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구례군

[스크랩] 구례...연곡사 동부도,북부도

임병기(선과) 2008. 6. 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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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국전통사찰정보에서 수정 없이 원문을 가져와 문장 배열만 일부 수정했다. 부도중의 부도 동부를 비롯 나의 해석은 사족에 불과하기에...

 

절의 연혁을 적고 있는 기록으로는 1924년에 정병덕(鄭秉德)이 집록한 '지리산화엄사사적(智異山華嚴寺事蹟)' 말미에 기록된 <연곡사사적(谷寺事蹟)>이 거의 유일하다. 이에 의하면 연곡사는 신라 진흥왕 4년(543년)에 화엄종의 종사(宗師)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연곡사를 중창한 소요 태능 역시 연곡사는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시로 읊고 있다. 그러나 543년에 이 지역은 백제 땅에 속하였으므로 이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기록은 믿을만한 근거가 없다. 한편 최근에 들어와 연기조사는 8세기에 실존하였던 인물로 밝혀졌다.

 

연기조사는 당시 화엄종과 연관이 깊은 승려로 인접한 화엄사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연곡사는 화엄사의 창건과 연관하여 연기조사에 의해 8세기 무렵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곡사는 신라 말에 들어와 크게 번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연곡사에는 신라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부도와 삼층석탑 및 동부도탑비,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북부도와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가 남아있다. 모두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뛰어난 석조물들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연곡사는 상당히 번영하였던 사찰로 추정되며, 선찰(禪刹)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 이후 고려시대 전반에 걸친 연곡사의 연혁은 전혀 알 수 없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전까지의 연혁에 대해서도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남원 <불우>조에 “谷寺 在智異山 有高麗學士 王融所撰玄覺禪師碑”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도 계속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연곡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 시도유형문화재 107호.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쓴 임진왜란의 야사이다.

 

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인 선조 31년(1598년) 4월 10일 왜적 400여 명이 하동과 악양을 거쳐 지리산의 쌍계사, 칠곡사, 연곡사까지 들어와 살육과 방화를 일삼았다고 한다. 이 때 연곡사도 불타버렸다.

 

불타버린 연곡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逍遙 太能(1562~1649년)에 의해 중창된다. 현존하는 연곡사 서부도는 효종 원년(1650년)에 조성된 소요대사의 부도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부도 중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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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 스님의 중창 이후 연곡사는 영조 21년(1745년) 밤나무로 만드는 왕가(王家)의 신주목(위패목) 봉납소로 선정되고 연곡사 주지가 도제조로 임명된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들어와 연곡사는 신주목 봉납의 폐해로 폐사되기에 이른다. 1895년 무렵 왕가의 밤나무 남용으로 부담이 증가되자 절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이에 견디지 못한 승려들이 절을 떠남으로서 절은 폐사가 되고 만다.

 

20세기에 들어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무렵 연곡사는 고광순 등으로 대표되는 호남 의병의 의병활동 근거지가 됨에 따라 왜병들에게 방화된다. 1924년에 다시 박승봉이 700원을 들여 이곳에 심우암을 창건하지만 한국동란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다. 이로서 연곡사에는 석조물을 제외한 건물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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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모신 연곡사의 주불전이다. 일주문에서부터 연속된 중심축선상의 가장 뒤쪽에 남향하고 있다.

 

평면은 도리통 5간, 양통 3간으로 도리통은 어간을 다른 간에 비해 넓게 설정하였고, 협간과 툇간은 동일한 주간으로 설정하였다. 정면에는 어간에 사분합, 협간과 툇간에 쌍여닫이문을 달았고, 양 측면에는 전퇴에만 외여닫이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벽을 쳐서 감실형의 평면을 구성하였다.

 

내부에는 측면의 기둥에 비해 후면 쪽으로 후퇴시킨 곳에 세운 내주(內柱)에 의지해 후불벽을 만들고, 3간 너비의 불단을 조성하여 본존과 협시를 모셨다. 불단 앞에 넓은 예불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는 평면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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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도

 

연곡사는 깨침의 세계만이 남아 있는 도량입니다. 깨침의 세계만이 연곡사의 수행의 역사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연곡사의 깨침의 세계는 석조문화의 진수라고 불리는 부도입니다. 연곡사의 부도는 돌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가는 길을 알려주는 깨침의 세계이며, 선지식의 수행의 표상입니다.

