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스크랩] 대구 나무 답사...달성공원 서침나무

임병기(선과) 2008. 6. 6. 17:47
728x90
728x90

 

서침 나무

 

서침나무...출처/나무를 찾아 나를 찾아

이정웅(전 대구광역시 녹지과장)

 

자가용 차가 늘어나고 우방랜드 같은 새로운 놀이공간이 생겨서 그렇지 30대 이상의 대구사람이라면 누구나 달성공원에서 찍은 사진 한장쯤은 가지고 있을 만큼 한때 달성공원은 대구의 명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쇠퇴해서 동물들의 재롱을 구경시키려는 엄마들과 유치원생들이 찾고, 산업화 이전에 열심히 살아온 이제는 뒤로 밀려난 노인들의 모임장소로 활용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겉모습과는 달리 누가뭐래도 달리 달성은 대구의 본향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화원동산은 원래 이름이 성산(城山) 또는 술잔을 엎어놓은 형상을 하고 있어 잔뫼 또는 배성(盃城)이라 하며, 낙동강변에 우뚝 솟아 凸달성(雄達城)으로도 불리웠고, 반면에 달성공원은 주변이 높고 안쪽은 오목한 것이 곡식을 계량(計量)할 때 쓰는 말 즉 두(斗)형과 흡사하여 凹달성(雌達城)이라했다.

 

뿐만 아니라 화원 성산에 살던 사람들이 어느 땐가 다른 무리들에게 밀려나 새로 거쳐를 옮긴 곳이 달성이라 한다.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화원동산일대에 남아있는 고분군과 달성이 서기 261년(첨해왕15) 신라에 의해 축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달성이 언제부터인지 우리 대구의 명문 거족인 달성서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아마, 여말(麗末) 서진(徐晋)이라는 분이 달성군(達城君)으로 봉해지면서 받은 봉토(封土)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대에 이르러 달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정에서 서침(徐沈)이란 분을 통해 남산동 부근의 국유지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자 기꺼이 헌납하는 대신 생활이 어려워 정부로부터 빌려 먹은 환곡(還穀)이자를 한섬 당 5되씩 경감해 줄 것을 요구해 가난한 고을사람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있는 3만여평의 국유지 전부가 당시 서침이 기증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다만, 그 면적이 얼마이든 나라와 이웃을 위해 조건없이 베푼 훌륭한 어른의 혼이 서린 곳이다.

 

비록 늦었지만 21세기 초입 공원내 가장 중심지에 크고 잘 생긴 회화나무를 골라  “서침나무”라 불러 그 분의 숭고한 나라와 이웃사랑 정신을 본 받고자 한다.

 

홍만선이 지은<산림경제>에 의하면 「회화나무 3그루를 중문에 심으면 부귀를 누릴 수 있다」하였으며, 따라서 선조들이 서원(書院)등에 많이 심었다.

 

달성은 나라가 어려울 때 국채보상운동이나 2.28 학생의거를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은 대구정신의 산실이다.

 



귀암서원 숭현사전경/문화재청

 

귀암서원은 서침, 서거정, 서해, 서성 등 달성서씨의 선조를 모시는 곳이다. 1665년 창건한 건물로 처음에는 영구산에 있었다.

 

1675년(숙종 1) 귀계 서침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다가 1718년(숙종 44) 동산동에 있는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사가 서거정 선생을 합향하고 그후 약봉 서성 선생과 함제 서해 선생을 추향하였다.

 

2007.06.16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