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구례군

[스크랩] 구례...화엄사(1)

임병기(선과) 2008. 6. 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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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늦게 숙소에 합류한 포비놈이랑 셋이서 오랫만에 옛나문답을 회상하며 한잔 걸쳤다. 우리가 만나지가가 벌써 8년 참으로 무심한 세월이다. 이제 30,40,50대로 변했지만 여전히 철들지않은 수다가 그렇게 정겨웁고 유쾌할 수가 없었다. 지난밤의 숙취도 아랑곳 않고 아침 일찍 기상하여 상큼한 지리산 공기를 폐부 깊히 들이마시며 화엄사로 향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인도 승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과 해회당(海會堂)을 짓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법왕(599년) 때는 승려 3,000여 명이 거주하면서 인도적 화엄사상을 폈다고 한다. 이후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는 자장율사가 진신사리 73과(果)를 모시고 와서 사사자삼층석탑과 공양탑을 건립했으며, 원효대사가 해회당에서 화랑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문무왕 10년(670년)에는 의상대사가 2층 4면 7간의 사방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 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丈六殿)과 법등을 조성하였다고 한다.경덕왕(재위 742~764년) 때에 와서는 8원 81암자를 갖춘 사찰로서 번영하였다고 하며, 헌강왕(875년) 때에는 도선국사가 동5층석탑과 서5층석탑을 조성하면서 화엄사의 중흥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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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오르는길 좌측 양지바른 산기슭에 부도전이 보인다. 사격을 표출하려는 의도도 함축된 조성이겠지만 절집 서쪽 지역, 땅기운이 너무 강한지역에 부도전은 자리하기도 한다.

 

최근에 새로 조성한  부도와 조선후기에 조성한 석종형 부도가 어울러져 있으며 석종형부도에 유곽과 유두를 새겨 넣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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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싱거로움이 지리산 계곡까지는 미치치 못했지만 산사로 향하는 우리들의 눈에는 봄맞이에 신록도 계곡도 단장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마치 피고 지고 왔다가 사라지는 우리네 삶의 여정을 직접 보여주려는 듯이 새벽부터 분주한 움직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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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담장에 둘러싸인 화엄사의 산문 인조 10년(1632년) 벽암선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지리산화엄사’라고 쓴 정면의 현판은 선조의 네 번째 부인의 아들인 왕자 의창군이 쓴 것이다.

 

현판 한쪽 편에 ‘皇明崇禎九年嵗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라는 명문이 씌어 있어서 인조 14년(1636년)에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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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때 화엄사를 중건한 벽암(碧巖) 각성(覺性)대사(1575~1660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귀부는  거북 모양의 신체에 비해 큰편이다. 다리와 꼬리는 형식화되어 퇴화하였고, 귀갑문도 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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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금강문 사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가람의 장면을 연재한 김봉렬 교수는 화엄종찰 진입동선을 은근하게 굽어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 하였다.

 

범어사,해인사, 내소사, 부석사 진입동선보다는 은근함이 적지만 화엄사 동선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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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을 모신 천왕문도 중심축에서 약간 비켜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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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보제루를 중심으로 운고각의 맞은 편, 즉 보제루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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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보제루.  누의 형태이나 누하 출입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형식은 평지가람의 형태에서 많이 보인다. 보제루는 전면과 후면의 높이가 다르다. 사진처럼 진입방향에서는 누각형, 중정에서는 단층전각처럼 보인다.

 

