은 첫 아들이다 이듬 해 1689 년 기사년 1 월 15 일에  원자로 책봉 되었다 모친은 희빈에 봉 되었다 숙종은 백일도 안 된 후궁 소생 왕자를 원자로 삼으려 하자  신료들은 아직 왕비가 20 대 초반임을 들어 극력 반대 하였다

 

결국 반대한 사람들이 파직 되고 유배 되는 옥사로 번지니 이른 바 기사환국이다 서인 영수 송 시열이 이때 사사 되고  서인이 몰락 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3 세 때 1690 년 경오년 숙종 16 년  숙종대왕은 왕비 인현왕후 여흥 민씨를 폐비시켜  궐 밖으로 내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 하였다 4 세 때 왕은 친히 교본을 만들어 원자가 글자를 익히게 하였다

 

7 세 때 갑술년 1694 년 5 년간 왕비로 있던 모후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 되고 인현왕후가 대궐로 돌아왔다   갑술환국이다이 번엔 남인이 철저히 몰락 하여 이 후 정계에서 극소수 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1695 년 8 세에 관례대로 성균관에 입학 하여 의젓하고 절도 있어 칭송 받았다

 

1697 년 숙종 23 년 10 세에 심 호의 여식 청송 심씨와 가례를 올렸다14 세 때 인현왕후가 병으로 죽고  모친 희빈 장씨는 왕비를 저주 비방한 죄로 사사 되었다 세자는 그 때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영의정등을 붙잡고 애원 하였다세자를 지지한 소론 측 영의정 최 석정등은 적극 나 섰으나노론 측 좌의정 이세백 등은 외면 하였다

그 해 세자빈 또 한 병석에 있어 세자는 견디기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세자는 말수와 웃음이 극히 적어 속 마음 을 좀 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세자는  허약 하여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29 세 때 1718 년 숙종 44 년 병환 중인 왕 대신 대리청정 하였다 30 세 때 1719 년 정유년 숙종은 관례를 깨고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 하였다 왕은 자신의 사후 병약하고 후사가 없는 세자 대신   세제 연잉군을 보위에 올리면 어떤가 하였다

 

이로서 일부러 세자를 대리청정케 하고 실수를 빌미 삼아  자연스레 교체 시키려는 숙종의 속 마음이 노론 측에 갈파 되었다그러나 세자는 실수 없이 국정을 무난히 수행 했다 31 세 때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 의지 하며 살아 온 세자빈이 죽고 말았다 그 해 함종 어씨를 새 세자빈으로 맞이 하였다

 

33 세 때 1720 년 경자년 숙종이 승하하자 보위에 올랐다 먼저 조강지처 였던 죽은 세자빈 심씨를 왕비로 추승 하였다 부왕 장례에 더욱 몸이 쇠약 해진 왕은 자식이 없어 이복 동생 연잉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연잉군 지지 하는 노론은 왕의 병을 핑계로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 하라 주청 하여 왕이 할 수 없이 따랐다그 후 소론에서 불충이라  항의 하여 철회 되었다

 

35 세 때 임인년 가을에 어씨를 왕비로 책봉 하였다 경종은 부왕 장례에 몸이 더욱 상해 갑  1724 년 8 월 25 일  이른 아침 창경궁 별전에서 재위 4 년만에 37 세로 승하 하였다왕이 20 일이나 병석에 있다보니 입 맛이 너무 없어  식사를 거부 할 정도 였는데 저녁에 세자 연잉군이 ( 훗 날 영조대왕 )  게장과 새로 수확한 감을 가져와 오랫만에 맛 있게 먹었다 

 

 원래 게와 감은 상극인 냉한 식품이라 반대 하는 사람이 있었다아니나 다를 까 그 날 밤 왕은 설사복통을 일으켰다  이에 연잉군이 어의에게 인삼과 부자를 달여 대령 하라고 명 하였다이에 어의가 당치 않다고 반대 하였다

그러자 연잉군이 사람이란 본래 자기의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느라 인삼을 쓰지 못 하게 한단 말인가 하고 크게 호통 치니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시행 했다

 

과연 왕이 조금 몸이 따뜻 해져 안심 했으나   새벽에 왕은 느닷 없이 죽고 말았다 영조대왕은 경종 독살설로 재위 내내 시달렸다 경종대왕의 능은 성북구 석관동 의릉이다"...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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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은 8각의 낮은 받침돌 위로 둥근 돌방을 올리고 8각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옆에 태실비를 세워 놓았다. 영조 2년(1726) 왕의 명을 받아 태실 주위에 8각형 돌난간을 두르고 비석을 세웠으며, 순호군 16명을 두고 3년마다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2008.08.08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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