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afefile/pds45/14_cafe_2007_09_03_07_29_46db3931b872d)
텅비어 있다.
ㅎㅎ
빈 주막인 줄 몰랐단 말인가?
회화나무 그늘을 점령했던 왈짜패도 그립고
주인 할머니도 뵙고 싶다.
텅빈 것은 주막이 아니라
마음이요 사람의 정이 아닐까?
쓰러질듯 위태로운 주막 마루에 겉터 앉아
한 잔 하라며 잔을 밀어주는
할머니를 그려본다.
가을날
벗과 손잡고 다시 찾으리
잃어버린 사람의 정을 만나러...
![](https://t1.daumcdn.net/cafefile/pds46/1_cafe_2007_09_03_07_29_46db3931d0771)
낙동강·내성천·금천의 3개 강물이 합치는 곳이라 삼강나루로 불리고 주막은 20세기 초반에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족히 100년은 넘은 삼강주막은 방 2개, 부엌, 마루가 전부지만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무너질듯한 주막만 남아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복원공사를 하겠다는 관청의 안내문이 서 있지만 서글픔이 더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https://t1.daumcdn.net/cafefile/pds47/14_cafe_2007_09_03_07_29_46db3931f1a16)
다리가 뚫리던 2004년 4월,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매가 봉당마루에 앉아 쓸쓸히 눈물 훔치셨다고 한다. 할머니를 슬프게 한 것은 다리 준공이 아니라 멀어져 갈 사람의 발걸음 아니었을까?
![](https://t1.daumcdn.net/cafefile/pds46/6_cafe_2007_09_03_07_29_46db393211c7b)
마지막 주모 유옥연할머니의 생전에 인터뷰 기사를 가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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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삼강주막(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나루터)의 유옥연 할머니(88)는 ‘우리 시대 마지막 주모(酒母)’이다. 1917년 10월 20일 우막리 태생인 유 할머니는 열다섯살이던 1932년에 네 살 위인 남편과 혼인, 열아홉(1936년) 꽃다운 나이에 삼강주막을 사서 들어갔다. 70년 주모생활에서 겪은 애환이 한둘이랴만, 기쁨도 슬픔도 다 저 강물에 흘려버렸는지 별 말씀이 없다.
. ◆ “너무 늦었어, 내가 한 70만 됐어도…”
. “할머니, 이 집이 곧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다는데요?”
. “(집은) 이대로 놔두고 짚으로 지붕 이고, 수리만 한다네. 그치만 인지(지금) 지정되면 뭐해? 나이 아흔에. 내가 한 칠십(때)만 (지정)됐어도 좋았을 텐데…”
. 유 할머니는 삼강주막이 문화재로 지정된다고 해도 크게 반기지 않는다. 혼자서 아침 저녁 끓여먹기도 귀찮은데, 뒤늦게 문화재로 지정되는 게 대수냐는 것이다. 할머니의 체력과 기억력이 좀 더 좋을 때 지정절차를 밟았더라면, 민중사 생활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나루터와 주막, 그리고 우리시대 마지막 주모의 생애사를 더 정확하게 복원할 수도 있었으련만 그렇지가 못하다.
. ◆ 삼강주막과 달지주막
. 낙동강, 내성천, 금천의 세 강줄기가 합쳐지는 교통요충지 삼강나루터에 자리잡은 삼강주막이 사실 낙동강 700리에서 유일한 주막은 아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낙동강에는 삼강주막 외에 달지주막도 있다. 삼강주막의 강 건너편에 있는 달지주막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에 있다. 목청껏 부르면 들릴 것 같은 가까운 거리다. 두 주막 가운데 달지주막은 과객이 묵어갈 수 있는 큼직한 방도 두어개 있고, 말을 맨 흔적도 있다. 이에 비해 삼강주막은 숙박시설 없이 그냥 나그네들이 목이나 축이고 국수나 말아먹으면서 여독을 풀고 발을 쉬어가던 곳이다. 요즘은 밥 달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네 사람들이 더러 놀러나오고, 여름철이면 물놀이 온 사람들이 들르는 정도이다.
. ◆ 소금배가 다닐 때는 삼강에 주막 여러개
. “옛날에는 고배(소금배)가 여기까지 올라왔어. 여름에 물이 많을 때면, (크기가 작은 소금배는) 안동 하회 나루터까지 올라갔지.”
. 물길을 따라 낙동강의 맨꽁지인 김해에서 상류인 예안까지 소금, 해산물, 소(牛), 쌀 같은 물자가 오가고, 강을 건너 과거를 보거나 경북 북부지방을 다녀올 때, 그리고 점촌 장날이면 삼강나루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창 때는 주막이 서너개씩 늘어섰다.
