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충주시

[스크랩] 충주...목계 나루

임병기(선과) 2008. 9. 24.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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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평리 탑 답사후 청룡사지 가는 길에 목계 나루터가 보인다. 

 

인간이 덜 되어먹어 아직도 장터, 나루터란 말 만 들어도 코끝이 찡하고 한 구석에서 왈패의 싸움소리, 주모의 자지러진 웃음소리가 들릴듯 하고, 상인들의 과장되고 요란한 손동작이 떠오른다. 교통의 발달과 유통의 근대화, 지방 인구의 감소 등으로 나루에서 펼쳐지던 시장의 기능이 명맥도 잇기 힘들지만 목계나루도 남한강의 어떤 나루보다 규모가 크고 산간지방과 한양을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 나루터 였다.

 

목계에는 아직도 별신제가 크게 거행된다고 한다. 실제 산대놀이, 별신제는 지역민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나루터를 근거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고객을 위해 펼치는 감사 이벤트 성격이 강하다고 공부했었는데 목계별신제의 성격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아래의 목계별신제 내용으로 미루어 의미가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듯하다.

 

"매년 봄 가을로 날자를 바꾸어잡아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이름하여 "별신"이라했으며 큰 나무를 세워 신위를 설치하고 떡, 과일, 술, 밥을 차려놓고 무당들이 모여 노래와 춤으로 서낭신을 즐겁게 했다. 별신제는 연중행사인 마을수호제로서 시장의 번영과 주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며 별신굿과 줄다리기, 난장의 세요소가 결합된 민속축제였다. 멀리 영남지역으로부터 경기, 강원 지역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신명나는 한판의 축제로 중원 문화를 만들어내는 동력으로 작용 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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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나루 신경림 시비

 

아~신경림 시인이 뇌리를 스치지만 도로변에는 수석 판매장만 즐비하게 문을 열고 있었다. 목계장터에서 님이 노래한 떠돌이는 삶에 찌든 민중이고 나의 역마살은 부르죠아의 사치일까?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충주시 ‘목계나루’는 남한강(南漢江)의 많은 나루터 중에서도 번창한 나루터였지만,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충북선이 생기자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던 곳이다. 이 시는 마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화자는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며 “구름”이며 “바람”같은 “방물장수”이다. 즉, 힘없고 억눌리고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산업화로 인해 소외된 민중의 떠돌이 삶을 살고 있다.

 

그도 이제는 어딘가에 정착해야 하지만 정작 정착할 곳은 없다. 시대의 변화로 인해 더욱 삶이 곤궁해지고 억눌리며 살 수 밖에 없는 이 시대 우리 민중들의 모습의 전형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충주시에 있는 조정지 댐, 국보 6호인 중앙탑 아래에서 돗자리를 펴고 가족들과 함께 김밥을 말아먹은 적이 있다.

 

그 공간이 한편으로는 떠돌이의 아픈 삶의 고통이 배어 있는 공간이었다. 과거를 담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이제는 민중들이 “짐을 부리고 앉아”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 마음 한 켠에서도 들꽃 한 송이쯤 피게 하고, 물 한줄기쯤 흘렀으면 한다.

 

신배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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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파는 방울장사도 만나고, 떠돌이 장돌뱅이의 장타령도 걸지게 듣도록

 

삼강나루처럼 주막을 복원했으면 좋으련만...

 

2008.08.08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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