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린 시간이 초교생들 등교 시간이다. 정림사지 석탑은 조잘조잘 거리는 꼬마들이 귀여운 듯 먼 발치에서 바라본다.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를 대하는 교육방법과 다를바 없지 않은가?
사람이 사는 집이든, 절집이든 사람이 북적거려야 살아 있는 공간이라고 조부님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더욱더 사람과 가까워질려면 높은 담을 낮게 하든지, 허물어 버리면 어떨까? 문이 없다고 진입 동선을 유도하는 방법이 없지 않을텐데...
정림사지 박물관이 휴관이라고 정문 출입을 제지하던 젊은 학예사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박물관내 출입은 허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정림사지 답사를 허락하더니 둘러보고 나올 때는 자료집을 챙겨주며 다음에 꼭 박물관을 들려달라고 했다. 아침부터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에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태평팔년은 요(遼)의 연호(年號)이며 고려 현종 19년(1028년)이며 그때까지도 정림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전형의 일탑일금당 배치로 남쪽에서 진입하면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전개되며 주변을 회랑으로 두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정림사터에 오층석탑은 옥개석에 비해 좁고 낮은 1기단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세워놓았으며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고, 얇고 넓은 옥개석처마에는 부드러운 반전이 보인다. 멀리서 바라보면 크기에 비해 사람을 압도하는 무거움 보다는 부드럽다는 분위기지만 접근할수록 녹녹하고 만만치 않은 인상이다.
신라석탑은 목탑-전탑-모전석탑-석탑의 변천이 일반적 이론이지만 감은사지, 고선사지 석탑 이전에 분황사 모전석탑에 충실하면서 석탑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탑리오층탑이 있으며, 탑리 탑에서도 목탑의 배흘림 기둥을 모방한 모서리 기둥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백제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익산 미륵사지 탑이 충실히 목탑의 요소를 따랐다. 정림사지 탑은 한층더 석탑 유형으로 진화된 탑으로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부여 군청)
정림사지 탑은 백제 석탑의 시원이며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인 미륵사지탑과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이후 백제계열 석탑의 모범 답안이 되었다.
한시절 우주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 문구로 인해 소정방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으로 세운 탑으로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후 개소리를 집어 넣은 것은 탑이 건립된 한참 후의 작태이었다.
발굴된 기와 명문으로 고려시대 조성되었다고 알려진 석불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에 좌정하고 있다. 마모와 훼손이 심하며 얼굴과 갓은 후대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전체 세부적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지권인 수인의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역시 훼손이 심하지만 대좌는 상대,중대는 팔각,하대는 3겹으로 구성되었으며 복련과 안상을 표현하였다. 이는 통일신라 하대 불상,부도 좌대에 나타나는 형식을 답습한 모습 아닐까? 신라화된 백제 고토의 고려시대 장인의 작품이라면 나의 건방이겠지?
정림사지를 비롯 부여의 문화유산은 만나고 있으면 흐뭇하고 말 없이도 이해가 되는데 막상 떠날려면 눈물샘을 자극하고 애틋한 그리움이 치밀어 온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아버지가 전방 부대에 배치된 자식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그 기분 같은...
2007.03.12 |
'충청남도 > 부여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부여...정계채 가옥 (0) | 2008.06.06 |
---|---|
[스크랩] 부여...궁남지 (0) | 2008.06.06 |
[스크랩] 부여...부여 동헌,부여 객사 (0) | 2008.06.06 |
[스크랩] 부여...낙화암,고란사 (0) | 2008.06.06 |
[스크랩] 부여...부소산성 (0) | 2008.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