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부산시

[스크랩] 부산...만덕사지 당간지주

임병기(선과) 2008. 8. 12.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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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동(萬德洞)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에 금정산 기슭인 이곳에 1만여의 피난민이 피난와서 모두 화를 면했었는데, 이에 따라 1만여명이 덕을 입었다고 하여 이 마을 이름이 만덕동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만덕동에는 예부터 기비현(其比峴) = 사비현(射比峴)이라는 큰 고개가 있었다. 낙동강연안에서 동래로 통하는 이 고개는 동래지역과 서부경남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고개로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으나 길이 워낙 높고 험하고 숲도 많이 우거진 곳이었다.

 

이에 따라 이곳은 장꾼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동래부 관내에서 도둑이 심하기로는 만덕고개가 으뜸이고, 다음은 모너머고개(송상현공 동상이 있는 고개)였다고 하며 당시의 사람들은 혼자 만덕고개를 넘는 것을 겁내었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말로는 만 사람이 떼를 지어 고개를 넘어가야 온전하기 때문에 '만등고개'라고 하였다 한다. 이 만등에서 만덕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만덕사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오직 하나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이른바 공민왕 때 석기(釋器) 세자의 왕위 추대음모사건과 관련된 내용에 나오고 있다.≪고려사≫ 종실열전(宗室列傳)과 ≪고려사≫ 권38 공민왕세가 즉위년 12월조에 보면, ‘『十二月辛卯 髮永陵藤子釋器 置萬德寺』 ‘12월 신묘(辛卯)에 영릉(永陵, 충혜왕)의 서자 석기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두었다.’라는 기록과 ≪고려사절요≫에 ‘『十二月 忠惠王藤子釋器 髮置萬德寺』 ‘12월에 충혜왕(忠惠王)의 서자 석기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두었다. ’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들에서 고려 28대 충혜왕의 서자 석기가 만덕사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31대 공민왕 5년에 부원파(附元派)들이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음모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공민왕은 즉위 하자마자 그 자신이 몽고 풍속을 버리고 원(元)의 쇠약을 틈타 반원(反元) 정책을 폈던 왕으로서, 원에 아부하여 권세를 누려온 부원파(附元派)를 숙청하고 바로 원(元)에서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했던 기관인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없애고 고려에 대한 간섭을 배제시켰으며, 원의 연호(年號) 사용을 금하고 원의 간섭으로 개편되었던 관제(官制)를 복구 환원하였다.

 

이 때에 석기를 받들어 불궤(不軌)를 도모하려는 음모가 일어 났으며, 비록 서자이기는 하나 충혜왕의 아들인 석기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음모는 공민왕의 배원(排元) 정책에서 비롯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의 문헌(文獻)에 석기가 유폐되었던 절이 만덕사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이 절의 내력과 위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학계에서는 만덕동에 있는 큰 절터의 지리적 위치와 여기에 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검토한 결과 ≪고려사≫에 나오는 석기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하였던 것이다...낙동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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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이 많은 두 놈의 중생 삐질삐질 땀을 흘리면서도 마냥 즐겁다. 우리의 탑돌이도 이제 다른 돌덩어리에도 관심이 가는가 보다. 만덕사 옛영화를 재현하려는 듯 당산목 아래 힘주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오래전부터 민초들에게는 사찰의 문화유산 보다는 민간신앙의 당으로 모셔지는듯 하다.

 

고려전기 만덕사 창건시 세웠던 당간지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한쪽 기둥만 남아 있으며, 바깥면은 가운데에 도드라진 선을 한 줄 새겨놓았고, 안쪽면 꼭대기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맨 위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2단의 굴곡을 주면서 둥글게 깎아두었다. 땅속에 묻혔던 부분도 노출되어 색다른 눈요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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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립박물관 야외전시장의 3층탑. 만덕사지에서 수습된 부재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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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으로 궁금한 당집이다. 누구를 모셨는지 한없이 궁금하더라. 비지정 민속지도 작은 안내문이 절실하다. 문화유산에 대한 십인십색의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지자체들의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적어도 설명 해주실 분의 연락처라도 남기면 이리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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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덕사지(萬德寺址)의 유물들...부산북구청

 

부산시 문화재기념물 제3호인 만덕사 금당지(金堂址)와 부산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4호인 당간지주(幢竿支柱) 외에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삼층석탑(石塔) 등 만덕사 절터에는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  지표조사 (1971. 8. 18 ∼ 11. 28)에서 습득한 유물

만덕사 절터 앞에 터널을 통과하기 위한 도로를 개설하기 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1971년 8월부터 3개월에 걸쳐 지표(地表)조사를 한 적이있다.

