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구례군

[스크랩] 구례...화엄사(3)

임병기(선과) 2008. 6. 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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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가는 길 화엄사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데자뷰라고 하는가? 언제나 그러하듯 너무도 눈에 익은 모습이다. 비우고저 떠난 만행, 비우기는 커녕 가득가득 채우기만 한다.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자위해보지만...

 

빈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법정스님...물소리 바람소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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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입구. ㅎㅎ 여기도 눈에 익다.

 

남해 금산 정상, 경주 남산 감실 부처 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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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삼층탑.

 

생체기 심한 모습이 내안에 사무치는 처연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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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지고 부서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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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탑이 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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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롭게 흩어져 있는 부재. 최소 2기의 탑이 구층암에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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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층암 요사에 쓰인 기둥으로 나무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소박한 자연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구층암은 본 절에서 불과 5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그 건축적 내용도 대단하지만, 그 참다운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이 별로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대방채를 이루는 전면기둥이다. 백년은 넘은직한 큰 모과나무를 싹둑 베어서 전혀 다듬지 않고 생긴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했다. 나뭇가지의 흔적 뿐 아니라, 움푹 패인 나무의 결과 옹이까지도 생생하다. 밑둥은 하나지만 위는 두 갈래로 갈라진 Y자형 기둥이 지붕틀을 받치고 있다. 휘어진 기둥이나 부분적으로 다듬지 않은 기둥은 드물지 않게 나타나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손을 대지 않은 기둥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를 사용한 예는 구층암 승방 뿐이다.

모과나무는 소나무와 달라서 쉽게 굵어지지 않는다. 오래된 모과나무라 해도 그 굵기가 가늘기 때문에, 다른 목재처럼 다듬어 사용하려면 너무 가늘어져 건축자재로는 적합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모과나무를 생긴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일본 건축에서는 목조 건축의 부재를 흑목조와 백목조로 구분한다. 백목조란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다듬은, 흔히 볼 수 있는 부재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흑목조란 나무껍질을 벗기지 않고, 생나무 그대로 잘라서 기둥이나 보에 쓰는 방법이다.

흑목조에 대해 일본인들은 그들의 자연친화적 건축의 특성을 세계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흑목조가 뜻하는 것은 자연의 일부를 인공적인 건물 안에 살렸다는 의미다. 그러나 구층암 승방의 모과나무 기둥은 그 차원이 다르다. 자연의 일부를 삽입한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가 자라서 기둥이 되고, 지붕이 된다는, 자연이 곧 건축이 된다는 근원적인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확대 해석을 한다면, 나무의 밑둥은 기둥이요, 줄기는 보가 되며, 이파리의 잔가지는 서까래와 지붕이 된다. 인공적인 건축물은 곧 자연의 일부요, 확장이라는 자연주의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집이다.

나무라는 재료는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아름다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매우 우수한 건축재료다. 그래서 구할 수만 있다면,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선호하는 것이 목조건축이었다. 한국건축의 주된 재료가 나무인 까닭은 우리나라 산에 양질의 나무들이 많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경제적 이유가 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자연을 빌려온다는 생각에서 그 사용량을 최소화하려 했고, 가급적 인공적인 가공도 최소로 유지했다.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대로 사용했고, 북사면에서 자란 나무는 건물의 북쪽에, 남사면에서 따뜻한 햇빛을 받고 자란 나무는 건물 남쪽에 사용했다. 나무란 건축재료 가운데 유일한 생명체였으며, 생전의 생장환경과 가장 유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재료의 수명을 오래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을 빌려온 작은 대가라고 생각했다. 구층암의 모과기둥은 그 자연주의적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소중한 예다...한국전통사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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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형 사찰문화재 답사에서 이야기한 화엄사 구층암 처마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를 옮겨오니 훗날 답사기 찹고 하길 빈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너는 살찌고/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거북이야!/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바로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간」이란 시다.
동양의 토끼와 거북(구토龜兎지설)얘기와, 서양의 신농씨 프로메테우스 얘기(신화) 곧, 그가 진흙으로 빚어낸 사람을 너무나 사랑해, 제우스의 불(=지혜, 문화, 예술)을 훔쳐다 준 죄로 바위벼랑에 거꾸로 매달린채 제우스의 독수리에게 간을 쪼인다함과 섞어낸 시가 이에 떠오르네. 그는, 토끼-거북-간(조국)-프로메테우스-제우스로 일제(압박), 고통, 독립(운동), 지혜들을 말하려했던 것인가?!

깊은 뫼 속 암자 이 9층암에, 그리구 천불전의 (옆)처마밑에 둔 이른바 토끼(토의 간 또는 별주부)전의 이 흔치않는 나툼의- 까닭은 대체 무얼까 모를 일. 토끼가 병든 동해 용왕의, 매나 독수리도 없(다)는 용궁으로 가는 길(장면)인가? 아님, 간 지키고 용궁서 도망 나오는 길?

우리는 삼국사기(권41, 열전, 김유신 상)에, 김춘추가 구원병 요청하러 고구리(보장왕)에 갔다 잡히자 탈출의 지혜를 짜내라는 보기로, 뇌물받은 선도해(先道解)가 해주는 얘기(구토지설)로서 처음 보임.

그러나, 이 얘기의 뿌리는 인도 그것도 불교에서! 고로, 불교따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퍼져있다네. 곧 (서가모니)부처의 전생얘기인 자타카(본생담)에서, 임신한 용왕비가 원숭이 염통(심장)이 먹고싶다…는 용원(龍猿, 일본은 수모원水母猿)얘기에서 바로 가지쳐 나온 것!

그러니 절-9층암에 토끼와 거북녀석이 나타남은 당연! 한마디로, 불교의 권선징악용으로? 아님, 용왕-거북의 지배층과 토끼-간의 민생층으로해 민중의식, 자아의식을 일깨우는 알음알이(지혜)용으로? 그냥, 그때 목수가 재미로 나타내놓은게 아니라면.

아니! 깨달음을, 깨쳐야 한다는 마음자리의 센(치열한) 가르침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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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전. 처음보는 전각이다. 아하 삼성각이구나. 칠성,산신,독성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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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신라 때부터 五岳의 하나인 남악(南岳)으로 신성하게 여기던 산으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리산 산신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 남악사이다. 산신제는 국가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신라 때에는 천왕봉에서 고려 때에는 노고단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나라에서 파견된 제관(祭官)에 의해 갈뫼봉 아래인 광의면 온당리 당동에서 중사(中祀)의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으며, 영조 13년(1737년) 남원부사의 주도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던 순종 2년(1908년)에 일본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제사는 강제로 폐지되었다. 1969년에 들어와 구례군민의 뜻으로 이곳에 현재의 남악사를 세우고 매년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산신제를 거해아고 있다.

 

남악사는 신축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끼고 화엄사로 오르는 길에서 계곡을 건넌 곳 한적한 곳에 따로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도리통 3간, 양통 2간의 이익공식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정면 3간에는 모두 쌍여닫이문을 달았고, 양 측면에는 출입을 위한 외여닫이문을 달았는데, 모두 아래에 궁창부 한 단이 있는 교살의 창호이다. 건물 외부는 가칠과 긋기단청을 하여 수수하게 꾸몄다. 내부에는 ‘智異山之神’이라 쓴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다...한국전통사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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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 화엄사 순례, 내 생애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만행 나선 까치가 돌아올즈음 흩어져버린 내마음도 돌아오겠지... 

 

2008.04.15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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