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구례군

[스크랩] 구례...화엄사(2)

임병기(선과) 2008. 6. 7. 19:44
728x90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각황전.석가여래를 본존불로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사보살을 협시불로 모신 각황전은 화엄사의 중심 불전으로  대웅전과 서로 직각을 이루며 위치하고 있다. 각황전 앞에는 석등, 사사자석탑이 있어 창건시에는 화엄사의 중심전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각황전 터에는 원래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 장육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엄사가 8세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장육전 역시 8세기 또는 그 이후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육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선조 26년(1593년)에 소실된다. 이때 내부에 봉안하고 있던 석경(石經)도 모두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현재의 각황전은 숙종 25년(1699년)에서 숙종 28년(1702년)에 걸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화엄사를 중건한 벽암선사의 제자 계파 성능이 중창한 것이다. 3년에 걸친 큰 공역에 끝에 중창된 후 숙종 29년(1703년)에 목조 금칠한 삼존불과 사보살상을 봉안하고 일주일에 거친 경찬대법회를 열었으며, ‘각황전(覺皇殿)’으로 사액되었다. 숙종 때의 중창 이후 영조 45년(1749년)과 헌종 13년(1847년)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계파 성능의 각황전 중창불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계파 성능이 장육전 중건을 서원하고 화주를 잦아 곳곳을 유랑하다가 우연히 한 거지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그 노파는 지금 자신은 아무 것도 시주할 것이 없으니 다음 生에 왕궁에서 태어나 큰 도움을 줄 것을 약속하였다 한다. 그 노파가 숙종의 딸로 환생하였으며 숙종의 지원으로 불사(佛事)를 이루게 되었고, ‘대왕을 깨우치게 한 보전(寶殿)’이라는 뜻을 빌려 각황전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숙종에게는 공주가 없어 전혀 믿을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

 

부처님을 깨달음의 왕이란 의미로 "각황" 이라 부르는 데서 전각 이름을 정하였다. 편액은 1703년에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각황전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이며,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법당안 3불 4보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보현보살,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다보여래, 지적보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삼존불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각황전 풍경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각황전 석등. 우리나라 최고의 석등이다. 지대석과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화사석과 옥개 및 상륜이 온건히 남아있다. 석등앞에는 장방형 평면의 배례석 하나가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팔각 화사석, 화창은 4개이다.각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도 팔각형이며  층급받침을 나지막이 두었고  처마 끝은 석재의 두께를 얇게 만들었는데 아래위를 모두 수평으로 만들고 상면만 모서리에서 살짝 반전하였다.

 

귀꽃은 큼직하며, 옥개석 위에는 복발형 받침돌을 놓은 위에 팔각의 짧은 기둥형 석재를 놓고, 앙화를 놓은 다음 옥개석과 같은 형상의 지붕돌 하나를 놓고 앙련을 새긴 보주를 두어 마무리하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대석은 상하 두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에는 두 개씩의 안상을 새겼고 상단은 약간 바깥으로 돌출하게 만들었다.

 

상대석은 석등의 크기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이이고  앙련을 각 모서리부분에  큼직하게 새겼다.원형 평면으로 아래위만 팔각 평면으로 만들고 중앙부는 원형으로 만들었다. 백제계열 고복형으로 상하가  대칭을 이루도록 하였다. 중앙부에는 연꽃을 수평선으로 이은 띠를 두었다.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복련은 팔각의 각 모서리에 하나 씩 큼직하게 새겼으며, 그 아래쪽 연잎이 감겨 올려지는 부분에서 귀꽃을 조각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원통전 앞 사자 석탑. 유래가 없는 독특한 모습으로 화엄사에서는 ‘노주(露柱)’라 부르고 있는데 그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설과 공양대(供養臺)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기단부는 4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그 위에 받침돌 한 단을 놓고 4마리의 사자를 네 모서리에 배치하였다. 사자는 모서리를 바라보고 앉아있는데, 입은 다물거나 벌린 모습을 하고 있다. 사자 아래와 위에는 각각 복련과 앙련을 두었다. 탑신에는 사천왕의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화엄사 효대(孝臺). 네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삼층석탑과 그 앞의 석등이 화엄사의 창건주인 연기조사의 효성을 표현한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사사자삼층석탑의 사사자로 둘러싸인 속에는 합장을 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연기조사의 어머니라 전해지고 있다.

 

또 석탑 앞의 석등은 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손에 찻잔을 들고 있는 스님이 받치고 있는데,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고 있는 연기조사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 역시 다른 곳에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조형을 지니고 있다. 방형의 지대석 위에 높직한 연화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스님의 상(像)이 있다. 오른 손은 땅에 꿇은 무릎 위에 살짝 올려놓았으며, 왼손은 세운 왼 무릎 위에 올려 찻잔을 받치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효대(孝臺)...이은상

 

일유봉은 해 뜨는 곳, 월유봉은 달 뜨는 곳
동백나무 우거진 숲을 울삼아 둘러치고,
네 사자 호위 받으며 웃고 서 계신 저 어머니!

천 년을 한결같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여쁜 아드님이 바치시는 공양이라,
효대에 눈물어린 채 웃고 서 계신 저 어머니!

그리워 나도 여기 합장하고 같이 서서,
저 어머니 아들 되어 몇 번이나 절하옵고,
우러러 다시 보오매 웃고 서 계신 저 어머니!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8.04.15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