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구례군

[스크랩] 구례...연곡사 서부도, 3층탑

임병기(선과) 2008. 6. 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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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에 대한 자료는 앞의 글처럼 한국전통사찰 정보에서 원문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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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도 바로 뒤쪽에는 2기의 부도가 있다. 모두 조선시대 후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며 부도의 주인공은 알 수 없다. 이밖에 주변에 역시 조선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종형 부도 1기와 최근에 조영된 종인화상부도(宗仁和尙浮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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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경내의 서쪽에 조선시대 후기의 부도 2기와 함께 있는 서부도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불타버린 연곡사를 중창한 소요대사(1562~1649년)의 부도로 효종원년(1650년)에 조영된 부도이다. 기단부와 탑신부 및 상륜부로 구성된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 조영된 부도로서는 드물게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했던 팔각원당형 부도의 형식을 잘 따르고 있다.

 

같은 연곡사 안에 있는 동부도와 북부도의 영향을 받아 조영된데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각수법이나 세부적인 조각 내용은 동부도나 북부도와는 달라 이 부도만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전체적인 비례가 아름답고 우아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조선후기 부도 중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은 팔각형 평면의 두툼한 판석 1장을 사용하였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높이를 2등분하여 아래 부분에는 아무런 조각을 베풀지 않았다. 반면에 상부는 원형 단면의 띠에 운룡(雲龍)무늬를 가득히 조각하여 용이 호위하는 구름 위의 천상세계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운룡무늬의 띠 안쪽은 오목하게 파냈고, 그 안쪽에는 복련을 조각했으며, 다시 안쪽으로 쇠시리 한 단을 두어 중대석 괴임으로 삼았다. 상부를 오목하게 파냈기 때문에 물이 고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멍 1개를 파내어 배수구로 삼았다. 이러한 하대석의 조형은 다른 부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부도만의 독창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중대석은 8각형 평면으로 중앙부를 두툼하게 만들어 북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었다. 상하에는 복련과 앙련을 윤곽만 단순하게 새겼으며, 그 사이 중간은 아무런 조각도 베풀지 않았다.

 

상대석은 아래에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괴임으로 삼았고 각 모서리에 1개 씩 모두 8개의 커다랗지만 단순한 형태의 앙련을 새긴 사이에 간엽을 새겼다. 상대석 상부에는 탑신괴임을 이루는 쇠시리 1단을 두었다. 쇠시리는 1/4원으로 높이가 높은 편이다. 이곳에는 앙련을 새겼는데, 비틀린 형태로 새겼음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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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은 그 하면의 탑신부와 만나는 곳에 두 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다. 층급받침에서 처마에 이르는 부분까지는 비교적 평탄한데 두 단으로 구성하여 서까래와 부연이 놓이는 부분을 표현하였다. 서까래와 부연은 생략하였으나 겹처마를 표현하는 구성으로 모서리에는 추녀와 사래를 조각했다. 서까래가 놓여야 할 부분에는 가득히 섬세한 조각을 베풀었고, 부연이 놓여야 할 부분에는 아무런 조각도 베풀지 않았다.

 

처마선에는 막새기와를 조각하는 대신 물결무늬와 연주문, 그리고 2줄의 수평선을 새겨서 장식했다. 지붕면은 반곡을 주었으며, 추녀마루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면에는 아무런 조각도 베풀지 않았으나 그 상면에는 연주문 띠를 돌렸다. 상륜은 앙화 위에 북 모양의 복발을 놓았으며, 그 위에 새를 조각하고 보주로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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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은 모서리에 기둥을 새기고 각 면의 상하에는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창방과 인방을 표현함으로서 각 면의 윤곽을 강조하였다. 정면에는 문액을 새긴 속에 자물쇠를 조각함으로서 문비를 형상화하였다. 문액 상부는 홍예형을 조출하였는데, 자물쇠의 형상이나 홍예형 등은 모두 동부도와 북부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후면에는 두 줄의 종서(縱書)로 “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庚寅”이라는 명문을 새겼다.

