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문경시

[스크랩] 문경...희양산 봉암사(1)

임병기(선과) 2008. 6. 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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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산

 

설레임. 그랬다 작은 설레임으로 출발한 길이었지만 여느 답사와는 달리 흥분된 마음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기억 저편 내유년의 한 장면을 찾아가는 발걸음이기 때문일까? 그리움. 가슴저미는 이성간의 애틋한 그리움 못지않게 닫혀진 봉암사를 그리워 했다. 초파일은 개방했지만 그날은 할머니. 어머니를 원찰에 모셔야 하기에 보고픔을 가슴에 품어야 하는 날이었다.

 

들리고파, 보고파 유려한 문장과 미사여구로 포장하여 구구절절, 견강부회 논리를 전개하여 방문 목적을 봉암사에 메일을 송부했지만 한결 같은 메세지 "처사님. 초파일 날 인연을 지으십시요" 였다. 먼날 아주 먼날 내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날 희양산문이 내게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염원, 그 바램은 뜻밖에도 빨리 찾아왔다.

 

대구소재 한국불교대학에서 주관하는 문경 삼사 순례단의 일원으로 두어달전에 신청 후 몇날을 설레임으로 보내야 했었다. 오늘 아침까지도 설레이고 들뜨있던 마음이 희양산을 바라보고 진입하는 동안 차분하게 안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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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봉암사 자료에 의하면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_지증 도헌국사가 창건한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으로,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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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열린 산문이라면 그렇게 보고 싶었을까? 저자거리화된 저급한 사하촌의 요란함에 산문이 닫히기를 바랬던 가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젠가 봉암사 답사를 못해 아쉽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3년전 소풍을 끝내고 귀천하신 선친께서 생전에 말씀하셨다. "야야! 너 초교 입학전 봉암사에 여러번 들렸었다."

 

선친의 초임 발령지가 문경농협이었으며 나도 7살때 1년간 문경에 거주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철길, 대장간, 일본식 가옥,만두집, 서울로 간다는 고갯길 등 우리집 주변의 흐릿한 기억만 남아 있다.

 

처음가는 답사지도 너무나 눈에 익어 깜짝 놀랐던 소위 '데쟈뷰' 현상도 무수히 경험했기에  봉암사에서도 혹 기억의 실타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주의깊게 살피고, 유심히 관찰해보아도 아무런 단서를 찾을 길 없다. 흘러간 시간이 45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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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원경

 

봉암사 결사. 봉암사는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일반인들은 물론 신도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특별 수도원이다. 해방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도우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된다.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대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

 

봉암사 결사의 결과로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자급자족은 물론이고 대처승의 타락한 승풍을 쇄신, 오늘날의 보조장삼, 괴색 가사 채택, 발우공양,금강경.반야심경 독경 등 현재의 생활.의례의 뿌리가 봉암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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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훈루

 

진입동선을 따르면 남훈루를 통과해야한다. 루는 산지가람에서는 2층인 까닭에 누하진입이며,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평지가람에서는 낮은 기둥으로 인해 우회 진입이 일반적이다. 예외적으로 임란의 영향으로 고성 옥천사 자방루, 완주 화암사등의 루하가 폐쇄된 경우도 있지만 봉암사 남훈루는 민가의 솟을문을 연상케하는 구조라 의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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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요즘은 전각의 주련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어떤이는 늙음의 반증이라 서글프다지만 순례후 뜻을 알고 보면 오래오래 되새기게 된다.  

 

불심은 널리 시방 가운데 두루하고

* 삼세의 모든 부처님 하나로 같아라

 광대한 원력의 구름 항상하여 다함이 없네

 넓고 넓은 깨달음의 바다, 신묘하여 궁진하기 어려워라

* 장엄스런 광명은 널리 시방 중에 비추어

* 일천 강에 비친 달 근본은 하나일세

 부처님의 밝은 지혜 원만히 갖춘 모든 성현네

 장엄히 법회에 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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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꽃창살

 

귀면은 무섭기는 커녕 희롱하고 싶다. 꽃창살도 화려하지만 답사때는 보지 못했던 창방의 별지화가 사진에 잡혔다. 별지화는 단청문양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린 그림 또는 장식화를 말하며, 좌우 머리초의 중간부, 채색되지 않은 여백부에 넣으며 주로 사찰건물에 쓰여졌다. 일반적으로 경전, 불타에 관계되는 내용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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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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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합각

 

대웅전 합각 주화문양.  卍. 삼보가 주로 그려지는 합각에 보기 드물게 주화문양이 보인다. 주화문은 감나무 꼭지를 도안한 문양으로 감나무는 기반이 견고하고 뿌리를 깊게내려 지반이 견고하여 전각이 오래 서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며 또한 만사형통의 길상의 뜻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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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측면

 

절집 주전각 벽에는 주로 마음의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단계를 그린 심우도(십우도), 불교 경전, 설화, 팔상도등의 벽화를 그리지만 봉암사 대웅보전 벽에는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나는 장면 즉, 화엄경 입법게품을 그려 놓았다.

 

동행한 유현이는 모든 장면을 사진에 담았다고 연신 싱글벙글이지만 입에 넣어주어도 맛을 모르는 이놈의 중생은 흐린 내마음 마냥 사진도 애매모호하게 잡았구나. 이참에 수년째 완독 못한 고은의 '화엄경'이나 들추어보아야겠다고 작정했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사고를 가진 내게는 작심삼일일이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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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불단


대웅보전에는 우견편단,삼도가 분명한 석가모니불이 운궁형 닫집아래에 좌정하고 계신다. 후불탱은 영산회상도 목각탱(?)이며, 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입상을 모셨다. 그렇다면 주불이 아미타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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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

 

하지만 봉암사의 가장 어르신 전각은 조사당이다. 내부를 보지 못해 어떤 선사, 고승의 진영이 모셔졌는지 알 수 없지만 합각의 길상문양 코끼리 그림이 눈을 사로 잡는다. 조사당은 선종의 도래와 함께 도입된 전각으로, 부도, 철불과 함께 선종사찰의 큰 특징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구산선문이 그러하듯 지증국사 부도비문에 의하면 봉암사에도 철불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2007.08.26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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