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대구시

[스크랩] 대구 나무 답사...제일교회 현제명나무, 흑호두나무

임병기(선과) 2008. 6. 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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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성당 맞은편 언덕위 제일교회에 현제명 나무로 명명된 수령 200년의 이팝나무가 있다. 현제명 선생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소년 시절 계성학교 등하교길에 위치한 이 이팝나무 아래서 감성을 키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대구시에서 이름 붙였다.

 

대구시 녹지과장으로 정년하신 이정웅님은 계산성당. 제일교회. 동산을 테마 공원으로 개발하여 대구의 몽마르뜨 언덕으로 관광자원화 하면 좋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제일교회는 나무 답사가 아니라도 계산성당- 삼일운동 길-동산 기독교 선교 박물관-서문시장-달성공원은 대구 골목길 답사 동선에 위치하여 유익하고 재미 넘치며 달구벌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현제명은 "기독교도로서 사업을 하던 부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회 성가대에서 서양음악을 익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면서 서양선교사에게서 피아노·바이올린을 배웠다.

 

전주 신흥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다가 숭실전문학교에서 알게 된 레인보우레코드회사 사장인 R. 하버의 추천으로 무디 성경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음악을 배웠다. 1928년 시카고에 있는 건(Gunn) 음악학교에서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미국 유학시절에 〈고향생각〉·〈산들바람〉 등의 가곡과 찬송가를 작곡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영어교수로 있으면서 음악부에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만들고 공회당에서 최초의 공연을 가지는 등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30년대에는 빅타레코드사와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 음반을 취입했다. 1932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33년 홍난파와 함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1937년 미국 건 음악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가 유학가기 이전부터 박사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가 쓴 박사 학위 논문이 어느 글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44년에는 일제의 어용음악가 조직인 조선음악가협회와 경성후생악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친일행위를 했다.


 

1945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모체인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8·15해방 후 한민당 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고, 1950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향전〉을 총지휘했으며, 1954년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했다.

 

1955년 마닐라 음악회의에 참석, 195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국제음악회의에 참석했다. 1955년 예술원상 등을 받았고,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왕자호동〉, 가곡 〈오라〉·〈니나〉·〈나물캐는 처녀〉, 국민가요 〈희망의 나라로〉·〈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다음 백과사전


 

"이팝나무는 키가 20~30m나 되고 굵기도 몇 아름이나 될 정도로 자라는 큰 나무로, 5월 초순에 파란 잎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이 가지마다 소복소복 피어난다. 꽃잎은 가느다랗게 넷으로 갈라지는 모양이고, 꽃이 피면 보름 정도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 활짝 피었다가 마치 눈이 내리듯 우수수 떨어지는 낙화 순간도 장관이다. 꽃이 지고 나면 타원형의 자주색 열매가 맺힌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경북 남부에서 전북 중간쯤을 잇는 선의 남쪽에 자라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300~500년의 이팝나무만도 8곳 10여그루나 된다. 이 중 경남 양산시 상북면 신전리, 경남 김해시 한림면 신천리, 김해시주촌면 천곡리 등의 이팝나무가 크고 아름다운 나무로 유명하다. 이팝나무는 농민들이 오랫동안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 삼았기에 보호가 잘 돼 노거수가 많은 편이다.

이팝나무는 우리나라와 함께 일본과 중국의 일부에서 자라고 있는 세계적 희귀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무를 처음 본 서양인들은 눈이 내린 나무처럼 보여 '눈꽃(Snow flower)나무'라 불렀다. 한자이름으로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람이 죽어 저승의 6도(극락, 사람, 지옥, 아귀 등)로 갈 때 뇌물로 관 속에 넣어주는 쌀(육도미)과 관련해 붙여졌다는 '육도목(六道木)', 잎을 차 대용으로 쓴다고 해서 붙여진 '차엽수(茶葉樹)' 등으로 불린다.

'이밥에 고깃국!' 먹고 살기 힘든 시절, 고깃국과 함께 하얀 쌀밥을 먹는 것이 최고의 바람이던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어른들이 많다. 북한에서는 요즘도 쌀밥을 '이밥'이라 한다. 흰꽃으로 덮인 이팝나무는 쌀밥을 연상시키므로 '쌀밥나무'를 뜻하는 '이팝나무'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밥'이 '이팝'으로 변음되어 '이팝나무'가 된 것이다. '이밥'은 '이(李)씨 밥'으로, 조선왕조 시대 벼슬을 해야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 한다.

이팝나무가 쌀밥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어느 며느리의 한(恨) 서린 죽음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경상도 땅에 18세에 시집을 온 착한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온갖 구박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한 번은 큰 제사가 있어 제사에 쓸 쌀밥을 짓게 되었다. 평소 잡곡밥만 짓던 며느리는 처음 쌀밥을 지으면서 혹시 잘못 돼 꾸중듣게 될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뜸이 잘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개를 떠 먹어 보았다.

그것을 보게 된 시어머니는 제사에 쓸 밥을 며느리가 먼저 먹었다며 갖은 학대를 일삼았다.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어느날 뒷산으로 올라가 목을 매 죽었다. 그 이듬해에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가득 피워냈다. 쌀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 나무가 되었다며 동네사람들은 그 나무를 이팝나무라 불렀다.

이팝나무 꽃이 특히 풍성하게 잘 피면 그 해 벼농사에 풍년이 드는 조짐으로 알았고, 그로써 이밥을 먹게 된다 하여 이팝나무라 불렸다는 설과 하얀 꽃이 나무를 덮고 있는 모습이 밥 주발 위로 봉긋이 올라온 쌀밥 모양이어서 이팝나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명칭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꽃 피는 시기가 입하(入夏) 무렵이어서 '입하나무'라 부르다가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 전북 일부 지방에서는 지금도 '입하목'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영남일보

 

흑호두 나무

 

"미국 동부지역에 넓게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진 낙엽활엽수로 수고가 45m, 흉고직경이 2m정도까지 , 크게 자라는 가래나무과의 흑호두나무(Juglans nigra L. )가 대구 제일교회 구내에 자라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대구수목원의 "식물도감"이나, 산림청 임업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수목도감"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수령이 8~10년 정도 되어야 열매가 열린다는 "원색식물도감 (홍성천외 2005, 대구 동아출판사)의 설명으로 보아 심어진 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흑호두...이정웅의 푸른나무

 

장소가 1910년대 선교사 들이 살던 동산병원 부지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미국계 동부지역의 선교사가 가져와 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도감의 설명에 따르면 목재는 고급가구재로 열매는 식용이 가능하다고 하나, 나무를 관리하고 있는 교회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너무 단단해 쉽게 깨어지지 아니하고,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도 호두보다 적다고 한다."...이정웅의 푸른나무 

 

2007.06.16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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