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청 홈페이지 글을 옮겨 왔습니다.
연꽃 핀 궁남지에 다시 올 날을 기대하며...
부여읍 남쪽에 위치한 백제시대 별궁 연못이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이미 한성시대(漢城時代)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한성시대에 조영된 왕궁에 딸린 연못은 아직 발굴된 바 없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址)와 함께 발굴되었다.
공산성에서 발굴된 이 연못은 바닥이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의 연못인데 직경 7.3m, 바닥 직경 4.8m, 그리고 깊이 3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보면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연못은 그자체만 확인될 뿐 여기에서와 같은 삼신산(三神山)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州山)을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삼신산(三神山)에는 신선(神仙)과 불로초(不老草)가 있고, 황금(黃金)과 백은(白銀)으로 된 궁궐도 있는 일종의 이상향이다. 따라서 기록대로 이 궁남지의 한가운데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조산(造山)이 있었다면 이는 중국의 진-한대(秦-漢代)부터 신선사상에 근거하여 삼신산을 조성하였던 것이 백제의 왕궁 조원(造苑)에 처음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 3만평 정도가 연못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크기는 발굴조사를 통해서 만이 확인될 수 있을 듯하다.
이 궁남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다른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의자왕(義慈王) 15년조에 보이는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라는 기록이다. 망해루(望海樓)나 망해정(望海亭)에서 대지(宮南池)를 바라보면 바다와 같이 시원한 느낌을 받았을 터이고, 이렇게 바다와 같이 큰 연못을 왕궁 근처에 만드는 것이 백제가 처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경우 문무왕대(文武王代)에 안압지(雁鴨池)를 만들고, 그 안에 삼신도(三神島)를 조성하며, 주변에 임해전(臨海殿)을 세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백제의 궁남지와 같은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제의 조원(造苑) 기술은 삼국 중 으뜸이었으며, 통일신라의 조원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7.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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