이 때 습득, 확인된 유물은 청동제 인왕보살상(11Cm), 연자방아 1짝, 기와 종류 등 12가지였다. 그리고 절터에서는 신라시대의 회청색 격자문(格子紋) 토기편과 고려시대의 회청색 무문(無紋)토기편 순청자편 청자 음각문(陰刻紋) 편 분청사기 인화문(印花紋)편 등이 발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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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자방아1짝>

 

■  1차 발굴조사 (1990. 10. 8 ∼ 11. 31)에서 확인된 유물

만덕사 금당지의 발굴조사를 부산시립박물관에서 1990년 10월부터 2개월에 걸쳐 실시하여 금당지의 규모가 범어사의 4배에 달하며 만덕사가 대규모 사찰이었음이 밝혀졌다.

발굴조사에서 불상(佛像)을 모시던 대형의 팔각좌대석(八角 坐臺石)과 연화문하대석(蓮花紋下臺石)이 출토되었고 기비사(祇毗寺) 명문기와가 나와 조선시대 만덕고개인 기비현(其比峴)과의 연관성이 있는 유물로 추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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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각좌대석>

 

■  2차 발굴 조사 1996. 9. 20 ∼ 12. 31)에서 확인된 유물

1차발굴을 한 금당지의 앞 쪽 마당에 대한 2차 발굴조사를 북구청의 자치예산으로 부산시립박물관에 의뢰하여 시행하였다.

2차 발굴에서도 만덕사가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또 하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사찰의 기와지붕 용마루 좌우 끝에 장식되었던 대형 치미가 발굴되었는데 치미는 우리 말로 망새라고 하며 목조 건물 지붕의 기와 장식품으로 고려 중기까지 성행하였던 것이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유물 4가지 중에서 경주 황룡사 절터에서 파편으로 출토되어 복원한 치미의 높이가 182Cm인데 만덕사지 2차 발굴조사에서 발굴된 치미 파편도 그만한 규모의 대형 치미로 확인되었다.

 

■  만덕사와 관련된 다른 유물들

만덕사의 절 경계를 표시하는 토지경계석인 국장생표(國長生標) 석주(石柱)가 1978년 도로공사 중 만덕로타리 부근에서 발견 되었다.

그리고 만덕사 절터 오른쪽 계곡 언덕 위로 논이 있는 사잇길의 소나무 숲속에 수조(水槽) 미완성품 바위가 남아있다.

옛 사람의 물탱크로 쓰였던 석조수조(石造水槽)는 길이 3.5m, 넓이 1.2m, 두께 28Cm의 크기로서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큰 것으로 만덕사의 상주인구가 그만큼 많았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수조는 조각을 하던 중 실패하여 실용하지 못한채 원 위치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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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수조(石造水槽)로 쓰기위해 조각한 바위>

 

이 바위를 동네사람들은 구시바위, 구싯돌이라고도 하고 떡메바위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만덕사 금당지 입구 쪽에 산신지위(山神之位)라고 새겨진 비석이 발굴되어 불교와 토속신앙의 공존에 대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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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장생표 석주>

 

절터의 유적으로는 금당지 바로 뒤편에 견고한 대형석축이 남아있고 동북쪽, 서북쪽 200여m지점에 칠성당지(七星堂址)를 비롯한 절터의 축대와 주춧돌이 남아있다. 또한 금당지를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의 논과 밭 야산에는 파손된 축대와 수많은 기와 조각, 청자, 분청자기, 백자기 파편들이 널려있다.

만덕사와 관련된 지명(地名) 중에 차밭골이 있다. 만덕사 위쪽 장사바위가 있는 계곡의 골짜기를 차밭골이라고 한다. 옛날 만덕사에 있던 선승(禪僧)들이 마시던 선다(禪茶)의 내력이 전해 오는 곳이다.

차밭골에는 지금도 야생(野生) 차(茶)나무가 있어 꽃이 좋고 열매가 둥글둥글하게 열리고 있다.

 

2008.07.27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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