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예천군

[스크랩] 예천...선몽대 솔숲

임병기(선과) 2008. 6. 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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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은 늙고 대(臺)는 높아서 허공에 비취를 꽂아 놓은 듯하고(松老高臺揷翠虛)

강변의 흰 모래와 푸른 벽은 그림으로 그려내기 어려운 것 같네(白沙靑壁畵難如)

내 이제 밤마다 선계의 꿈에 의지하노니(吾今夜夜仙夢)

예전에 진작 가서 자주 노닐지 못하였음을 한하지 말게(莫恨前時賞疎)



모래는 깨끗하고 냇물 밝아서 맑기가 텅빈 것 같으니(沙白川明澹若虛)

옥산과 옥구슬 가득한 정원에 비교하면 어떤 것이 더 나은가(玉山瓊圃較何如)

만리 되는 신선의 땅 응당히 이르기 어려울 테지만(仙區萬里應難到)

이 정자에 오고감을 또한 성글게 하지 말자(來往斯亭且莫疎) 


앞의 시는 퇴계 이황(1501~70)이 제자이자 종손자인 우암(遇巖) 이열도(1538~91)가 선몽대를 지은 것을 축하하며 '선몽대(仙夢臺)' 편액 글씨와 함께 써준 것이고, 다음 시는 후일에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이 선몽대에 올라 읊은 것이다. 그 당시에 선몽대와 주변 경관이 그렇게 좋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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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몽대와 접해 강변 둑을 따라 조성돼 있는 숲은 지금도 수령 300~400년은 넘어 보이는, 잘 생긴 노송들이 멋진 자태를 선사하고 있다. 퇴계가 읊은 노송은 생을 다했는지 보이지 않고, 그 시절에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솔숲의 소나무들이 주위에서 가장 오래된 노송으로 남아있다. 선몽대숲이라 불리는 이 노송 숲은 맑은 물이 흰 백사장 사이로 유장하게 흘러가는 내성천과 어울려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멋진 풍광을 만들어낸다.

올려다보면 푸른 노송이 하늘에 꽂힌 듯하고, 선몽대숲과 강변 절벽 위에 자리한 선몽대 및 그 뒷산의 신록이 백사장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림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강변에 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평사십리(平沙十里)의 길고 넓은 모래밭은 지금도 희고 물은 맑아 옥산이나 보석 정원 못지않으니, 신선도 눈독을 들일 만하다. 사람도 없는 한적한 분위기여서 더욱 그렇다.

다만 선몽대 정자가 돌보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고, 숲이 원형을 크게 잃은 점은 너무나 아쉽다. 처음 조성된 선몽대숲은 대부분 농지로 바뀌고, 지금 남아있는 선몽대숲은 원래 숲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듯하다.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내성천변에 자리한 선몽대숲은 어른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껴안아야 될 정도의 노송 20여 그루를 중심으로 단풍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등이 크게 넓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은 숲 남쪽에 접해 있는 농지 주변을 따라 직각으로 꺾어지며 자리잡고 있는 적송숲과 연결된다. 강변 소나무보다는 굵기가 못하지만, 그보다 더 높게 자란 수 백 그루가 있는 멋진 소나무숲이다. 잡목들을 제거하고 정비를 하면 훨씬 더 멋진 풍광이 될 것 같다. 이 솔숲은 100년 정도 전에 조성된 숲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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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몽대숲은 강변 절벽 위에 지은 선몽대 부근에 있는 숲이라서 부르게 된 명칭이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 우암산(선몽대 뒷산) 중턱의 학심대(鶴尋臺)·방학정(訪鶴亭)과 함께 창건한 정자이다.

백송(白松)리는 1530년 쯤 진성(眞城)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마을이다. 입향조인 이굉(李宏)은 퇴계의 둘째 형인 이하(李河)의 둘째 아들이고, 이굉의 아들이 우암 이열도이다. 우암은 종조부인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별시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박사를 역임하고, 고령·경산 현감 등을 지냈다.

우암은 경산현감 때 도백(道伯)이 불러서 갔더니 어느 책 제목을 쓰라고 했다. 우암은 이에 "글씨 쓰라고 나를 오라 하였는가"라며 상관을 꾸짖고는 탕건을 벗어던지고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운학(雲鶴)을 벗삼아 농사를 지으며 후학을 가르쳤다.

선몽대는 우암이 선몽대 자리에 신선이 노니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선몽대 창건을 축하하면서 퇴계는 '仙夢臺' 편액 글씨와 한 수의 시를 써주었다. 이와 함께 약포 정탁, 서애 유성룡, 청음 김상헌, 우복 정경세,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이 써 준 시 현판이 정자 안에 걸려 전해왔으나, 최근에 모두 수거해 다른 장소에 보관하고 있는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우암과 동갑내기이자 퇴계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학봉 김성일은 선몽대를 찾아 우암과 술잔을 나누며 '반쯤 드리운 솔 그림자 푸른 공중에 기울고/ 좋은 술을 대하니 오늘 흥취 어떠할까/ 자네를 빙자해 다시 유(儒)와 선(仙)의 글을 들으니/ 문득 세상인심이 이 땅에 성근 것을 알겠네'라고 읊었다.

현재의 선몽대는 1968년에 중수된 건물이고, 학심대와 방학정은 1950년을 전후해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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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몽대숲은 우암이 선몽대를 창건할 당시에 조성했거나 백송리 입향조인 이굉이 이 마을에 둥지를 틀 당시에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몽대숲은 백송리 마을에서 내성천으로 연결되는 수구(水口)를 막아 수해를 방지하고 매서운 겨울바람을 차단함으로써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했을 비보림(裨補林)으로 보인다.

백송리의 옛 지명은 백금리(白金里)였다. 마을 옆 내성천에 하얗게 펼쳐지는 백사장이 백금같이 반짝인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 한다. 백송리라는 지명에 대해 예천군청 조동윤 문화관광과장은 "백사장의 흰 모래가 바람에 날려 마을 주변의 소나무에 달라 붙어 마치 흰 소나무처럼 보여서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몽대숲 원형은 현재의 규모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조 과장은 "마을에서 선몽대숲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농지의 대부분은 원래 숲이었는데, 60~70년대에 농지로 바뀌면서 숲은 일부만 남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숲 속에는 우암 유허비, 쉼터인 정자, 연자방아, 디딜방아, 벤치, 음수대 등 유적과 편의시설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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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영남일보 길따라 숲찾아 / 김봉규 기자

 

2007.08.04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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