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질부성은 흥해읍 흥안2리(일명:낚시봉)에 있으며, 남미질부성과 같은 시기 즉 1485년전 신라 지증왕 5년(504년) 9월에 역부(役夫)들을 징집하여 흙으로 축성한 토성이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제4>>
북미질부성은 축성된지 425년 뒤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이 성의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 성주와 더불어 태조(왕건)에게 항복하여 (동국여지승람 흥해동편)고려에 속하였으나, 원종2년(1011년)에 흥해읍성이 축성됨에 따라 성의 기능이 약화되어 흥해군의 주변성으로서 조선시대 중엽까지 동북 해적을 막는 기지역할을 했다. 현재에는 성의 흔적만 남아 있고 성터에는 수십기의 묘지가 형성되고 잡초만 우거져 있다.
충비 순량비
이조 선조 16년 봄날에 흥해군수의 친구인 계림(鷄林) 일사(逸士)가 흥해에 유람와서 명승지를 찾아 여러날 묵게 되었는데, 북미질부성 아래 곡강 어구에 기암절벽이 둘러싸인 풍광을 보며 유람하니 아름다운 한 낭자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자태가 아름다워 희롱할 생각으로 시 한수를 크게 소리내어 읊었다.
"爾非三尺劍, 能斷幾人(너는 삼척검이 아닐진대 몇 장부의 간장을 끊었느냐)"라고 하자,
郎子가 시답하기를
"我本荊南和是壁, 秦城十五猶不易, 偶然流浪曲江頭, 況擧鷄林一腐儒"(나는 본시 중국 荊南의 和是壁같은 보배로서 秦나라 城15개로도 바꿀 수 없느니라. 우연히 곡강두(曲江頭)에 유랑하지만 어찌 계림의 썩은 선비와 같이 하리...)
무안을 당한 계림선비는 흥해군수에게 무례한 낭자를 벌할 것을 권하여 娘子를 체포토록 하였다. 명을 받은 군노사령들이 낭자가 사는 흥안리에 가서는 양반의 거만한 태도가 미워서 洞任에게 사실을 말하고 낭자가 피신하게 하니 娘子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화가 가문에 미칠 것을 고민하다가 자결하기로 결심하고 유서를 쓴 후에 몸종인 順良과 하직하고 북미질부성 아래에 있는 곡강참포관소(曲江塹浦 沼)에 몸을 날려 죽고 말았다. 이에 몸종 順良또한 李랑자의 시신을 안은 채 순절하니, 듣고 순량의 충절을 기려 곡강어구 층암(層岩)바위에 충비순량(忠婢順良)의 비를 암각 하였다.
포항시청 홈페이지 글을 기져왔습니다.
2007.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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