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충주시

[스크랩] 충주...청룡사지

임병기(선과) 2008. 9. 25.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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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위전비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 청룡사지 산길에 접어들면 가장먼저 흔치않은 위전비가 반긴다. 위전비는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청룡사 창건,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기록한 비로 품목, 수량이 명기되어 있어 당시 사찰 살림살이를 가늠할 귀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불교가 배척 받던 시절 충청도 산골 절집에 보시한 분들은 어떤 분이였는지, 제대로 호구지책이나 갖춘 집안이었는지 몹시도 궁금하기도 하지만 줄줄 읽어 내려가지 못하는 내능력이 한없이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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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종형 부도

 

뜨거운 햇살이 내려 쬐는 들길과 달리 산길에는 시원한 바람이 답사객의 마음마져 청량하게 한다. 혼수 선사의 부도를 만나기전 부도밭이 보인다. 탑신을 잃은 부도와 석종형 부도 한 기로 적운당('寂雲堂)舍利塔'으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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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는 부속암자인 연회암(宴晦庵)에서 금강경주석서인 <금강반야경소찬요조현록(보물 제720호)>및 <선종영가집> 등 목판본을 출간하는 등 7백여년 동안 향화를 밝혀온 충주 일원의 대표적 거찰로 밝혀지고 있으며 창건연대는 불확실 하지만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어느 봄날 이 근처를 도승이 지날 때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비를 피했는데, 이때 하늘에서 2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다가 사라지자 날이 다시 개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되어 지세를 살펴보니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명당이므로 이 절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그런 청룡사가  폐사된 연유에 대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조선 말기 민씨들이 세도를 부릴 때 당시 판서로 있던 민대룡(閔大龍)이 소실(少室)의 묘를 쓰려고 머슴을 시켜 이 절에 불을 지르게하여 소실되었다고 한다. 당시 불을 지른 머슴은 인다락 고개를 넘어 가다가 고개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 뒤 민대감 집에서는 소실의 묘를 절터 윗 편에다 썼는데 그 후손들이 산소를 찾아 묘역을 돌보면 해를 입어 지금까지도 벌초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여러 사찰에 전해 오는 폐사 연유이며 실제로 절을 허물고 민묘를 조성한 경우가 빈번하여 경계의 의미도 내포한 전설로 보인다. 종교와 종교간에는 무릇 상생과 공존, 존경과 이해가 기본이건만 작금의 상황도 맑지 않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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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석등

 

이전에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보각국사 사리탑 앞에 세워진 석등으로 고개가 갸웃거린다. 지대석 위 하기단은 사자가 엎드리고 간주석은 방형이며  상대에는 복련을 새기고, 두 개 창을 낸 방형 화사석에는 우주가 표현 되었다.2개의 창을 내었다. 옥개에는 모서마다 작은 꽃이 피었으며 경사가 심하다.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라고 하지만 처음 접하며,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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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사 부도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치었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고려말부터 양식상 석종형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조성된 팔각원당형으로 지대석, 기단,몸돌, 몸돌이 온건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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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자료는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탑신부(塔身部)는 반룡(蟠龍)이 감긴 엔타시스의 우주(隅柱)를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창방(昌枋)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각면(各面)에는 무기를 든 신장상(神將像)이 1구(一軀)씩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 처마에 탑신(塔身) 우주(隅柱) 위의 창방(昌枋)머리와 접촉되는 부분이 보머리형을 이루고 있으며 추녀와 사래를 양각하였고 연화문(蓮華紋)을 조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은 상단부가 급경사이며 기왓골은 없으나 각 합각(合角)마루에 용두(龍頭)를 조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 정상(頂上)에는 복련(覆蓮)을 조각하여 상륜부(相輪部)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탑신(塔身) 우주(隅柱)의 엔타시스와 창방(昌枋)의 조각, 옥개석(屋蓋石)의 보머리형 조각, 추녀와 사래의 표현, 지붕 합각부의 용두(龍頭)조각 등은 당시의 목조가구(木造架構)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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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기단부(基壇部)는 복련(覆蓮)을 새긴 하대석(下臺石)과 안상(眼象) 안에 사자상(獅子像)과 운룡문(雲龍紋)을 새긴 중대석(中臺石), 그리고 앙련(仰蓮)을 새긴 상대석(上臺石)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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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한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고려< 高麗 > 공민왕< 恭愍王 >과 공양왕< 恭讓王 > 및 조선< 朝鮮 > 태조< 太祖 >의 국사< 國師 >로 있던 고명< 高名 >한 승려인 보각국사< 普覺國師 >의 비이다. 문인선사< 門人禪師 > 희달< 希達 >이 태조< 太祖 > 3년(1394)에 태조< 太祖 >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비문< 碑文 >은 풍우로 인하여 손상이 많이 되었다. 비 바로 앞에 보각국사< 普覺國師 > 정혜원륭탑< 定慧圓融塔 >이 있는데, 이 탑은 팔각탑신< 八角塔身 > 부각면에 사천왕< 四天王 >인 듯한 조상< 彫像 >과 각 우주< 隅柱 >는 엔타시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표면에는 반룡< 蟠龍 >이 기어오르고 있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조선< 朝鮮 > 초기< 初期 >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 보각국사비< 普覺國師碑 >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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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지 지킴이 어르신

 

나홀로 답사길에 만난 문화재 지킴이 어르신. 주차장 부터 산길을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계셨다. 아랫동네에 거주하시는 어르신은 청룡사지 문화재에 대해서 자꾸만 물었지만 일천한 지식으로 내뱉는 설명은 청룡사지 문화재에 오점을 남길 듯해 몇마디 주절거림으로 대신했다.

 

결코 짧지 않은 답사 경험이지만 산골 폐사지를 이렇게 정갈하게 가꾼 경우는 처음 접하며 어르신께 고마움을 표한다. 우리 문화재는 이처럼 소리없이 현장을 지키고 가꾸며 사랑하는 분들에 의해 지켜진다. 산골 청룡사를 찾아 주어 너무 고맙다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인사를 몇 차례 하셨다. 청룡사지 문화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빌어본다.

 

2008.08.08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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