보제루를 우회하여 화엄사 중심 마당으로 들어서게 되며, 중정에서 보면 보제루가 앞쪽을 가로 막고 있는 형상이 된다. 따라서 화엄사 중정은 보제루를 비롯해 대웅전과 각황전 앞의 축대, 적묵당에 둘러싸인 아늑한 口자형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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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은 각황전과 더불어 화엄사의 중심 전각이다. 어찌된 연유인지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노사나불과 석가불의 삼신불 모시고 있는 불전이다. 임진왜란으로 화엄사가 소실된 후 각황전에 앞서 인조 14년(1636년)에 벽암선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창건당시 유구로 보이는 고식의 기단위에 정면 5칸은 삼분합문을 달고 위에는 교창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합각부에는 합각널을 설치하였다. 대웅전 현판은 인조 14년(1636년)에 왕자 의창군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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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화엄사상의 삼신불인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불을 표현한 것인데, 도상면에서 법신, 보신, 화신(응신)을 나타내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이러한 삼신불은 불화에서는 많이 보이지만 조각으로는 드문 편이다. 특히 보관을 쓴 노사나불이 조각으로 남아 있는 이른 예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삼신불상은 크기가 거대하고 단순하고 깊이의 강약이 느껴지는 굵직한 옷주름의 표현은 한층 상의 중후함을 더해 주고 있다. 특히 『화엄사사적기』(1697년 간행)에 의하면 1636년 조각승 청헌, 영이, 인균, 응원 등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약했던 17세기의 대표적인 승려장인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화엄사 대웅전은 삼신불상은 조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고, 도상이나 양식면에서 17세기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높은 의의가 있는 상으로 평가된다. 대웅전 내부 삼신불 뒤 불벽에 모셔져 있는 삼신불도로 비로자나불도, 노사나불도, 석가모니불도의 세 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비로자자불상과 노사나불상, 석가불상의 뒤에 봉안되어 있다...한국전통사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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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뒤 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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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과 별개로 운고각이 있다. 1918년 금정암에 계시던 세월 비구니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운고각 위에는 법고와 범종, 운판, 목어의 사물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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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16나한을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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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전.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조선 숙종 29년(1703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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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동서 오층탑. 왜 쌍탑으로 지칭하지 않은 걸까? 아직 정설로 수용되는 이야기는 없고 의견만 분분하다. 결국은 화엄사의 주전각인 각황전과 대웅전과 관련해서 해석되어진다. 김봉렬교수에의하면  화엄사의 주불전은 각황전이 되어야하지만 진입동선을 고려 중정을 비교해보면 대웅전이 중심 전각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김봉렬 교수의 재미진 이야기를 들어보자. "화엄사 본 마당에 오르려면, 보제루의 동쪽 끝을 돌아 마당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보여지는 광경이 바로 화엄사의 주된 표정으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커다란 각황전과 작은 대웅전의 크기와 높이가 거의 같게 보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트릭이 있다.

 

즉, 본 마당의 입구로부터 각황전은 멀리 떨어져 있고, 대웅전은 가깝다. 또한, 본 마당은 가자의 석단을 둘러 조성하고, 석단 위에 건물들이 배치되는데, 각황전은 석단에서 멀리 물러 앉았고, 대웅전은 가깝게 다가 앉았다. 이러한 건축적 장치를 통해서 각황전과 대웅전은, 그 절대적 크기와는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같은 크기로 보이며, 두 개의 동등한 중심 전각의 위상을 같게 된다."

 

또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탑에 관련되는 부분도 가져온다. 물론 두탑을 동시대에 조성한 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왜 이처럼 의도했을까? 화엄사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답을 구할 수 없다. 원래 화엄사는 절 이름과 같이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창건되었다. 그리고 현 각황전 자리에 장육전을 짓고 중심 전각으로 삼았다. 이때만 해도 아직 대웅전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장육전 앞에는 一자 석축만 쌓고, 그 아래 마당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 지금의 화엄사 서탑이다. 이처럼 창건시에는 1금당 1탑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가람의 구조를 후삼국 통일과 연관하여 해석하고 있다. " 후삼국시기에 화엄종은 두 파로 갈리게 된다.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북악파는 왕건의 편에 서서 고려 건국의 승리자가 되고, 화엄사를 중심으로 한 남악파는 견훤의 편에 섰다가 패배자가 되고 만다. 남악파의 중심이었던 화엄사는 이 때 주인이 바뀌어, 더 이상 화엄종의 사찰이 아니라 법화신앙 계열 (혹은 선종계열)의 사찰로 소속이 변화한다.