. “수해 때 다른 주막은 다 떠내려갔어.”
. 갑술년 물난리 때 떠내려간 27채 가운데 주막도 2채나 된다. 힘센 사람이 양손으로 ‘콱’ 밀면 마치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는 삼강주막이지만 그 많은 물난리를 다 이겨왔다. ‘토끼집’이라고 할 만큼 방도 작고, 천장 없이 지붕 서까래를 이고 살지만 1900년대 초에 나무로 지은 덕에 처마 밑까지 강물이 차고 들어와도 물만 빠지면 집 뼈대는 고스란히 살아남는다. 흙집이 아니어서 물이 빠지면 대강 고쳐서 다시 살 수 있다.
. ◆ 젊음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해
. 유 할머니는 남편이 농사를 지었다고 하고, 동네 사람들은 사공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한창시절, 삼강나루에는 소가 6마리나 들어가는 큰 배와 작은 배 두척이 있었단다. 그러나 뱃길이 끊기고, 나루터 자리에 6년 공사 끝에 삼강교가 놓이면서 자연스럽던 3강의 풍치는 사라졌고, 낙동강의 사연을 품었던 삼강주막도 위태롭게 버텨오고 있다.
. “할머니 혼자서 이 넓은 강가에서 무섭지 않으세요?”
. “뭐 나이 젊어서 붙들어가겠나, 돈이 있어서 훔쳐가겠나. 무릎이 아파서 걸음도 겨우 걷구만. 약은 먹어봐도 낫지도 않고.”
. 50년 전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주막을 하며 다섯 자녀까지 키운 유 할머니에게 청춘, 젊음이란 남들처럼 즐거움이 아니라 소금처럼 짜고도 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외모도 단정하고, 말수도 적다.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 ◆ 낙동강 품에서 희로애락을 흘려보내
. 주모란 업에 어울리지 않게 순한 성격의 유 할머니가 힘겹게 살면서도 동네 어른들이 얘기하듯이 비교적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졌던 것은 ‘한국의 나일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낙동강을 벗삼은 덕분이 아닐까 싶다.
. 사위가 어두워진 강 섶 주막의 낡은 상을 둘러싸고 권커니 청커니 하던 주객들이 물러가고 나면 유할머니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아픔도 괴로움도 다 쏟아버렸다. “예전에는 낙동강 물이 아무 소용없는 물이라고들 했지만 알고 보면 이 물이 얼마나 고마운지. 남풍양에서도 이리저리 논물 다 대 쓰고, 둑이 넘치게 흐르던 강물이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많이 줄었제.”
. ◆ 삼강주막의 부엌문은 사방으로 나있어
. 삼강주막에서 막걸리가 사라진 지는 꽤 됐다. 많은 사람이 돌아가며 마시던 귀빠진 사발도 모습을 감췄고, 컬컬한 탁주 한 사발에 여독을 풀던 나그네도 더 이상 없다. 그저 동네 안 사랑어른들이나 가끔 들르고, 여름철이면 다리 아래로 피서 나온 젊은이들이 소주에 라면이나 찾는 정도다.
. 방 둘, 부엌 하나, 툇마루 하나가 전부인 삼강주막의 앞마당에는 세 그루 고목이 서있고, 나무 그늘에는 살평상이 놓여져있다. 부엌에는 문이 사방으로 네 개나 달렸다.
. “(한창) 바쁠 때면 어디든지 부르는 대로 바로 (뛰어)갔제.”
. 그러고 보니 하나의 부엌 아궁이에 두 개의 고래가 있어서 솥을 2개 동시에 걸 수 있도록 해두었다.
. ◆ 56년 영화 ‘벼락감투’에 삼강주막 원형 나와
. 1956년에 제작된 영화 ‘벼락감투’(감독 홍일명)에 삼강나루터와 이 집의 전경이 잘 나와있다고 해서 그 영화를 촬영했던 배성학 기사를 수소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올 초 타계, 원형사진을 찾는데 실패했다.
. “할머니, 그래도 길이 잘 뚫려서 어디 다니시기는 좋겠어요.”
. “올 봄에 꼭 6년 걸려서 다리(삼강교) 개통식을 했는데, 해봐도 좋은 것도 없어. 차는 버스 한 대 다니지 않고 맨날 짐차만 빽빽 소리지르며 내달리는 걸.”
. 최미화 편집위원 magohalmi@imaeil.com">magohalmi@imaeil.com |
200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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