 

연곡사 동부도는 동부도비와 함께 대적광전 뒤쪽 산기슭에 별도로 조성한 대지에 위치하고 있다. 부도는 축대를 쌓아 조성한 대지의 뒤편에 남향하고 있으며, 그 앞쪽의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 탑비가 동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부도를 중심으로 그 앞쪽의 한쪽에 치우쳐 탑비를 배치하는 것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일반적인 배치방법이라 할 수 있다.

 

동부도는 지대석과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갖춘 기단부, 탑신과 옥개석으로 이루어진 탑신부와 상륜부를 갖추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신라 말 선종과 함께 유행하기 시작한 소위 ‘팔각원당형’ 부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는 부도로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날씬한 조형과 비례, 섬세한 조각수법과 장엄 내용의 풍부함 등에 있어서 신라 말에 조영된 팔각원당형 부도 중 뛰어난 것에 속한다.

 

이 부도는 신라 말에 조영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부도로 안정되고 날렵한 조형과 비례, 각 부분의 섬세한 조각수법과 다양하고 풍부한 장엄 내용은 동시대 부도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만하다. 한편 이 부도는 도선국사(827~898년)의 부도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밀반출될 뻔 하였으나 다행히 현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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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을 매우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처마 아래는 한 단의 쇠시리를 두어 옥개받침을 이루도록 하였으며, 그곳에 聯珠무늬를 조각했다. 이곳에서 서까래 아래까지는 볼록한 호형(弧形)을 이루도록 하였고 모서리에는 공포의 살미를 표현하였으며, 그 끝에 주두형의 부재를 두어 외목도리를 받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출목이 있는 공포의 모습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볼록한 호형을 이루는 각 면에는 화려한 모습을 조각하였다. 처마부에는 서까래와 부연, 추녀와 사래를 지닌 겹처마를 새겼다. 서까래는 각형(角形)으로 새겼으며, 추녀 부분에서는 선자서까래 형태로 배열하고 있다. 사래 끝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풍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기와골을 표현하는 등, 기와가 올려진 지붕의 모습도 섬세하게 조각하였는데, 암막새와 수막새까지 조각하였고, 막새기와 속에 기와의 무늬까지 새겨놓는 섬세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지붕면은 심하게 반곡되어 있으며, 내림마루가 숫마루장 및 그 끝의 막새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상륜은 매우 복잡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맨 아래 복잡한 형상을 한 앙련을 8엽 새겼고, 그 위에 보륜을 두 단 올렸다. 다시 극락조를 4면에 새긴 돌을 올렸으며, 다시 앙련 위에 화염무늬로 장식된 보주가 올려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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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석은 하대석이나 상대석과는 별석(別石)으로 만들었다. 팔각형 평면으로 아래에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하대석 상부의 쇠시리 한 단과 함께 중대석을 받치는 괴임을 이루도록 하였다. 각 면에는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안상형을 새긴 속에 팔부신중을 새겼다. 저마다 다른 지물을 들고 있으며, 팔과 다리의 비례가 강직하여 팔부신중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반면 매우 유연하게 표현된 신체와 하늘하늘하게 날리는 옷자락은 비천주악상을 연상시킨다. 

 

팔각형 평면의 탑신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다. 기둥은 평면적이며, 그 상부에 두 겹의 수평 부재가 놓여 있다. 아래의 수평재는 창방을 표현한 것이며, 상부의 수평재는 뜬장여 또는 도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상하 수평재 사이에는 짧은 기둥형의 부재 위에 소로를 올려놓았다.

 

고대 목조건축에서 일반적이었던 기둥형의 화반구조를 표현한 것이다. 기둥머리에는 주두를 올렸으며 그 위에 단여와 같은 짧은 부재를 두어 상부의 수평재를 받치도록 하였다. 신라 말 팔각원당형 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목조건축의 구조를 비교적 충실히 묘사하고 있다.

 

기둥과 창방은 탑신의 각 면을 구획하고 있으며, 그 안에 여러 가지 내용의 부조를 하였다. 정면과 후면에는 장방형의 구획을 하여 문틀을 만든 속에 문빗장과 두개의 문고리를 새겨 문비(門扉)임을 조각하였다. 문상방 위에는 홍예형의 윤곽을 만든 속에 섬세한 조각을 베풀었다.

