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포항시

[스크랩] 포항...조사리 원각조사비

임병기(선과) 2008. 6. 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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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에서 동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동해안에 영일군 송라면 조사리라는 곳에 원각조사(圓覺祖師)의 비(碑)가 있다. 이 비는 옛 청하군 송라면 하송리 오역촌이라는 곳에서 약 5리쯤 떨어진 산기슭 도성암(道成菴)이라는 작은 암자에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의 방화로 불타버렸으며 그 당시 원각조사 비도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왜정시대에 큰 홍수로 도성암 터 앞에 하상(河床)이 파이면서 비 받침돌이 들어나기에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발굴하여 보니 거북 받침돌이었다.

 

이것이 원각조사의 비 받침돌 인줄 알고 그 부근을 뒤지어 그 비석을 발견, 보경사에서 그 비를 인수하여 경내에 옮겨 세우고져 하였으나 비문에 일본을 배척하는 문구가 있어 일본관헌이 비를 부수려 하니 보경사에서는 그 비를 숨기기 위해 진흙 속에 파묻었다고 한다.

8·15해방이 되자 송라면 조사리 동민들이 원각조사가 출생한 조사리 교회가 있는 뜰 안에 옮겨 세웠다. 그러나 불교신도들이 불교의 원각조사비를 기독교의 교회 내에 세워두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다시 조사리 북쪽구릉 신당 솔숲 옆에 옮겨 세웠다.

 

원각조사의 휘(諱)는 마흘(摩訖)로서 그 조상은 김(金)씨이고 신라시대 만성(蔓城)이란 곳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 해와 달의 광명이 찬란하게 대지에 비치는 것을 보고 그 광명을 거둬 품에 안은 일이 있었는데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대종 원각조사 마흘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마흘이 탄생하기 전에는 오랫동안 날이 가물었는데 마흘이 탄생하던 날에 연 7일간이나 비가 내리어 가뭄을 해갈하였다고 한다.

 

 

원각조사는 나면서부터 기골이 청수하고 눈정기가 초롱하였으며 또한 울지 않아 키우는데 번거롭지 않았다고 한다. 원각조사가 어려서부터 워낙 총명하였으므로 3살 때에 천자문(千字文)을 다 외웠으며 다섯 살 적에 소학을 배웠고 6살 적에는 맹자, 논어, 중용, 대학을 통달하였고 9살 적에는 시경(詩經), 10살 때에는 서경(書經), 11살 때에는 주역(周易)을 이렇게 해서 사서삼경을 다 통달하였다고 한다.

 

12살 때에 아버지가 급작스러운 열병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님의 죽음을 보고 인생 무상함을 깨달아 그 이후 마흘은 마치 벙어리가 된 듯 다시는 입을 열지 않고 구릉솔숲에 들어가 인생이 무엇인지 명상에 잠기었다고 한다.

그 이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15살 되던 해에 마흘은 인생의 무상을 연구하기 위하여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동해의 만경창파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태양이 솟아오르자 온천지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바라보는 찰라 별안간 눈이 활짝 밝아지며 자신도 모르게 [하하]웃으며 [장하고 기특하도다 태양의 광명이여!]하고 외쳤다.

 

3년 전 그의 부친께서 세상을 하직하고 난 다음부터는 마치 무슨 돌덩이가 가슴에 걸려있는 듯 가슴이 무겁고 가깝증이 나서 혀조차 잘 구르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된 듯이 도무지 말을 하지 않고 늘 명상에 잠겨왔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동쪽 망경창파에 바다를 뚫고 돋아 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찰라에 우주인생의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입을 열기 시작하여

 

[천지만물과 나는 둘이 아니다. 저 태양의 광명이 나의 마음의 광명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여 곧 아는 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참된 앎이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을 초월한 것이다]라고 하는 등의 보통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고 하며 다시 3년이 지나 어머님께서 돌아가시자 그때에는 큰 충격을 받지 않고 [인생은 한 번 나면 죽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고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어머님의 3년 상을 치르고 야성(野城) 유(劉)씨에게 장가를 들어 농사를 짓고 평범하게 살았다고 하며 그리고 평상시에 예언(豫言)을 곧 잘하여 기적을 많이 낳았다고 전한다. 올해는 가물 것이니 논에 물을 많이 잡도록 하라든지, [올해는 홍수가 날것이나 제방이나 사태가 나는 곳에 있는 집들은 옮겨라] 하였으며 이런고로 여러 고을 마을사람들이 이인(異人) 혹은 성인(聖人)이라고 하였다 한다.


 

조선 세조임금 4년(1459)에 불교신자 묘정 이라는 사람과 제자 몇 사람에게 고하기를 [내가 죽은 1년 뒤에는 이곳에 역(驛)이 생기어 (易 ; 타고 온 말을 정류시키고 다른 말을 갈아타는 곳) 관원을 둘 것이다. 또 130여 년을 지나면 왜적이 크게 침입하여 산하에 백골이 뒹굴고 피가 천리에 흐르며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 것이다.

 

 그때에 서쪽 나라의 응원병이 와서 구원한다 하지만 천하가 시끄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 지방은 안온하며 천신이 보호하여 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함으로 백성들이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후 과연 죽은지 1년 뒤에는 오역촌이라는 곳에 관원을 배치하였으며 130여 년 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한다....출처 "포항시청 홈"



 

원각조사의 안태고향. 마을 이름도 조사리. 

제자리를 떠나 방황하던 탑비는 목도 잘리고 몸도 망신창이가 되어 고향 바닷가로 돌아왔다.

 

귀갑에는 王자가 선명해 왕사였음을 알 수 있다.

비신 상부를 귀접이 한  규수(圭首)는 보경사 원진국사비에서도 보이는

고려중기의 전형으로 모방은 아닌지?

 

예나 지금이나 조사리 앞바다는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건만......

 

2007.01.21

 

http://cafe.daum.net/moonhawje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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