 

법화신앙계 가람은 흔히 쌍탑식 형식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불국사 대웅전 앞 마당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를 형상화 한 것으로, 법화신앙의 중요한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서탑과 나란히 동탑을 세워 쌍탑 형식을 완성했다. 현재 본 마당에 있는 쌍탑은 동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탑이 단독으로 세워진 후, 150년 후 쯤에 동탑이 추가된 것이다. 자세히 비교하면 두 탑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또한, 법화신앙의 상징 불전인 대웅전을 세워서 가람의 중심 전각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존의 장육전을 없애고 그 자리에 대웅전을 신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육전은 없애기에는 너무나 장중하고 중요한 전각이었다. 따라서 보존할 필요가 있었고, 장육전의 자리를 피해 새로운 자리에 대웅전을 세울 필요가 있어서, 현재의 자리를 골랐고, 가람의 주 진입 방향도 현재와 같이 바꾸었다. 원래는 현재 승방이 있는 동쪽 계곡에서 올라오던 것을, 지금과 같이 계곡을 타고 남쪽에서 오르도록 변경했다.

이렇게 되면, 위치상으로 대웅전이 가람의 중심이 되게 된다. 또한, 대웅전 앞에 새로 추가된 동탑은 자연스럽게 대웅전 소속이 되어, 각황전-서탑 / 대웅전-동탑의 구도가 완성되고, 기존의 1탑1금당제의 화엄사찰의 건축적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웅전+쌍탑제라는 법화신앙의 가람형식을 성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종파와 교리가 바뀌었지만, 과거의 형식을 존중하여 보존하고, 그 위에 새로운 형식을 추가했던 옛 스님들의 겸손과 지혜야 말로, 한국 불교의 역사를 아직도 지속시키고 있는 근본적인 힘이 아닐까? 화엄사 앞 마당에 설 때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건축적 장면이요, 역사의 증명이며, 교리적 화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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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 동탑. 지대석을 2단으로 깔고, 단층기단. 기단 갑석에는 턱을 두었다.탑신은 2층이 1층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었고, 3층 이상은 체감이 심하다. 옥개석은 물매가 완만하며 층급받침은 4단을 두었다.

 

처마는  위아래 면을 모두 직선으로 하고 윗면만 네 모서리에는 반전이 희미하다. 상륜은  노반과  복발 위에 비교적 높은 형태의 원통형 기둥을 세운 다음 보주를 두어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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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 앞 서탑.석탑과 쌍을 이루고 있다. 동탑과 달리 층급받침이 오단에 이중기단이며 기단과 탑신에 조각을 가득 채워 장엄을 나타내고 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이 땅 속에 매몰되어 있으며 현재 면석 이상만 노출되어 있다. 

 

각 면에 3개씩 모두 12개의 안상을 새긴 속에 각 방위에 따른 12지신상을 새겼지만 구분이 어렵다. 상층기단에는 탱주로 구획하여 고부조 팔부신중을 모셨다.1층 탑신에는 대좌위에 사천왕을 새겼다. 상륜은 노반 복발과  보주를 하나의 돌에 새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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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 배례석. 정면과 후면에는 각 2개, 양 측면에는 각 1개의 안상을 새겼다. 윗면에는 3개의 연꽃을 연속해서 새겼는데, 배례석 상면에 가득 찰 정도로 크며 비교적 고부조로 조각되었음이 특징이다. 각 연꽃은 커다란 원형의 연밥 주변으로 내외 2중의 연잎 8개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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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새벽은 일찍 오지만 도량석과 예불을 마치고 이제 하루가 시작된다.

 

문득 원성스님 시집 풍경이 떠오른다.

 

왜인지?

 

나를 바라보기...원성스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나는 언제나 겁이 많다

싸움을 하면 옹졸했고
시샘이 많아 욕심도 많았다

잠이 많아 부지런하지도 않고
기억력이 없어서 공부도 못했다

잘 참지도 못해 끈기도 없을 뿐더러
마음이 약해 눈물이 많다

누가 내 약점을 알까 봐 위선을 떨었고
잘난 체하려고 가식적이었다

남의 말을 듣기 전에 내 말이 앞섰고
내 생각대로 해 버리는 고집쟁이였다

욕망은 생각에서 지울 수 있지만
외로움은 견딜 수 없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나쁜 것만 모조리 안고 있는
나를 보고, 나를 알고
나를 탄식한다

나를 내보임으로써 집착을 버리고
나를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방법을
나는 선택했다

나약한 인간이라 인정하며
스스로를 기만하며 살고 싶지 않았기에...

 

 

2008.04.15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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