 

양 측면에는 탁자 위에 보주 및 화염무늬 등으로 장식된, 원형 평면으로 된 가옥형의 향로를 새겼다. 나머지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했는데, 복식의 묘사가 매우 섬세하며 상호는 여성스러운 부드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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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석은 방형으로 하대석과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맨 아래 지대석과의 연결을 위한 쇠시리를 두었고 맨 위에 다시 중대석을 받치기 위한 쇠시리 한 단을 두었다. 그 사이를 전체 3단으로 구성하였는데, 맨 아래 단에는 운룡(雲龍)을, 중간 단에는 아래 단과 연결시켜 구름 무늬를 조각했다.

 

맨 위 단은 8각형의 모서리마다 원주형을 새겨 각 면을 구획하고, 각 면의 상부 역시 원형 단면으로 곡선형의 구획을 두어 각 면의 화면을 구획한 속에 사자를 돋을새김 하였다. 여덟 마리의 사자는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비교적 고부조로 새겼는데 그 느낌이 매우 부드러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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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도비

 

동부도 앞 서쪽에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동부도비는 비신(碑身)이 소실되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얹혀 있으며 지대석 윗면, 귀부의 가슴 앞으로 연꽃 모양의 받침부를 조각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귀부는 크기가 크지 않은 편으로 목은 짧고 머리도 작은 편에 속한다. 귀부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귀갑무늬를 새긴 귀갑 위에 날개를 새기고 있다는 점이다.

 

귀부에 날개를 새긴 점은 다른 귀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성으로 이 귀부의 독창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독창성이 돋보이는 반면 네 발과 꼬리는 형식화되어 기운찬 모습을 잃고 있다. 머리는 깨져서 이탈되었던 것을 보수하여 복구한 것이다.

 

귀부 중앙에는 장방형 평면을 이루는 비신받침을 두었다. 귀갑과의 사이에는 구름무늬를 새겨 그 위가 천상(天上)의 세계임을 암시하였다. 구름무늬 위에는 몇 단의 쇠시리를 두어 비신받침을 이루도록 하였는데, 그 중 한 단에 복련을 새겼다.

 

이수는 장방형 평면으로 네 면에 운룡무늬를 새긴 위에 화염무늬로 장식된 보주를 조각한 모습이다. 운룡무늬의 조각은 상당히 힘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윤곽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 새겨진 용 역시 매우 섬세한 조각으로 기운찬 모습을 하고 있다. 이수 정면 중앙에는 방형에 가까운 편액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는 원래 탑비명이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완전히 풍화되어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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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도

 

북부도는 동부도에서 산 위로 좀 더 올라간 곳에 축대를 쌓아 마련한 좁은 대지 위에 서있다. 세부적인 모습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동부도와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조형을 지니고 있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부도이다.

 

이 부도는 지대석과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 탑신과 옥개, 그리고 상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가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의 형식을 지닌 부도이다.

 

지대석은 방형 평면으로 하대석 하단 부분과 함께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전체가 크게 두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부는 지대석과 한 돌로 되어 있고, 복련을 새긴 상부는 별도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대석과 만나는 부분에는 두 단의 나지막한 쇠시리를 두었고, 그 위에 운룡(雲龍)무늬를 조각했다.

 

이 지대석과 하대석 하부를 이루는 석재는 화강석으로 그 상부의 석재와는 석질에 차이가 있다. 복련을 새긴 하대석의 상부에는 각 면과 모서리에 각 하나씩 모두 8엽을 새겼다. 모서리에는 귀꽃이 돋아난 모습을 새기고 있다.

 

중대석 역시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부와 하부에 쇠시리를 두었다. 각 면에는 안상을 새겼으며, 그 속에 팔부신중을 새긴 것으로 보이는데 풍화가 심하여 정확한 조각내용은 알 수 없다.

 

상대석은 앙련을 새긴 하부와 가릉빈가를 새긴 상부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꽃은 각 면과 모서리에 하나 씩 16엽의 앙련을 새긴 위에 그 사이사이에 하나씩의 앙련을 두어 2중으로 구성했고, 상부의 연잎 사이로 다시 작은 간엽을 조각한 모습이다.