 

순치 6년은 조선 인조 27년(1649년)으로 간지(干支)로는 을축(乙丑)에 해당하며 소요대사가 입적한 해이다. 경인(庚寅)은 그 이듬해인 1650년(효종 1)에 해당하는데, 이렇듯 연도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정면과 후면을 제외한 나머지 6면에는 신중상을 조각했다. 신중상은 상당히 고부조로 조각했는데, 비례가 둔중한 것이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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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도는 정확한 조영연도와 주인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 후기에는 드문 팔각원당형의 부도로서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이 우아한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연곡사에 있는 동부도와 북부도를 모본으로 삼았으면서도 각 부분의 구성과 형태, 조각의 내용이나 수법 등에 독창적인 면이 엿보인다. 500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뛰어난 부도를 간직한 연곡사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조선 후기 부도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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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의 승려인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탑비로 고려 979년(경종 4)에 조영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탑신이 소실되어 현재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귀부는 지대석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어깨 너비에 비해 높이가 높은 편으로 비례에 있어서 같은 연곡사에 있는 동부도탑비의 귀부와 차이를 보인다.

 

머리는 몸체에 비해 큰 편으로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다. 눈을 비롯해 눈썹과 코 등을 크게 강조하여 힘이 느껴진다. 목은 귀갑에  뭍혀 있으며 지대석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발과 꼬리는 경직된 모습으로 퇴화된 수법을 보인다. 귀갑에는 육각형의 귀갑무늬를 반복시킨 속에 꽃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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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받침은 귀부 폭이 좁기 때문에 몸체 너비에 해당할 정도여서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진다. 전면과 후면에는 두 개씩의 안상을 새겼고 양 측면에는 안상을 새긴 속에 아래에서 피어오른 꽃을 새겼다. 상면에는 상방에 복련 띠를 돌렸다.

 

이수는 전체에 운룡무늬를 가득 채워 조각했다. 네 모서리에는 머리를 세우고 있는 용 한 마리씩을 새겼고, 전면과 후면에는 각각 2마리씩의 용을 신체와 함께 조각했는데, 전면은 풍화가 심한 반면 후면의 것이 잘 남아있다. 이수 정면 중앙에는 액(額)을 만들고 종서(縱書) 두 줄로 ‘玄覺禪師塔碑’라는 명문을 새겼는데, 풍화가 심해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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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연곡사 서쪽, 일곱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마치 무대장치처럼 비석 하나를 품고 있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義兵將高光洵殉節碑)’가 그 동백나무들이 만들어놓은 어둠 속에 외롭게 서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이 순절비가 서있는 곳에서 육십 노구의 한 의병장이 피를 흘리며 동백나무 밑동에 기대어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쳐다보던 지리산의 시린 하늘을 동백나무숲도 같이 보았을 것이다. 의병장의 마지막 부르짖음도 틀림없이 같이 들었을 것이다.

“선비가 의로써 죽는데 무엇이 외로울 것인가. 구국은 멀지 않았다. 괜찮다.”

 

녹천 고광순(1848~1907)은 헌종 14년 전남 담양 창평 유천리(柳川里)에서 났다. 장흥 고씨(창평 고씨) 집안은 임란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준봉(準峰) 고종후(高從厚),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 삼부자(三父子) 모두가 목숨을 바쳤다. 그래서 고씨 집안은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 위패를 옮기지 않음) 집안으로 유명하다. 국가에 큰 공로를 이룬 인물은 4대가 지나도 위패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 국가에서 지정한다. ‘불천위’가 3명이 나온 조선조 초유의 집안이니 후손들의 명조(名祖)에 대한 자긍심을 알 수 있다.

고광순은 자를 서백(瑞伯), 호를 녹천(鹿川)이라 하였다. 광순은 고인후의 봉사손(奉祀孫)이었으니 피로 전해오는 절의정신이 남달랐다. 학문에 전념해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비리와 부정이 난무하던 과거장을 목도하고 크게 실망해 낙향하고 말았다.

