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포항시

[스크랩] 포항...법광사지

임병기(선과) 2008. 6. 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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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여정의 피날레는 잿빛이 드리운 법광사지다.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한 사찰로 왕의 원당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에는 525칸의 대찰로 원효, 의상등 고승이 주지를 지냈다고 한다.

 

"웅장하던 옛 법광사가 토호의 부탁을 받은 초부가 방화를 하여 소실되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조 철종 14년(1863년)의 일이라 한다. 법광사가 소실되기 3개월전, 신광면 죽성동(대골)에 거주하던 박기래 소년이 어느날 밤 마당에 나갔다가 이상한 일일 목격하였다. 법광사쪽에서 큰 불덩이가 비학산 꼭대기까지 치솟아 그 일대를 대낮같이 밝히더니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소년은 이튿날 풍수인 서씨 노인에게 이 광경을 얘기 하였다.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제 법광사 기운이 다한 모양이구나. 법광사는 곧 폐사가 될 것이고 양산 통도사가 융창하게 될 것이다." 노인은 이어서 앞일을 예측하기를 예부터 비학산을 중심으로 한 신광지형을 학포안호지지형국학포안호지지형국, 즉 학이 호숫가에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였다. 그런데 호리등 계곡의 호수를 메워 분지를 조성한지 천여년이 지났으니 호수변에 서식하는 새인 학이 호수가 없어진 곳에서 머물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즉 비학산의 지운과 지정이 바로 불덩이 현상으로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 지정이 남으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은 산강수다한 통도사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광사는 물론이고 같은 비학산 지맥사에 놓인 천곡사도 폐사될 게 틀림없다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지 3개월 후에 법광사가 불에 타서 폐사되었으며, 신기하게 천곡사 역시 6.25사변때 방화로 소실되었다."...포항시청 홈

 

 

법광사 입구 상읍마을 당산목과 성황당(?). 오천년 민속을 미신으로 치부하여 말살을 자행한 군사정권 시절인 70년대 초에 성황당을 세웠다. 진심으로 고마웁고 존경하고 싶은 동네분들이시다.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우리문화에 대한 지식, 관심이 일천한 행정가들 잣대로 사라져 버린 우리 민속신앙이 부지기수 아닌가?

 

기회가 되면 성황당에 누구를 모셨는지, 동제를 올린다면 직접 보고싶다.


 

금당터에서 바라본 부러진 당간지주.  당산목이 있는 마을에서 법광사로 오르는 길 왼편 논에 서 있다. 하부가 부러진 것인지 온전한 것인지 땅속에 묻혀 식별이 곤란하다. 잘리고 기운 지주는 폐사지에서 느끼는 감상을 걷어내고 퇴락한 절터를 직시하라는 암시같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과 동행은 퇴락하여 스산한 절터가 오히려 오감을 자극한다.

 

동행인 안내로 당간지주 앞 논두렁에 박힌  연화문 고운 하대석과 곱게 마무리한 주춧돌,  반듯하게 손질한 장대석을 바라보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언제쯤 수습되어 제자리는 아니라도 옛님의 정성, 숨결을 되새겨 볼 수 있을런지?


 

이제 온건히 3층으로 돌아온 모습이다. 828~1747년은 삼층탑으로 1747년에서 최근 까지 오층(?)으로 세운 사층(?) 석탑이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일이지만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우리 모두가 아닐까?

 

아직도 숱한 문화재가 관심 밖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형태라도 보이면 보완 복원 이라도 할텐데 존재마져 사라져 버린, 명맥마져 끊어져 버린 유무형 문화유산이 얼마인가?

 

정신이 사라지면 순식간에 문화의 속국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데, 오늘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방방곡곡에 대원군 척화비라도 세우고 싶다면 국수주의자, 곰팡이 냄새나는 영감탱이로 낙인 받을까?

제기럴!!!

 

 

탑에서 발견된 탑지석 기록처럼 신라하대(828년)양식이 보인다. 층급받침은 전형이지만 줄어든 외형과 기단 면석의 탱주가 그러하다. 하지만 탑 앞에 놓인 영천 돌할매 돌할배 모양의 둥근돌이 더 눈에 들어온다.

 

사찰로 들어온 민간의 기복, 기자 신앙의 산물로 소원을 축원하며 갈고 간 흔적이 뚜렷하다. 우리에게 대형맷돌로 널리 려진 군위  법주사 탑 앞에도 있다.


 

삼층이 사층으로 삼층으로 돌고 돈 증거물(?)


 

법광사의 숨겨진 이면을 간직한 불사리 탑비. 탑의 층수. 중수 기록, 진신사리 내역 불사를 주관한 스님을 알려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지붕돌 양식으로 양단에 꽃을 새기고 제액 대신에 물고기가 유영하고 있다.

 

또하나 눈여겨 볼 것은 탑이 서 있는 좌대로  두개 돌 중앙에 좌대 홈이 있는대도 불구하고 뒤편으로 치우치게 다시 좌대홈을 낸후 비를 새운 것이다. 두 개의 돌의 악력 문제로 비신이 바로 서지 않아서일까?


 

잠시 나선 포행길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만행길이 되어 연꽃대좌 위에는 바람만 스쳐가고 있다.  그 긴 세월 기다림에 지쳐 대좌 상대석은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와 대좌위 부처님을 그리며 절을 올리는 듯한 모습이다.

 

두개의 원형으로 구성된 하대석은 16개 안상, 16잎 복련을 새겼다. 중대석은 8개 탱주가 보이며 상대석은 뒤집힌 채 뒹굴고 있다.

 

 

 널부러진 주춧돌, 고맥이돌 그리고 신방돌. 밭 전체가 석조 부재요 파편이다. 겨울 폐사지가 좋다지만 풀숲에 가리거나 들꽃에 숨어버린 여름 날 처럼 차라리 가리워졌으면 좋겠다.

 

동네주민의 도움으로 부도를 찾아 헤맸건만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서 있다는 생각이 범한 오류다. 무너져 둑 축대로 누어있단다. 법광사 석불, 배례석도 제자리를 찾고 흩어진 부재도 최대한 복원이 되는 날 비학산에 학이 다시 돌아올련지.

 

 

창림사지 숭복사지 무장사지 그리고 법광사지에서만 보이는 쌍귀부.

법광사지가 진평왕대에 창건되었다면 탑비의 주인공은 한 참 후에 인물이었겠다. 쌍귀부의 출현은 한세기도 더 지난 뒤 출현된 양식이니...

 

 

진평왕을 모신 승안전 앞에 애처롭게 앉아 있다.

왕의 원찰이었건만 철저하게 파괴되고, 아이러니하게 그 부재들로 왕을 모신 사당이 세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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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폐사지, 좋은 님들과 동행, 눈 내리기를 바랐다면 신이 노여워 했으리라.

 

2007.01.21

 

http://cafe.daum.net/moonhawje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선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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