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에서 금당으로 향하는 길의 암키와로 조성한 담장길. 절집에서는 기와불사후 옛기와를 활용하여 굴뚝에 문양을 새기거나 굴뚝, 담장을 조성할텐데, 새기와로 담장을 쌓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조선전통불교 사찰정보에 의하면 옥련선원의 역사는 백산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산사는 삼국시대 원효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라 알려져 있는데 현재로서는 관덕암 바위에 새겨진 마애지장보살 말고는 이를 증명할 그 어떠한 문헌도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으로 이 지역의 군사적 가치가 높아지자 수군과 의승병을 총괄하던 사명대사가 이곳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다.
또한 고운 최치원 선생이 백산사에서 머물며 동백섬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해운대라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근세에 와서는 금봉 해월선사 등 당대의 고승들이 토굴 정진한 도량이기도 하다. 이후 옥련선원은 1604년 1월1일 재건되었으며 1635년(인조13년) 해운선사가 옥련암으로 부르다 1976년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옥련선원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부배치가 이상하지 않는가? 다른 삼성각은 중앙에 칠성상이나 칠성탱을 배치하는데 옥련선원 삼성각에는 중앙에 산신상, 양 옆에 칠성탱, 독성탱을 봉안 하였다.
옥련선원의 뒷산인 백산이 보기에는 아담한 동산과도 같으나 백두대간의 가장 마지막 줄기로서 기가 너무 세, 이곳에서 세달을 버티는 스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산신상의 격을 높혀 중앙에 모신 것은 이 백산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한 비보책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산신을 자연 암반위에 의자상으로 모신 것이 더욱 재미가 있다.
마애지장보살상. 그렇다 뒤집혀져 있다. 관덕암으로 불리는 바위군이 있는데, 벼락 때문에 떨어져 나온 바위면에 보살좌상 1구가 새겨져 있다. 보살좌상이 새겨진 바위는 거대한 바위 둘이 맞붙어 있었던 것인데 벼락을 맞아 깨어지면서 거꾸로 되었다.
문화재청, 기타 자표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마애지장보살로 표기되어 있지만 마애불 앞에는 문화재 안내판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마애지장보살로 표기한 안내문과 신라시대에 조성한 미륵불로 표기한 안내문이 그것이다. 옥련선원 뒷편에 조성한 거대한 미륵보살과 조화를 이루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이제 바로 보이나요? 문화재청자료를 가져왔다. 마애불은 상호와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하였는데, 머리 위에는 육계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이마 윗 부분에 두건대(頭巾帶)가 뚜렷하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음이 분명한 점으로 보아 지장보살상으로 보여진다.
아울러 부산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마애불인 동시에 상호와 머리 부분을 음각으로 표현하고 다른 부분은 양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게 평가된다고 하겠다.
옥련선원은 절집 보다는 조경이 잘 된 정원 같은 분위기다. 내눈에는 이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다. 일본식 정원 풍이라는 생각도 강하게 들어 근자에 조성한 미륵대불도 큰 감흥을 갖지 못했다. 팔공산 동화사에 답사시도 대불 참배는 하지 않는 못 된 버릇이 옥련선원애서도 되풀이 되었다. 기왕 조성하려면 바닷가를 감안하여 수월관음을 조성했으면 더욱 좋았겠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좋은데...
2008.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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