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문경시

[스크랩] 문경...대승사 윤필암

임병기(선과) 2008. 6. 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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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암에 대하여는 「 상산지 」· 「 대승사사적 」·「 동문선 」등에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있다. 먼저 「 대승사사적 」에 따르면 윤필암은 1380년(우왕 6) 각관대사가 창건하였다 하였으며, 「 동문선 」의 이색기에는 이때 각관과 함께 찬성 김득배의 부인 김씨에 의하여 조성되었다고 하였으며, 고려 나옹화상의 출가처임을 밝히고 있다.

 「대승사사적 」에는 1645년(인조 23)서조 · 탁잠 양사 중건, 1765년(영조41) 야운화상 중건, 1806년(순조 6) 취운종백 중건, 1885년(고종22) 창명장로 중건이라 하였다."


 

암자가 온통 꽃밭이다. 일년내내 꽃피고 새 노래하는 극락 화원이련가? 비구니 스님들의 지극한 불심이 꽃으로 만개한 듯하다. 멀리 보이는 윤필암 사불전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 처럼 부처를 모시지 않고 사불산 정상의 바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유리 창을 내었다.


 

훗날 답사를 떠날 우리님들을 위해 윤필암 내력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암자는 찬성사 김득배(金得培)의 처의 발원으로 각관(覺寬) 스님이 우왕 6년(1380)에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는 김득배가 죽은 지 18년, 공민왕이 시해 된지 6년 나옹화상이 열반한지 4년 되는 해다.

 

이 모두가 윤필암과 직간접으로 관련 있음이 이색이 찬한 <윤필암기>와 상주의 역사를 기록한 『상산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색은 상주 사람이라고 인식될  만큼 이곳과 인연이 깊다. 외가가 함창인데다 유배생활도 이곳에서 하게 된다.

 

특히 허물없이 지내고 존경했던 영해출신 나옹선사의 출가지인 묘적암이 바로 옆에 있다.

 

이러한 인연이 있는데다 김득배의 처, 서흥 김씨 부인의 부탁이 있었기에 이색이 <윤필암기>를 쓰게 되는 것 같다.  김씨 부인은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신원을 부군의 제자인 이색과 정몽주 등과 의논하면서 백방으로 힘썼었으나 이들마저 친원파에 밀려 성사되지 않자 모든 것을 희사하여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 같다."


 

또한 윤필암에는 재미난 이야기가..."지금의 윤필암은 청담 스님의 따님이신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으로 있는 묘엄 스님의 출가지로 유명하다. 1945년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대승사에 계실 때 속가의 아버지를 면회 온 청담스님의 딸을 성철스님이 몇날며칠을 두고 설득시켜 그해 단오 날 이 암자에서 성철 스님 손수 가위를 들고 삭발시켰다."...전해오고 있다.



대승사 윤필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문화재청


"이 불상은 사중 전언으로는 1950년대 중반 문화재 절취범에 의하여 밤중에 도난당하였으나 현몽하여 " 절은 지키지 않고 잠만 자느냐" 는 질책에 여러 스님들이 깨어나 살펴보니 불상이 도난되었는데 절취범은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담장밖에 밤새 헉헉거리고 있으므로 이를 붙잡아 불상을 도로 찾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 때 좌수의 끝 부분이 부러져 수리되었을 뿐 다른 손상은 없었다.

 

불상의 총고는 32㎝ ,슬폭 23㎝에 견폭 16㎝, 두고 11㎝의 소형 목불에 도금되었다.
개금원문에 따르면 90여년 전에 최후로 개금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에 고금으로 인하여 불상 본래의 모습에 변화가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은 계란형으로서 조선시대 후기 불상양식과는 다르고, 통견의 법의는 비교적 단조롭게 처리되었으며, 삼도가 역연하다. 그렇다고하여 고려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는 두터운 도금이 입혀진 현상으로는 속단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불상은 두터운 한지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검정색 감실내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이 감실은 불상 조성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였으나 이 역시 그 제작 시기가 오래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불상의 저부에는 복장 장엄곰이 판목으로 밀폐되어 있었으며, 이는 3개의 철정으로 고정되었는데 그 내부는 개비하지 않았다.

 

다만 복장 장엄공 외부에는 2회에 걸친 개금원문이 주서된 다라니로 밀봉되었으나 윤필암 감원 은우스님 및 대중들의 양해 아래 조사 후 복원 할 수 있어 불상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원문은 1851년(철종 2) 개금원문과 1908년(순조 2)의 개금원문 2종이므로 불상의 조성 하한은 1851년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불상은 약 90여년 전 최후로 도금되어 현재 이르고 있으나 도금으로 인하여 불상 양식에 변화를 주고 있다. 다만 계란형의 얼굴 등의 형태에서 불상의 형식은 그 조성이 더욱 올라갈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그 상한의 정확한 연대는 불상 복장의 개비가 첩경이겠으나 이것이 불가능한 현재로서는 위에 소개된 원문 및 불상의 양식에 의거 조선시대 중기, 15 ~ 16세기 경의 조성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형의 목조불상이 희귀한 현실을 감안하여 주어진 현상하에서도 문화재의 가치가 있다."


 

암자 측면에 요상한 물건이 매달려 있다. 풍경은 아니고 그렇다고 요강은 더더욱 아닐테고 ... 창 너머를 슬쩍 들여다보고서야 짐작 할 수 있었다. 윤필암 대중들에게 공양시간을 알리는 종(?)으로 보였다. 다른 절집은 대형 목탁으로 공양시간을 알린다.


 

 암벽 위의 탑을 보고 사불전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불암 부처와 조화를 위해 조성한 탑인지 비보목적의 석탑인지 궁금하다. 때마침 차를 빼달라는 호출로 근접해서 볼 수 없었지만 다녀온 광해와 산마루님은 옥개석에 연꽃이 피어있었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사불전에서 바라본 사불바위. 삼국유사에 따르면  “죽령 동쪽 백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고, 진평왕 9년 정미(丁未)에 별안간 사면이 방장(方丈)만 하고 사방에 여래가 새겨진 일대석(一大石)이 붉은 비단에 싸인 채 하늘로부터 산정(山頂)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고향집 처럼 마냥 머물고픈 절집이다. 송수권의 시 한 수 흥얼거리면서 그냥 그냥 그렇게......

 

여승..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2007.06.03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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