구국의 민족 성전(聖戰)이었던 한말의 의병전쟁은 두 시기에 걸쳐 크게 일어났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민비 시해와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일어났던 ‘을미의병’과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군대 해산을 당하면서 일어나 합방 이전까지 전개되었던 ‘정미의병’이 그것이다.

특히 8년간 항전한 정미의병의 중심은 ‘호남의병’이었다.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고광순의 나이 58세 때인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전국은 다시 의병진의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호남의 중기의병은 1906년 태인에서 최익현, 임병찬이, 1907년에는 장성에서 기우만, 남원의 양한규, 광양의 백낙구, 장흥의 백홍인 등이 도모했다. 그러나 의병장들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체포되거나 패퇴되었다.

오직 고광순 창평의병만이 남게 되었다. 60세의 유림의병은 이제 풍찬노숙 앞날이 험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07년 7월 이후로 기삼연, 김용구, 김태원, 심남일, 이대극, 양회일, 임창모, 전수용, 이석용, 황순모 등 수많은 후기 유생의병장의 선구가 되었으니 역사에서 외롭지 않았다.

 

고광순은 광양의 백낙구 등과 함께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906년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날 모인 군세가 미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백낙구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진의 순천 공략전은 실패했다.

그러나 녹천은 굴하지 않았다. 고종이 의병장에게 ‘총리영사 의병대장’이라는 칭호로 밀지를 보내 왔다.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담양군 대전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때마침 남원 양한규 의병으로부터 연합작전 제의를 받아 남원으로 이동했으나 이미 본진이 와해된 뒤였다.

그후 고광순은 능주의 양회일, 담양의 이한선, 장성의 기삼연 등과 힘을 합해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았다. 창평의진의 활약이 컸기 때문에 일제조차도 고광순을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불렀고, 폄하의 뜻으로 ‘거괴’(巨怪)라고도 했다. 왜병은 그대로 있지 않았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전후하여 의병의 근거를 멸절하기 위해 의병장과 의병 관련자의 집을 불태우고 가족을 참살했다. 참혹한 보복이 의병장의 고향 유천리를 피로 물들였다.

녹천은 집이 불바다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대열을 새로 정비하고 결사항전을 구상했다. 마지막 국권을 상징하던 독립기이던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이라고 적어 이른바 ‘불원복기’를 진용의 선두에 세워두고 의병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에서 ‘소멸했던 양기가 머지 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 ‘멀지 않아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표상한 것이다.

그는 또 1907년 9월부터 게릴라식 전술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축예지계’(蓄銳之計)를 선택했다. 그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는 지리산이었다. 고광순 의병이 지리산에 들어갈 즈음 일제 군경은 의병을 쫓아 혈안이 되어 있었다. 10월 9일 일제의 연곡사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광주에서 주둔하던 1개 중대, 경남 진해 중포대대(重砲大隊)에서 파견된 소대 병력, 진주 경찰서 소속 순경 등은 의병 측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고광순 의병의 주력은 섬진강 화개동의 일제 군경을 기습하러 출동한 뒤였다. 연곡사에 남은 의병은 고광순 의병장과 언제나 의진에 함께 했던 고제량 부장과 10여 명의 의병뿐이었다. 왜병은 연곡사를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적의 집중포화는 절의 창문과 벽을 벌집처럼 뚫어버렸고 지붕의 기왓장이 모조리 박살났다. 의병도 응사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고광순은 의병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살길을 찾길 바라오.”

부장 고제량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당초 義로써 함께 일으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모두 울음을 삼켰다. 고광순은 좌익장 광훈과 광문에게 의병의 명부와 불원복기를 가지고 빠져나가 후환을 막고 항쟁을 지속하라는 당부를 내리고는 총 한 자루를 들고 단신으로 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왜병은 연곡사를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다. 고광순, 고제량의 시신마저 불타기 직전, 절 인근에 사는 임준홍이라는 농부가 두 사람의 시신을 승려들이 채소를 가꾸던 채마밭으로 옮겨 솔가지로 덮어 놓았다. 광훈과 광문은 절 뒷산으로 빠져나가 간신히 탈출했고 나머지 몇 몇 의병들도 흩어졌다.

