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서있기만 해도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리는 체질인 두 사람 흠뻑 젖었다.오늘 목적이 실내 전시관 보다는 야외 전시장 석조물이기에 자연스럽게 탑으로 발길이 향했다.
부산시립박물관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4동에 위치하고 있고 연건평 3만 1075㎡에 소장유물은 1만 1,300점에 이른다. 건물은 지하1층, 지상 2층에 7개 상설전시실과 가마전시관 및 야외전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장유물은 주로 부산 및 경상남도 지역의 덕천동·노포동 고분군, 김해읍성 유적등지에서 발굴한 매장 문화재 6,000여 점을 비롯하여 구입품 730여점, 기증품 3,870여점, 수집품 350여 점등이다.
만덕사지에서 옮겨온 탑. 단층기단, 노반을 제외한 상륜은 멸실되었다.
1층 몸돌 옥개석, 기단갑석 하나, 3층 옥개석만 본디의 부재처럼 보인다.
기단과 몸돌에는 우주만 표현하였다. 옥개받침은 3단이며 낙수면 경사는 급하지 않고 모서리 반전도 부드럽다.
조선조 팔각원당 기단의 원구형 부도.
하기단에는 겹동선으로 방형 안상을 새기고 중대석 받침에는 복련이 피어 있다.
상대에는 앙련이 보이고 원구형 몸돌을 올렸다.
고려초 석조여래 입상.
나발에 삼도가 보인다. 방형의 얼굴은 온화하고 원만하며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서글픈 느낌이 드는 까닭은 왜일까?
차렷자세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의 수인이 눈길을 끈다.
통일신라 불상.
소발, 긴 귀, 삼도, 통견의 법의, S 라인이 뚜렷한 삼곡 자세, 멸실된 수인이 궁금하다.
더욱 아쉬운 점은 사진에 보이는 안내문이 아닌 큰 해설문이 없다는 것이다.
박물관 이라면 의례적 안내문이 아닌 구체적이고 현실성 있는 설명문이 필요하다.
무릎만 남은 불상. 탑 상륜, 석등 간주석, 석등 기단....
옥개석과 배례석
근세의 석탑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석비는 광무 10년(1906)에 세워졌으며, 조선 후기 대일외교의 실무관청이었던 유원각(柔遠閣)과 관련된 유일한 금석문 자료이다.유원각선생’은 통사청에 근무했던 소통사라고 한다. 소통사는 일본인 역관인 훈도, 별차를 보조하면서, 왜관의 각종 실무에 종사한 동래부 소속의 하급통역관 이었다.
비석에는 비의 건립배경과 목적, 비석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어, 약조제찰비(시도기념물 제17호)와 함께 왜관(倭館) 및 조선 후기∼근대의 부산역사와 대일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비각은 전통적인 목조 기와지붕의 비각과는 달리 비각 전체가 석조로 조성된 것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며, 비각의 형태나 결구방식도 전통적인 양식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생산사적 측면에서 크게 주목되는 자료이다. 특히 비각은 오랜 동안 대일 외교의 창구 역할을 담당했던 부산의 지정학적 입장에서는 한일 문화의 교류와 전파의 단초가 된다는 점과 비각 건립 당시의 정치·사회·문화적 산물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유구이다...문화재청
서문외석교비.호천 석교비.사처 석교비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축성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현재의 눈으로 보면 쉬운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민관이 마음과 정성을 합쳐 세운 대단한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동래읍성 남문비.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의 충렬(忠烈)을 기리어 당시의 격전지인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에 세웠던 비로, ‘동래충렬비’라고도 부른다.
위에 얹었던 머릿돌
고종8년(1871)에 부산진 성지에 세웠던 척화비.
문무인석이 저리 시립하고 있으니 박물관 전시관은 무덤인가?
2008.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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