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정은 신라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곳이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B.C.66) 3월 초하룻날 6촌(村)의 촌장(村長)들이 각각 그들의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옆의 언덕에 올라 회합을 갖고 6촌을 다스릴 유덕(有德)한 인물을 선출하여 군주로 모시고 도읍(都邑)을 정하자고 결정하였다.
이 때 나정 근처에 서운(瑞雲)이 드리워져 있고 백마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백마는 사람을 보자 하늘로 올라갔으며 6촌의 사람들이 알을 쪼개어 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있어 동천(東川)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어울려 춤추듯 놀고 천지가 진동하며 일월(日月)이 청명(淸明)해지므로 이에 세상을 밝게 한다고해서 혁거세라 이름하였다.
같은 날에 알영정(閼英井) 계룡(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계집아이 알영과 함께 짝지워 남산(南山) 서록(西麓)에 궁(宮)을 마련하여 놓고 봉양하여 두 성아(聖兒)가 13세 되던 해인 원봉(元鳳) 원년 갑자(甲子)(B.C.57)에 왕과 왕후로 삼고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로 하였다. 혁거세가 태어난 알이 마치 박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의 성(姓)을 박(朴)으로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곳에는 시조 유허비(始祖遺墟碑)가 있는데 높이 2.25m, 폭 45cm, 두께 21cm이다."...문화재 자료
"사적 제245호인 경주 나정(蘿井)이 신라 소지왕 9년(487) 봄 2월에 시조 박혁거세가 탄강(誕降)한 곳에 세웠다는 국가 최고 제사시설인 신궁(神宮)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확인됐다. 이곳을 발굴 중인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은 이전 조사에서 확인된 나정 정중앙 8각형 건물지(한 변 8m. 지름 약 20m) 주변에서 이 8각형 건물지 보다 앞서 축조되었음이 분명한 도랑 같은 대형 구상(溝狀) 유적을 확인했다고 24일 발표했다.
이 구상 유적은 마치 훌라후프처럼 원형을 이룬 채 한 줄로 연결되어 있으며 크기는 지름 약 14m에 너비 약 2m 안팎, 깊이는 최고 2m 내외로 밝혀졌다. 그 안쪽 토층은 조사 결과 크게 3개 층위를 이루고 있음이 드러났다.
맨 위층에는 숯을 소량 포함한 암갈색 진흙이었으며, 중간층은 밝은 황색이 도는 풍화토를 깔았고, 가장 아래층에는 회색 진흙이 퇴적되어 있었다. 암갈색 사질토와 명황색 풍화토는 8각 건물지를 축조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다진토층으로 확인되었으며, 또 그 중앙에서는 우물과 기둥 구멍 흔적도 드러났다.
따라서 8각형 건물지 이전에 이미 이곳에는 우물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모종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이다. 발굴단은 이같은 조사성과는 「삼국사기」가 말하는 신궁(神宮) 관련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소지왕 때에 시조 박혁거세가 탄강한 나을(奈乙이라는 곳에다가 신궁을 세우고 그를 제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나을은 현재의 나정(蘿井)일 것이라는데 학계 다수가 일치하고 있다.
이같은 「삼국사기」 기록을 존중한다면 신궁은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가 탄강 했다는 전설이 서린 나을(나정)이라는 우물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셈이 된다. 아울러 이번 조사 결과 제사시설임이 분명한 8각형 건물지 이전에 그 자리에는 원형 우물이 있었음이 드러남으로써 이런 문헌기록과 완전히 합치되고 있다.
한편 이번 조사 결과 평기와 출토 유물 중에는 기존에 확 '生'(생) 외에도 '義鳳四年'(의봉4년. 679년)이라는 글자가 적힌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부속 건물터 1채도 추가로 드러났다. 일부 '生'자명 기와는 주사(朱砂=황화수은)로 생각되는 붉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다. 주사는 도교신학에서는 약효가 가장 뛰어난 선약(仙藥)으로 간주된 것은 물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주술력이 있는 물질로 여겨졌다." 다음
발굴이 끝나지 않았는지 나정은 황량한 느낌이다.
진한의 육촌 시조를 모신 양산재.
알천 양산촌...이씨 시조 알천공, 고허촌...최씨 시조 소벌도리공, 무산 대수촌...손씨 시조 구례마공, 취산 진지촌...정씨 시조 지백호공, 금산 가리촌...배씨 시조 지타공, 고아촌...설씨 시조 호진공
홍익문
존덕사
200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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