고광훈은 상포를 준비해 나흘이 지난 다음 연곡사 터를 찾았다. 오열을 삼키며 시신을 거두어 절 부근 땅에 임시 봉분을 만들었다. 다음날은 우국시인이던 매천 황현이 연곡사를 찾아와 성분(成墳)하고 곡한 다음 무덤 곁에서 추모시 한 편을 남겼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구나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떼만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들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출처...광주 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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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및 상륜부로 구성된 전형적인 신라계 석탑이다. 기단부와 탑신부는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나 상륜부는 소실되고 반구형의 복발만 남아있다.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은 기단이 2층으로 구성됨에 반해 이 석탑은 기단부가 3층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특징이다. 하층기단은 면석과 갑석 부분만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데 전체 기단부의 구성과 비례로 보아 기단을 받치기 위한 시설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인지 면석에는 우주나 탱주를 새기지 않았고 갑석 상면에도 중층기단을 받치기 위한 괴임을 두지 않았다. 이처럼 하층기단이 기단을 받치기 위한 시설로 사용되었음은 중층기단에 지대석을 별도로 새겨놓은 점에서도 나타난다.

 

중층(重層)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부에 별도로 지대석을 조출함으로서 그 하부의 하층기단으로부터 독립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지대석은 면석과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면석에는 우주와 함께 각 면에 하나씩의 탱주를 조각했다.

 

갑석은 상면에 구배를 주었고 상층기단의 면석을 받치기 위한 괴임으로서 쇠시리 두 단을 두었다. 쇠시리는 아래 것은 1/4원으로 충분한 크기로 하였고, 위의 것은 비교적 아래 단 쇠시리 상부를 음각에 가깝게 만듦으로서 그 존재만 나타낼 정도로 간략화되었다.

 

상층(上層)기단은 중층(中層)기단에 비해 너비를 많이 줄인 대신 높이를 높여 중층기단과 함께 신라계 석탑의 전형적인 기단 형식으로 만들었다. 면석과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별도의 돌로 만들었다. 면석은 모두 4장의 석재를 사용했고 우주와 탱주 하나 씩을 새겼다.

 

갑석은 아래에 운두가 높은 쇠시리 한 단을 두어 면석과의 연결을 부드럽게 하였다. 상면은 약간의 구배를 주었으며, 처마처럼 네 모서리로 가면서 약간 반곡시켜 조형을 부드럽게 했다. 또한 탑신괴임을 두 단 두었는데 1/4원이 아닌 직각에 가깝게 쇠시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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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기단.

 

각층 탑신과 옥개는 각 1개씩의 석재를 사용해 만들었다. 탑신에는 우주만 조출했을 뿐 아무런 장식조각도 없다. 옥개석은 높이가 낮은 층급받침 4단을 두었으며 절수구 대신 하면 아래쪽을 약간 파냄으로서 절수구를 대신하였다.

 

옥개석은 처마부에 반곡을 주어 네 모서리를 높게 하였다. 지붕면은 반곡을 주었는데 상면이 상층 탑신부에 비해 넓은 편이어서 지붕면의 반곡된 곡선이 S자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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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전체적으로 신라계 석탑의 조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기단부를 3층으로 구성하여 변화를 주었고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작아졌다. 세부에 있어서도 괴임부의 쇠시리가 형식화되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도 4단으로 줄었을 뿐 아니라 각 단의 높이도 매우 낮아졌으며, 절수구의 처리방법도 약화되었다.

 

또한 옥개석도 상면이 상층 탑신에 비해 넓고 지붕면도 S자형의 곡선으로 만들었다. 신라계 석탑의 모습을 따르면서도 많은 변화를 준 석탑으로서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에서 많이 시대가 내려온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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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4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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