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예천군

[스크랩] 예천...삼강 주막

임병기(선과) 2008. 6. 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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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비어 있다.

ㅎㅎ

빈 주막인 줄 몰랐단 말인가?

 

 

회화나무 그늘을 점령했던 왈짜패도 그립고

 주인 할머니도 뵙고 싶다.

 

텅빈 것은 주막이 아니라

마음이요 사람의 정이 아닐까?

 

쓰러질듯 위태로운 주막 마루에 겉터 앉아

한 잔 하라며 잔을 밀어주는

할머니를  그려본다.

 

가을날

벗과 손잡고 다시 찾으리

잃어버린 사람의 정을 만나러...


 

낙동강·내성천·금천의 3개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 삼강나루로 불리고 주막은 20세기 초반에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족히 100년은 넘은 삼강주막은 방 2개, 부엌, 마루가 전부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무너질듯한 주막만 남아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복원공사를 하겠다는 관청의 안내문이 서 있지만 서글픔이 더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다리가 뚫리던 2004년 4월,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매가 봉당마루에 앉아 쓸쓸히 눈물 훔치셨다고 한다. 할머니를 슬프게 한 것은 다리 준공이 아니라 멀어져 갈 사람의 발걸음 아니었을까? 

 

 

마지막 주모 유옥연할머니의 생전에 인터뷰 기사를 가져 왔다.

 

 