 

상부는 모서리에 고부조로 기둥을 새겨 각 면의 윤곽을 강조하고 각 면에 안상을 새긴 속에 가릉빈가를 조각하였다. 다시 삳새석 상면에는 몇 단의 나지막한 쇠시리를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그 중 한 단에는 복련을 새겼다. 이 상대석의 구성과 조각형태는 동부도와 거의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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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개석은 탑신석과 만나는 부분에 연주(聯珠)무늬를 새긴 쇠시리 한 단을 두었고, 그 위쪽은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호형(弧形)으로 볼록한 부분을 두었다. 이 부분의 각 면에는 구름을 형상화 한 무늬를 새겼고, 모서리에는 귀포의 한대로 보이는 부재를 새긴 끝에 주두를 두었다. 출목이 있는 공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모두 새겨 겹처마임을 표시했고, 추녀와 사래까지 조각했다. 서까래와 부연은 부채살 모양으로 퍼지게 배열함으로서 선자서까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지붕면은 반곡이 심한 모습이며, 기와골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고, 암막새와 수막새는 물론 막새기와의 무늬까지 새겨 조각의 섬세함을 보이고 있다. 추녀마루도 적새와 숫마루장 및 끝의 막새에 이르기까지 그 구조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륜은 복잡한 구성으로 앙화와 반구형의 복발, 연주무늬와 복련 및 앙련으로 구성된 보륜을 둔 위에 극락조를 새기고, 다시 가장 위에 앙화가 보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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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은 각 모서리에 기둥을 새기고 목조건축의 세부를 비교적 상세히 표현하였다. 기둥 상부에는 창방을 조각했으며, 기둥머리에는 주두를 올리고 그 위에 단혀 형태의 짧은 부재를 두어 장혀 또는 도리로 보이는 그 위의 수평재를 받도록 하였다. 또한 주간에는 창방 위에 각 1개씩의 소로를 조각했다.

 

풍화가 심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주간의 소로 아래는 복화반 형식의 부재가 놓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목조건축의 변화과정을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사료가 된다. 주간의 소로 아래에 기둥형 대신 복화반 형태의 부재가 사용된 것을 제외하면 목조건축의 표현은 동부도에 표현된 것과 동일하다. 기둥 하부에는 하방으로 볼 수 있는 수평재를 조각함으로서 탑신의 각 면은 그 윤곽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다.

 

정면과 후면에는 문비를 조각했다. 문설주와 문상방에는 중앙에 양간된 쇠시리 한 단을 두어 쌍사를 친 것처럼 장식했다. 문설주 아래는 신방목까지 표현하고 있으며, 문상방 위에는 첨두형으로 만든 홍예형을 두고 그 속에 꽃무늬로 보이는 조각을 하였다. 문 안에는 문고리와 함께 자물쇠를 표현하고 있는데, 자물쇠와 문고리는 문짝에 비해 큰 편이며, 그 조각 내용 역시 화려하고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양 측면에는 향로를 조각했고, 나머지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했다. 사천왕상은 풍화가 심한 편이어서 그 세부적인 모습까지는 알 수 없으나 동부도에 비해 경직된 모습을 하고 있어 시대적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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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도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부도이다.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안정감 있고 날렵한 조형, 섬세한 조각과 풍부하고 다양한 조각 내용으로 당시 부도 중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동부도와 비교하여 석질이 떨어지고 풍화가 심한 편이나 일부 세부적인 형태를 제외하면 전체적인 부도의 형태와 조각 수법 및 내용은 동부도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조각 수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부 형식화되고 장식에 치우친 면이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부도에 비해 좀 늦게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렇듯 같은 사역 안에서 조성되면서 동부도의 조형을 상당히 모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부도와 함께 탑비가 근처에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찰에서는 탑비가 부도에 비해 늦게 조성되면서 부도와 좀 떨어진 곳에 조성되는 예도 있다. 북부도 옆에는 탑비가 없으며, 탑비를 세울만한 터전이 없는 것으로 보아 탑비는 연곡사 사역 안 별도의 장소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연곡사에는 현각선사탑비가 부도 없이 세워져 있는데, 현각선사의 부도가 바로 이 부도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2008.04.14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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