낙동강 삼강주막(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터)의 유옥연 할머니(88)는 ‘우리 시대 마지막 주모(酒母)’이다. 1917년 10월 20일 우막리 태생인 유 할머니는 열다섯살이던 1932년에 네 살 위인 남편과 혼인, 열아홉(1936년) 꽃다운 나이에 삼강주막을 사서 들어갔다. 70년 주모생활에서 겪은 애환이 한둘이랴만, 기쁨도 슬픔도 다 저 강물에 흘려버렸는지 별 말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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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늦었어, 내가 한 70만 됐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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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 집이 곧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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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이대로 놔두고 짚으로 지붕 이고, 수리만 한다네. 그치만 인지(지금) 지정되면 뭐해? 나이 아흔에. 내가 한 칠십(때)만 (지정)됐어도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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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할머니는 삼강주막이 문화재로 지정된다고 해도 크게 반기지 않는다. 혼자서 아침 저녁 끓여먹기도 귀찮은데, 뒤늦게 문화재로 지정되는 게 대수냐는 것이다. 할머니의 체력과 기억력이 좀 더 좋을 때 지정절차를 밟았더라면, 민중사 생활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나루터와 주막, 그리고 우리시대 마지막 주모의 생애사를 더 정확하게 복원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렇지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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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주막과 달지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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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내성천, 금천의 세 강줄기가 합쳐지는 교통요충지 삼강나루터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이 사실 낙동강 700리에서 유일한 주막은 아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낙동강에는 삼강주막 외에 달지주막도 있다. 삼강주막의 강 건너편에 있는 달지주막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 있다. 목청껏 부르면 들릴 것 같은 가까운 거리다. 두 주막 가운데 달지주막은 과객이 묵어갈 수 있는 큼직한 방도 두어개 있고, 말을 맨 흔적도 있다. 이에 비해 삼강주막은 숙박시설 없이 그냥 나그네들이 목이나 축이고 국수나 말아먹으면서 여독을 풀고 발을 쉬어가던 곳이다. 요즘은 밥 달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네 사람들이 더러 놀러나오고, 여름철이면 물놀이 온 사람들이 들르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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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배가 다닐 때는 삼강에 주막 여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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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고배(소금배)가 여기까지 올라왔어. 여름에 물이 많을 때면, (크기가 작은 소금배는) 안동 하회 나루터까지 올라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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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을 따라 낙동강의 맨꽁지인 김해에서 상류인 예안까지 소금, 해산물, 소(牛), 쌀 같은 물자가 오가고, 강을 건너 과거를 보거나 경북 북부지방을 다녀올 때, 그리고 점촌 장날이면 삼강나루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창 때는 주막이 서너개씩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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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 때 다른 주막은 다 떠내려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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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년 물난리 때 떠내려간 27채 가운데 주막도 2채나 된다. 힘센 사람이 양손으로 ‘콱’ 밀면 마치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는 삼강주막이지만 그 많은 물난리를 다 이겨왔다. ‘토끼집’이라고 할 만큼 방도 작고, 천장 없이 지붕 서까래를 이고 살지만 1900년대 초에 나무로 지은 덕에 처마 밑까지 강물이 차고 들어와도 물만 빠지면 집 뼈대는 고스란히 살아남는다. 흙집이 아니어서 물이 빠지면 대강 고쳐서 다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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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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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할머니는 남편이 농사를 지었다고 하고, 동네 사람들은 사공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한창시절, 삼강나루에는 소가 6마리나 들어가는 큰 배와 작은 배 두척이 있었단다. 그러나 뱃길이 끊기고, 나루터 자리에 6년 공사 끝에 삼강교가 놓이면서 자연스럽던 3강의 풍치는 사라졌고, 낙동강의 사연을 품었던 삼강주막도 위태롭게 버텨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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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혼자서 이 넓은 강가에서 무섭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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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이 젊어서 붙들어가겠나, 돈이 있어서 훔쳐가겠나. 무릎이 아파서 걸음도 겨우 걷구만. 약은 먹어봐도 낫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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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주막을 하며 다섯 자녀까지 키운 유 할머니에게 청춘, 젊음이란 남들처럼 즐거움이 아니라 소금처럼 짜고도 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외모도 단정하고, 말수도 적다.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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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품에서 희로애락을 흘려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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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모란 업에 어울리지 않게 순한 성격의 유 할머니가 힘겹게 살면서도 동네 어른들이 얘기하듯이 비교적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졌던 것은 ‘한국의 나일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낙동강을 벗삼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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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가 어두워진 강 섶 주막의 낡은 상을 둘러싸고 권커니 청커니 하던 주객들이 물러가고 나면 유할머니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아픔도 괴로움도 다 쏟아버렸다. “예전에는 낙동강 물이 아무 소용없는 물이라고들 했지만 알고 보면 이 물이 얼마나 고마운지. 남풍양에서도 이리저리 논물 다 대 쓰고, 둑이 넘치게 흐르던 강물이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많이 줄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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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주막의 부엌문은 사방으로 나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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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에서 막걸리가 사라진 지는 꽤 됐다. 많은 사람이 돌아가며 마시던 귀빠진 사발도 모습을 감췄고, 컬컬한 탁주 한 사발에 여독을 풀던 나그네도 더 이상 없다. 그저 동네 안 사랑어른들이나 가끔 들르고, 여름철이면 다리 아래로 피서 나온 젊은이들이 소주에 라면이나 찾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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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둘, 부엌 하나, 툇마루 하나가 전부인 삼강주막의 앞마당에는 세 그루 고목이 서있고, 나무 그늘에는 살평상이 놓여져있다. 부엌에는 문이 사방으로 네 개나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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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바쁠 때면 어디든지 부르는 대로 바로 (뛰어)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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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하나의 부엌 아궁이에 두 개의 고래가 있어서 솥을 2개 동시에 걸 수 있도록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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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년 영화 ‘벼락감투’에 삼강주막 원형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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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에 제작된 영화 ‘벼락감투’(감독 홍일명)에 삼강나루터와 이 집의 전경이 잘 나와있다고 해서 그 영화를 촬영했던 배성학 기사를 수소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올 초 타계, 원형사진을 찾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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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래도 길이 잘 뚫려서 어디 다니시기는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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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꼭 6년 걸려서 다리(삼강교) 개통식을 했는데, 해봐도 좋은 것도 없어. 차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고 맨날 짐차만 빽빽 소리지르며 내달리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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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imaeil.com">magohalmi@imaeil.com

 

2007.08.04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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